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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니 Sep 14. 2024

뭘 그렇게 놀래

Day. 8

2024년 8월 11일 일요일


홍박사✐


여행 중에 일요일은 일요일이 아니다. 지체할 틈 없이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오늘은 호타 갤러리 근처에서 열리는 호타마켓에 간다. 호타(HOTA)는 Home of The Arts의 약자로 골드코스트의 현대미술관 같은 곳이고 호타마켓은 매주 일요일 오전에 지역의 먹거리와 식료품을 파는 작은 시장이다. 갤러리와 먹거리 장터의 만남이라니.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현대미술이 어렵고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장터를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 배려가 아닌가 싶었다.


일요일엔 호타로 가요


우버를 타고 도착한 그곳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와있어 말 그대로 시장통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 같은 관광객으로 보이는 이들 뿐만 아니라 이곳 주민들로 보이는 편한 복장의 현지인이 많았다. 이민자의 나라답게 줄줄이 이어진 트럭에서 세계 각국의 먹을거리를 팔고 있었고 친구와 가족끼리 삼삼오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주일 간 쌓였던 근황을 마음껏 털어내는 듯한 사람들의 표정이 한껏 편안해 보였다.


우리도 몇 가지 음식을 받아 들고 바로 앞에 있는 에반데일 호수(Evandale lake) 모래톱에 셋이 나란히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따뜻한 햇볕이 감싸는 호수와 수변을 따라 이어진 멋진 별장들이 만든 세상 평화로운 풍경이 먼 나라를 여행 중이라는 실감을 하게 했다. 호수는 퍽 아담한 규모에 물이 깨끗해 보였다. 여름에는 이곳에서 수영도 많이 한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가을 날씨임에도 몇몇 아이들은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심지어 두세 살 된 아이들은 옷을 모두 벗고 물속에 들어가 갈매기를 쫓으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건강히 자라나는 아이들


호주에 와서 놀랐던 것 중 하나는 부모들이 아이들을 정말 ‘내놓고’ 키운다는 점이다. 동네 공원이나 놀이터에 가면 맨발로 걸어 다니거나 놀이터 바닥에 뒹구는 갓난쟁이를 쉽게 볼 수 있다. 이은이를 키웠던 지난날을(아니 지금도) 떠올려보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더러운 것, 위험한 것, 냄새나는 것들이 아이 몸에 닿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즉시 차단해 (=지지!)아이를 가장 안전하게 보호하겠다는 의지로 가득했었다.


양반다리는 못 참지


내 자식 귀한 거야 세계 만국 부모의 공통 마음이겠지만 이곳의 엄마 아빠들의 아이를 대하는 방식을 보며 지금껏 지나친 걱정을 해오지 않았나 싶었다. 물론 각 나라의 문화와 환경에 따른 차이에서 오는 다름이 있고, 우열을 가릴 문제는 아니다. 다만 더 많이 겪어보고, 아프기도 하며, 그것을 이겨내는 과정이 아이를 더 건강하고 덜 예민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더불어 내 주위와 한 덩어리가 되는 경험을 통해 환경에 대한, 세상에 대한 생각도 더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 와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가 ‘No worries!’ 다. 걱정을 달고 살며 걱정이 점점 많아지는 세상이지만 때로는 눈을 감고, 귀를 닫을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비단 아이를 키우는 문제뿐 아니라 남은 내 인생에서도 말이다.





김 군✐



이른 아침부터 홍박사가 잠을 깨워댔다. 오늘 가기로 한 HOTA 갤러리 앞 호수 주변에서 일요일 아침에만 열리는 선데이 마켓이 있는데, 철수하기 전에 늦지 않게 가야 한단다. 간밤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잠을 잘 이루지 못한지라 비몽사몽 준비를 마쳤다. 아이까지 씻기고 옷을 입혀 우버를 잡아탈 때만 해도 거의 반수면 상태였다.

과거 늪지대를 이렇게 개발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켓에 도착하자 그 수많은 인파와 다양한 상점들이 뿜어내는 에너지에 벼락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싱싱한 농작물들부터 커피, 주스, 버거, 올리브, 햄, 타코, 아이스크림 등등 오만가지  총 천연색 먹거리들이 ‘한 입만 잡솨봐’라며 온몸으로 행인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 극악무도한 자태에 정신이 잠시 혼미해질 뻔했으나 곧 다시 이성을 되찾은 나는 섣불리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리라 단단히 각오하고 마켓 안으로 입성했다. 줄줄이 늘어선 가지각색 상점들을 따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아침 햇살을 받아 푸르게 빛나는 호수와 그 근처 잔디밭에 자유롭게 앉아 마켓의 먹을거리들을 즐기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도 늦을세라 부랴부랴 호숫가 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펼치고 각자 먹고 싶은 버거와 커다란 라떼 한 잔, 입가심을 위한 패션프루트 주스를 사 왔다.


