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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니 Aug 25. 2024

호프 투 씨 유 어게인

Day. 2

2024년 8월 5일 월요일


홍박사✐


브리즈번 이틀차. 여행지가 유럽이었다면 일정을 유적지와 박물관으로 채웠겠지만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은 호주에서의 여행은 그와 다르면서도 이곳만의 매력을 온전히 느낄만한 계획이 필요했다. 여행 전에 구글맵으로 살펴본 브리즈번은 마우스 커서를 옮길 때마다 크고 작은 000 Park가 출몰했고, 평소 숲과 공원을 애정하는 우리에겐 물 반 고기 반 같은 기회의 땅처럼 보였다. 여행 내내 공원만 돌아다녀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옮기는 곳마다 공원이 있을 정도라 자연스레 그리 될 요량이었다. 준비물은 돗자리 하나와 물 한 병 그리고 각자 읽을 책 한 권씩. 브리즈번강을 따라 사람들을 여기저기 옮기는 페리(City Cat)를 타고 뉴 팜(New Farm Park)에 도착했다.


팍팍한 삶에 반드시 필요한 팍


뉴 팜은 브리즈번 동쪽에 있는 지역인데 시티 중심과 다르게 아담한 주택이 많은 한적하고 조용한 동네였다. 리뷰를 통해 공원 한편에 아이들을 위한 엄청난 놀이터가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오와! 페리에 내리자마자 영험한 보호수로 여겨질 정도의 한아름이 넘는 아니 거대한 나무들이 입구부터 여기저기 우뚝 우뚝 무심하게 서있었다. 어제부로 이름을 알게 된 아프리칸 소시지 나무부터 듣도 보도 못한 생경한 종의 나무들. 이곳에 와서 들었던 의문 중 하나가 어떻게 다들 이렇게 모조리 큰 것인가였다. 마트의 가지와 고구마부터 새, 나무, 사람들까지. 무엇이 당신들을 이런 사이즈로 만들어주셨단 말입니까. 드넓은 땅덩어리만큼 그 종자부터 길이, 넓이, 무게를 스스로 한계 짓지 않고 자란 결과라면 이 땅의 풍요로움에 조금 샘이 날 법했지만 지구 안에서의 다양성으로 여기면 경이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풍경에 넋이 나가 걷다 보니 금세 놀이터에 도착했다.


월요일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엄마 아빠와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들이 꽤 많았다. 이은이를 그 사이에 풀어놓고(?) 김 군과 나는 벤치에 앉아 관찰모드로 들어갔다. 다소 낯설었는지 쭈뼛대는 아이에게 또래들에게 인사라도 한마디 건네보라고(=영어 한 마디 해보라고) 격려했다(=채근했다). 영어학원 1년 차로서 띄엄띄엄 단어를 내뱉기는 했지만 네이티브 키즈 스피커들 사이에서 아이는 완벽한 이방인일 뿐이었다. 그러다 한 꼬마가 다가와서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고 우리 셋의 짧은 영어 수준에 맞게 작은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갑자기 넷은 친구가 되었고 여러 가지 놀이를 함께 했다.


맥스의 에너지는 맥스였다


아이의 이름은 맥스. 브리즈번에서 유치원을 다니고 있는 6살 남아.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 보니 엄마 아빠는 러시아 사람이고, 호주로 이민 온 후 이곳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아직 어리지만 조리 있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똘똘한 아이였다. 영어가 부족한 자신의 부모와는 노어와 영어를 함께 섞어 이야기했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스스로를 러시아에서 왔다고 밝힐 만큼 얼마간 자신을 이민자로 자각하는 듯했다. 어쩌면 완벽하게 이방인인 우리의 낯선 표정과 몸짓을 알아차리고 친절히 말을 걸어준 것일까. 농담 같은 망상이었지만 상상 가능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강가 풍경. 겨울이라 저녁이 빨리 찾아온다


1시간가량 신나게 놀고 헤어질 무렵, 잠깐이나마 친구가 되어준 맥스가 새로운 고향, 브리즈번에서 땅속에 단단히 자리 잡은 이곳의 나무들처럼 무럭무럭 잘 자라나길 바랐다. 그리고 이민자들의 나라인 호주에서 그 역시 한 명의 이민자로서 우리처럼 낯선 이들의 마음을 잘 헤아릴 줄 아는 마음씨 넓은 옆집 청년이 될 수 있을 거란 확신도 들었다. 마음에 쏙 들어와 버린 공원에서 예기치 못한, 어쩌면 영영 보지 못할 인연을 만난 하루가 아쉽게도 저물어갔다.


