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
2024년 8월 7일 수요일
김 군✐
친절한 제임스의 차를 얻어 타고 오늘은 탬보린으로 향했다. 굽이 굽이 꽤나 달려야 했는데, 가는 동안 제임스는 한때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은퇴하고 비치몬트의 에어비앤비를 시작한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를 처음 봤을 때 따뜻하면서도 강인한 인상을 가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역시 살아온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는구나 싶었다.
우리는 한국에서 광고 만드는 등등.. 의 일을 하는 마케터라고 소개하자 그는 대뜸 호주에 와서 TV를 좀 봤냐면서, 이곳 광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다. 그리고는 곧 자신은 (한국 광고는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호주 광고가 쓰레기(Rubbish)라고 생각한단다. 갑자기 튀어나온 극단적인 표현에 나와 홍박사는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호주 광고에 국한지은 이야기였음에도 어쩐지 뒷맛이 씁쓸했다. 우리는 매일 사활이라도 걸린 듯이 매달려서 만들어 내는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쓰레기처럼 느껴진다는 것. 머리로는 이미 잘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들으니 새삼 웃펐달까.
암. 네. 그럴 수 있죠.
오전은 작은 상점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탬보린의 메인 스트릿(Gallary Walk)과 브루어리, 트래킹 코스를 둘러보고 오후에는 숙소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곳에서 키우는 귀염둥이 강아지 루시가 이은이를 아주 잘 따라서, 루시까지 다 함께 뒤뜰에 출몰하는 캥거루들을 쫓아다녔다. 집 앞을 쉴 틈 없이 날아다니는 여러 종류의 신기한 새들도 구경하고, 각자 한국에서부터 챙겨 온 책을 읽는 시간도 가졌다. 한국은 역대급 찜통더위라는데 이곳은 햇살이 드는 곳은 훈훈하고 응달에 가면 서늘한 초봄 날씨 그 자체였다. 겨울로부터 만물을 깨우기 위해 한 톨도 버릴 것 없이 구석구석 에너지를 뻗치는 대자연 한가운데에서 연신 감탄을 하다가, 돌연 제임스의 ‘광고는 Rubbish’ 발언이 떠오르면서 한국으로 돌아가서 해야 할 모든 일들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어젯밤에는 집 앞에 나가 담요를 뒤집어쓰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는데, 무한하고 아득하게 흩뿌려진 별들과 생전 처음 보는 은하수에 잠이 오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동안 서울을 오가며 보아 온 밤하늘은 얼마나 얕디 얕은 것이었는지. 다 안다고 여기고 살았던 지난날들은 또 얼마나 얄팍함 그 자체였는지. 10년 넘게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나의 전부라고 여기며 해 왔던 일, 뼛속까지 익숙했던 생활 패턴과 반경, 옳다고 믿었던 삶의 방식까지. 끝없이 펼쳐지는 우주의 향연 아래에 전부 다 사소하고 시시하고 미미하게 느껴졌다. 너무 넓은 땅으로 여행을 와서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들은 탓일 게다. 이런 건 여행의 부작용이라고 해야 할까.
집 떠나와 처음으로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파워 N답게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렁처럼 깊어지려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 먹어본다. 호주에 있는 동안만큼은 그냥 ‘여기 지금’에 몰두하고 충실해지기로. (고민을 강제종료 할 수 있다는 것. 이런 건 여행의 순기능임에 틀림없다.) 삼시 세끼 뭐 먹을지, 오늘은 어디에 갈지, 내일은 뭐 하고 놀지, 모레는 무엇을 볼지, 그냥 그렇게 심플하게. 가뜩이나 짐도 많은데 나까지 무거워져선 안되니까.
암. 그렇고 말고.
오늘 다시 올려다본 밤하늘은 여전히 광활하고 반짝인다. 이 넓은 우주, 쓰레기도 만들고 나름 그 속에서 꽃도 피워 올리며 실컷 헤매면서 살아야겠다는 태평한 생각을 하면서 오늘의 일기를 마친다.