앙-


현지인의 선데이 바이브를 흉내 내며 한가로이 버거를 베어무는 동안 근처에서 누군가는 통기타를 치며 버스킹을 했고 아이들은 호수에 발과 손을 담그며 망아지처럼 뛰어놀았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노는 광경을 다정히 지켜보고 연인들은 서로의 눈을 꿈꾸듯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 모여있는 모두가 뭔가를 맛있게 먹거나 마시고 있었고, 모두가 환히 웃고 있었으며, 모두가 그늘 한 점 없어 보였다. 이곳에 그저 가만히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심중에 드리웠던 구름이 모조리 걷히는 기분이 드는데, 하물며 일요일 아침마다 이곳에 올 수 있다면 일과 삶의 슬픔으로 가득 찬 평일들도 그럭저럭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수고로웠던 시간들에 대한 보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HOTA의 선데이 마켓은 찬란한 천국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뭐하고 있늬


그렇게 여유로웠던 아침나절이 지나가고 날이 갑자기 궂어지더니 가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에 놀라 주변을 둘러보니 그 많던 상점들이 빠르게 철수되고 있었고 호숫가를 가득 메우던 인파들도 이미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져 텅 비어 있었다. 우리도 비를 피해 후다닥 HOTA 갤러리로 뛰어 들어갔다. 어안이 벙벙했다. 한바탕 달콤한 꿈을 꾼 것 같기도 했다.


파워 N답게 HOTA 마켓을 통째로 우리 동네로 옮길 수만 있다면 나 평일에 되게 열심히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시장님께 건의라도 해 볼까,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다가 이내 피식대며 그만뒀다. 그 대신 돌아가면 대단한 보상이나 천국까진 안되더라도 일상에 확실하고 작은 도피처를 만들고 싶어졌다. 시간 탓, 나이 탓, 체력 탓 하면서 직장과 집 이외에 아무것도 들이지 않았던 그동안의 생활반경에 잠이나 유튜브 같은 누더기 임시천막은 싹 다 걷어내고 좀 더 딴딴하고 정교하게 아지트를 지어보겠다는 아주 작고 귀여운 포부가 생겼달까..! 이것저것 안 해본 일들도 과감히 시도해 보면서 나만의 선데이 마켓을 찾아봐야겠다는 평소답지 않은 생각을 해 봤다. (돌아가서도 이 포부가 유지되어야 할 텐데. 과연..?)


우다다다


비록 오늘 저녁 식사는 좀 화가 날 정도로 대실패였지만 (매우 비싸고 맛은 별로인 일식 체인점이었다. 여행 중에는 꼭 이렇게 한 번씩 대실패하는 끼니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아침이 대성공이었으므로 오늘 하루도 좋았던 날로 남기는 것으로  한다. 한여름에는 호수에서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던데, 한국으로 돌아가 현생과 아지트를 오가며 열심히 살다가 그 풍경을 보러 언젠가의 일요일 아침에 다시 이곳을 찾고 싶다. 부디 그때쯤엔 내 삶의 풍경도 이 호숫가처럼 찬란하기를.





이은✐


Q. 호주에서 본 생물은?


1. 캥거루

2. 히스

3. 파랑도마뱀

4. 쓰새

5.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고기

6. 고둥

7. 소라게

8. 쓰새*

9. 무지개 앵무새

10. 핑크 앵무새

11. 왕관 앵무새

12. 따개비

13. 소

14. 개

15. 바다 달팽이

16. 벌새

17. 노랑 무당벌레

18. 갈색 도마뱀


The End


*그 만큼 많이 봤다는 뜻으로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극사실주의 화풍



⛳︎ 오늘의 일

숙소 → 호타 마켓 (HOTA Market) → 호타 갤러리 (HOTA Gallary) → 퍼시픽페어 쇼핑센터 (Pacific Fair Shopping Centre) → 하라주쿠 교자 (Harazuku Gyoza) → 숙

◇ 호타 마켓 (HOTA Market
)

정확한 명칭은 HOTA Farmer’s Market. 매주 일요일 오전 6시부터 11시반까지 열리는 선데이 마켓이다. 생산자들이 직접 공수하는 물건들이 대부분이라 그 신선함이 마트의 물건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먹거리와 즐길거리들도 다양하여 현지인들과 관광객들로 늘 인산인해를 이룬다. 파장할 때쯤엔 마감세일도 한다고 하니 놓치지 말자!

◇ 호타 갤러리 (HOTA Gallary)

1986년에 문을 연 종합예술단지 HOTA 내에 2021년에 설립된 미술 갤러리로, 6층 규모에 3,200만 호주 달러에 달하는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굿즈샵과 어린이들을 위한 전시장이 1층에 위치해 있고, 윗층부터는 시기 별로 테마에 맞는 작품들이 전시된다. 제일 꼭대기층에는 카페와 무료 전망대가 있어서 근처 풍경을 한 눈에 담아볼 수 있다.

◇ 퍼시픽페어 쇼핑센터 (Pacific Fair Shopping Centre)

골드코스트 최대 규모의 쇼핑센터. 우리나라의 스*필드와 비슷한 복합쇼핑몰이다. 호주 로컬 브랜드부터 유명한 글로벌 브랜드들까지 다양한 상점들이 입점해 있어 기념품을 쇼핑하기에 좋다. 다만 5시면 대부분의 가게들이 문을 닫으므로 이른 시간대에 방문하는 것을 추천.

◇ 하라주쿠 교자 (Harazuku Gyoza)

웬만하면 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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