굿바이 맥스. 아이 호프 투 씨 유 어게인.






김 군✐


몇 년째 고질적인 두통에 시달리고 있다. 한 번 발동이 걸리면 꽉 끼는 모자에 억지로 머리를 욱여넣은 듯한 감각이 며칠간 사라지지 않고 계속된다. 신경과에서 사진도 찍어 보았지만 ‘혈관성 두통’과 ‘신경성 두통’이라는 진단명만 나왔을 뿐 원인은 불명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미리 대비도 하지 못하고 느닷없이 시작되는 통증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기약 없이 기다리는 수 밖에는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이 고통을 피해보고 싶어 책, 기사, 누군가의 글 등을 닥치는 대로 찾아보고 온갖 마사지와 스트레칭들을 따라 해 보기도 했는데 단 한 가지, 술과 커피가 뇌의 탈수 작용을 촉진시켜 두통에 백해무익하다는 내용만은 흐린 눈을 하고 애써 지나쳐 왔다. 이 두 가지 물질들로 말하자면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사랑해 마지않는 삶의 묘약이자 쾌락의 엑기스이기 때문이다. 늘 시간이 부족한 나에게 술과 커피는 단시간에 텐션을 끌어올려주는 저비용 고효율 에너지 부스터의 역할을 해 주곤 했다.


항상 에너지 넘치는 홍박사가 공원을 달리고 있다


그러나 증상은 점점 더 심해져 일주일 중 거진 6일을 고통에 시달리는 지경에 다다랐고 끝내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마치 현실적인 문제로 헤어짐을 택해야만 하는 상투적 주말 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지만 맑은 머리로 보내는 하루가 못내 더 그리웠던터라 과감히 술과 커피에 이별을 고했다. 참으로 서글펐다. 그리고 약 3주 후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떠나는 날부터 경미하게 시작되었던 두통은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었다. 술과 커피를 끊은 지 3주씩이나 되었는데! 이 좋은 곳에 와서 1분 1초가 아까운 시간에 왜 또 두통의 감각에 꼼짝없이 지배되어야만 하는가. 답답하고 억울했다.


어쩌면…

술과 커피를 마시지 않고 호주 여행을 한다는 것은 호주 겉핥기에 불과할 텐데, 이 귀중한 휴가를 겉핥기만 하다가 가야 하는 현실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과 잠재적 스트레스로부터 기인한 두통이 아닐까?

아니면…

술과 커피의 나라인 호주에서 억지로 이들을 멀리하려는 부자연스러움이 나도 모르게 두통을 유발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아니면…


결국 3주 만에 풍부한 우유거품이 봉긋하게 솟아 오른 찐한 플랫화이트에 입을 대고 말았다. 홍박사가 야심 차게 예약한 스테이크 하우스에서는 탄닌이 강력한 쉬라즈 와인을 에라 모르겠다 벌컥벌컥 들이켰다. 오랜만에 들이키는 카페인과 알코올은 즉각적으로 온몸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모세혈관을 타고 행복과 죄책감도 빠르게 퍼져 나갔다. 손끝 발끝이 짜릿짜릿했다. 곧 두통이라는 엄벌이 나를 단죄하러 찾아올 것 같았지만 뭐 어쩌겠나. 이미 늦었다. 겸허히 그 벌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입에 착착 붙던 호주산 쉬라즈 와인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두통이 더 이상 심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사그라드는 느낌마저 든다. 오늘 하루 커다란 공원에 돗자리를 깔고 이름 모를 새들을 가리키며 낄낄댈 때, 놀이터에서 이은이와 그새 친구가 된 맥스(아이들은 참 쉽게도 친구가 된다. 대신 헤어질 때도 엄청 쿨하다.)에게 건넬 영어문장을 애써 조립할 때, 마트에 들러 신중히 요깃거리를 고를 때도 머릿속은 놀라우리만치 고요하고 청명했다. 꼭 브리즈번의 하늘처럼!