홍박사✐
비치몬트에서의 이틀차. 평소에 기상 알람을 새소리로 설정해 두는데 오늘은 진짜 새들이 나를 깨웠다. 세상에 있는 새란 새는 모두 모여 합창하는듯한 데시벨에 피곤함이 아닌 호기심으로 눈이 번쩍 뜨였다. 때를 놓쳐 우는 아이폰 속 캘리포니아산 새들이 속절없이 하찮게 느껴졌다. 곧장 정원으로 나가보니 전날 밤의 쏟아질 듯한 별들은 온데간데없고 아침 해가 게으르게 떠오르고 있었다. 면이 있는 것들은 모두 새벽이슬로 촉촉이 젖어있었다.
엉덩이가 젖든 말든 의자에 푹 눌러앉아 아낌없이 풍경을 담고 또 담았다. 생전 처음 보는 형형색색의 새들은 전날 뿌려 둔 새모이, 레몬나무, 오렌지나무의 과육을 부지런히 쪼아대며 지저귀었다. 역시 일찍 일어나는 새는 먹을 것이 많았다. 떠나오기 전, 한 여름 매미 우는 소리 때문에 새벽부터 미쳐버릴 것 같다는 동료의 과격하지만 애달픈 하소연이 떠올랐다. 나는 거기에서 해방되었다는 쾌감보다는 부디 오늘은 그가 푹 잘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지상 최고의 평온함이 눈앞에 실현되고 있음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이 순간을 위해 이 먼 땅으로 건너온 건가 싶었다. ‘이 숙소 참 잘 잡았다.’
어제의 호의에 이어 오늘도 제임스와 잉그리드 부부는 우리를 위해 차를 태워주신다고 했다. 사실 하루종일 머물러도 좋을 숙소라 일정 없이 지내볼까 했지만 끼니 해결이 문제였다. 식당을 가려면 차로 나가야 할 정도로 거리가 있었고, 냉장고에 요깃거리를 준비해 주셨음에도 세 식구가 세끼를 해결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 핑계로 신세를 또 질 수밖에 없었다. 일정상 오늘은 탬보린 마운틴 일대를 둘러보기로 했었는데 아침에는 제임스가 데려다주고 오후에는 잉글리드가 픽업해 주신다고 했다. 우리는 땡큐부터 어피리시에이트..까지 알고 있는 감사의 표현을 총동원해서 몇 번이나 건넸다. 그것으로 아쉬워 현금으로 마음을 전할까도 했지만 성의를 담아 선물을 하기로 결정했다. 마침 탬보린에는 기념품 가게들이 있어 준비하기에도 좋았다. 지금껏 귀국 선물을 준비하느라 시간을 할애한 여행은 많았지만 현지인을 위한 시간은 처음이었다. 예기치 못한 특별한 일정이 생긴 셈인데 일상 같은 일로 여행을 채우는 일이 근사하게 느껴졌다.
와인이 좋을 것 같아 차 안에서 제임스에게 넌지시 물었지만 특별한 날 외에 그렇게 즐기지 않는다고 했다. 더 이상 물으면 힌트를 주는 것 같아 단념.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우리가 보기에 편하고 좋은 것들을 찾았고 찻잎과 천연 재료로 만든 비누 몇 가지를 골랐다. 픽업 시간까지 꽤 많이 남아 이 지역에서 꽤 알려진 브루어리에 가서 낮맥도 한잔 하고, 트래킹 코스를 걸으며 폭포도 구경했다. 역시나 차가 없기에 조금 더 걷는 수고로움이 있었지만 여행의 일부로 받아들이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일정이 끝나고 약속한 시간이 되어 잉그리드를 만나 무사히 돌아왔다.