그렇다면  두통의 원인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여전히 불명이다. 땅도, 공원도, 나무도, 햇살도, 뭐든지 큼직하고 널찍하고 여유로운 브리즈번에 와 있다 보니 고통을 느끼는 감각마저 느슨해져 버린 게 아닌지 어렴풋이 짐작해 볼 뿐. 아! 그럼 이곳에 와 있는 동안엔 사랑하는 나의 두 친구들을 굳이 멀리해야 할 필요는 없으려나…? 갑자기 슬며시 웃음이 새어 나온다.^^ 모쪼록 두통의 신께서 2주 동안만은 어디서 무엇을 마시든 나를 부디 못 본 척해주셨으면.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이은✐


오늘은 일찍 일어났다. 일어나서 수프에 치즈를 넣고 빵에 찍어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아침밥을 먹으니 점점 더 먹고 싶어 진다. 그런데 엄마가 안된다고 해서 슬프다.ㅠㅠ 우린 나갔다. 아빠가 엄청 큰 놀이터가 있는 공원에 간다고 했다. 가는 길에 너무 목이 말랐다. 엄마 아빠는 커피가 먹고 싶다며 카페에 갔다. 나는 엄마 아빠한테 물이 먹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아빠가 “니가 영어로 물주라고 말해봐.”라고 했다. 나는 좀 당황했지만 용기 내어 가 봤다. 나는 물이 얼마냐고 얘기하고 물어보고 계산했다. 그런데 아저씨는 내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참 웃긴 아저씨였다. 엄마가 계산해 줬다. 우린 공원으로 왔다. 그리고 max라는 아이를 만나 외계인 놀이도 하고 경도*도 했다. 참 재미있었다. 끝~!

*경찰과 도둑


이틀 만에 동네 주민 바이브



⛳︎ 오늘의 일
캄포스 커피 → 시티 페리 → 뉴팜 파크 → 점심 식사 (뉴팜 파크에서의 피크닉) → 보타닉 가든 (Bunya Walk) → 발드윈 놀이터 (Baldwin Lawn Playground) → 저녁 식사 (Walter’s Steak House) → 숙

◇ 캄포스 커피 (Campos Coffee)

가스웍스 플라자 (Gasworks Plaza) 빌딩 옆에 부스로 자리 잡은 카페. 근처 직장인들이 줄을 서서 커피를 기다리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브리즈번 외에 시드니와 멜버른에도 지점이 있다. 호주는 어딜 가나 맛있는 커피를 만날 수 있으니 굳이 힘들게 유명한 곳을 찾을 필요는 없다.


◇ 뉴팜 파크 (New Farm Park)

보타닉 가든이 브리즈번을 찾은 관광객을 위한 공원이었다면, 뉴팜 파크는 현지인들이 사랑하는 공원에 가깝다. 운동장처럼 널찍한 잔디밭에서 자유롭게 달리기를 하고 낮잠을 자는 여유를 부려볼 수 있는 곳. 특히 놀이터가 잘 되어 있어 아이와 여행한다면 꼭 들러보길 추천. 운이 좋으면 현지인 친구도 사귀어 볼 수 있다.


◇ 발드윈 놀이터 (Baldwin Lawn Playground)

보타닉 가든에 자리잡은 깔끔한 놀이터.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초록 빛깔의 다양한 놀이기구가 있다. 햇볕이 뜨겁다면 종려나무 그늘에서 휴식을 취해도 좋다. 가끔 커다란 도마뱀을 만날 수 있지만 꽤 순둥한 친구들이라 겁먹지 않아도 된다.


◇ 월터스 스테이크 하우스 (Walter’s Steak House)

현지인들에게도 관광객들에게도 인기 최고인 스테이크 하우스. 고기의 상태도 훌륭하고 분위기도 못지않다. 지친 여행 일정 중에 단백질 보충이 필요할 때 가면 몸도 마음도 완충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인기가 많아 반드시 예약을 하고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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