숙소에 도착해서 준비한 선물을 쑥스럽게 건네니 세상 가장 환한 웃음과 말로 기분 좋게 받아주셨다. 확실히 이곳 사람들이 우리보다 감정 표현이 더 크고 화려한 편인데 그런 것들을 수줍어하고 조심스레 여기기보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때로는 더 말하고 표현하는 것이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손쉬운 기술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사이라면 더욱더 그렇고. 한편 나이를 느끼는 나이가 되니 내가 고맙게 받은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잘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마음의 부담과 짐을 덜어 제로로 만드는 딱 받은 만큼만 이 아닌 더 생각하고 더 많이 챙기다 보면 나라는 사람의 그릇도 더 커져있지 않을까란 기대를 해본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란 제목의 책이 있다. 제목을 잠깐 빌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기억 속에’라고 덧붙여본다. 여행은 끝나고 세세한 기억은 휘발되겠지만 다정한 사람들이 준 며칠간의 환대와 마음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살면서 우리가 받은 이런 다정함을 누군가에게 살포시 건네줄 수 있기를 바란다.
고맙습니다. 제임스&잉글리드, 제가 쓸 수 있는 최고의 에어비앤비 리뷰로 한번 더 보답할게요(찡긋)
이은✐
오늘은 일찍 일어났다. 왜냐하면 엄마가 깨웠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빠가 왕관 앵무새를 봤기 때문이다. (본 왕관 앵무새 그림은 아래에 있습니다.) 호주엔 동물이 많다. 특히 새가 많다. 내가 지금까지 본 동물을 알려주겠다.
1. 쓰새*
2. 파랑 도마뱀*
3. 왕관 앵무새*
4. 캥거루
5. 핑크 앵무새*
6. 무지개 앵무새*
7. 팰리컨
8. 벌새
9. 뿔 비둘기*
*1. 호주 흰 따오기 (Ibis), 2. (아마도) 워터 드래곤*홍이은의 주장:줄 장지 도마뱀 홍이은 천재! (Water Dragon), 3. 유황앵무 (Sulphur-crested Cockatoo, 줄여서 Cockatoo), 5. 갈라 앵무새 (Galah Cockatoo), 6. 오색앵무 (Rainbow Lorikeet) 9. 볏비둘기 (Crested Pigeon)
⛳︎ 오늘의 일정
숙소 → 탬보린 마운틴 일대 (갤러리 워크 → 포티튜드 브루어리 → 커티스 워킹 트랙 → 커티스 폭포) → IGA 마트 → 숙소
◇ 탬보린(Tamborine)
퀸즐랜드에 간다면 반드시 들려야 하는 여행지. 커다란 국립공원 안에 폭포, 동굴, 숲 등의 잘 보존된 자연경관들은 물론, 와이너리나 브루어리, 스카이워크 등 즐길 거리도 다양하고 갤러리 워크에는 아기자기한 소품샵들이 즐비하여 기념품 쇼핑도 즐길 수 있다. 워낙 규모가 커서 원데이 투어도 많이 마련되어 있으니 이용해 보는 것도 좋겠다.
◇ 포티튜드 브루어리 (Fortitude Brewing Co.)
직접 제조하는 독특하고 완성도 높은 크래프트 비어들을 맛볼 수 있는 곳. 피자가 맛있기로 유명하고 맥주를 제조하는 거대한 양조 기계도 실제로 볼 수 있다. 수제 치즈 가게도 함께 있어 안주로 곁들일 수 있으니 맥주를 사랑한다면 꼭 한 번 들러볼 것.
◇ 커티스 워킹 트랙 (Curtis Walking Track)
열대우림을 따라 난 길을 따라 걸으면 커티스 폭포까지 갈 수 있는 트랙. 울창한 야자수와 유칼립투스 숲을 지나 작은 폭포가 나타나는데, 과거 이곳에 수륜을 건설했던 커티스 형제의 이름을 땄다고 한다. 트랙 난도가 높지 않고 비교적 짧은 편이라 가볍게 다녀오기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