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9
2024년 8월 12일 월요일
김 군✐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에 잠이 깼다. 창 밖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금방 내리고 그칠 비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필 브리즈번으로 돌아가는 날. 우리는 비바람을 맞아가며 트램과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한 손에는 아이 손을, 한 손에는 캐리어 손잡이를 잡고 찾아간 새로운 숙소에서는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체크인이 되지 않았던 것. 내가 한국을 떠나오기 전에 숙소 예약 플랫폼에서 뭔가를 미리 작성해야 했는데 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체크인을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30여 분의 시간이 어찌나 가시방석이었는지. 어찌 저찌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체크인을 하고 첫 번째 끼니를 해결하러 나섰다.
급하게 다른 숙소를 알아봐야 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잘 되었다는 안도감, 종일 비와 바람 속을 걷다가 숙소에 당도하자 훅 끼쳐 온 온기, 그나마 익숙한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편안한 기분에 오전 내내 뒷목을 움켜쥐던 긴장이 풀리며 갑자기 허기가 쓰나미처럼 온몸을 덮쳐왔다. 전쟁통 중의 식사처럼 커다란 샌드위치를 허겁지겁 해치우기 시작했다. 한 입 가득 크게 베어 문 조각들은 혀를 거치지 않고 대충 씹어 뭉개 삼켜졌다. 맛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뱃속에서 울부짖는 어떤 녀석을 빨리 달래는 게 중요했다. 그게 문제였을까. 먹은 것이 제대로 내려가지 않고 명치에 턱 하니 얹힌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춥고 흐린 날씨를 피해 근처에 있는 퀸즐랜드 뮤지엄을 찾았다. 호주에 서식하는 다양한 생물종들을 총망라해 놓아 절로 경외심이 드는 전시였다. 먼 옛날 하나였던 대륙들이 나뉠 때 가장 먼저 떨어져 나와서, 진화적 관점에서도 생물학적 관점에서도 흥미로운 동식물들이 가장 많이 서식하고 있는 곳인 만큼 그 전시의 규모와 디테일이 어마어마했고, 평소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은 아홉 살 아이가 예상대로 엄청난 흥미를 보였다. 책에서만 보던 생물들이 실제로 눈앞에 모습을 나타내자 그는 대흥분한 상태로 전시장 이곳저곳을 쉬지 않고 누비고 다녔다. 문제는 나였다. 체한 느낌이 점점 더 묵직해지고 있었다. 어지러웠고 시야가 좁아졌다. 그 수많은 곤충, 물고기, 동식물들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오늘을 날려 보낼 수는 없다. 뮤지엄 바로 옆에 위치한 퀸즐랜드 주립 도서관도 둘러보았다. 우리 가족은 주말마다 도처의 도서관을 찾곤 하는데 그동안 경험해 본 도서관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게 근사하고 아름다운 도서관이었다. 대규모의 장서들이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고 그 속에 자연스레 파묻힌 사람들이 뭔가를 읽고 쓰며 자신만의 세상을 쌓아 올리고 스스로와 깊이 대화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도서관 한 편의 전시장에서는 브리즈번에서 활동하는 화가들이 ‘자화상(portrait)’이라는 주제로 그린 작품들도 감상할 수 있었다. 새삼 ‘도서관’과 ‘자화상’이라는 키워드가 서로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기만 없었어도 나도 그 어딘가에 자리 잡고 앉아 활자와 자화상 사이를 거닐고 싶었다.
날이 어느덧 저물고 퇴근 후 귀가하는 사람들과 섞여 마트에서 저녁거리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이제 집에 갈 날도 나흘밖에 남지 않았는데 오늘 하루는 공친 건가 싶다가 문득 이런 흐린 날의 풍경 속을 걸어보고, 동네 도서관에 가 보고, 현지에서 나고 자란 것들을 현지의 화폐단위로 구입하고, 그리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하루를 지내보는 모든 경험이 불편하고 녹록지 않은 부분까지 겪어내는 ‘생활’ 그 자체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별안간 위안이 되었다. 언젠가 에어비앤비 광고의 카피였던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는 문장을 좋아하는데, 오늘의 여행이 바로 그 ‘살아보는 여행’처럼 느껴졌다. ‘오늘 나 자신 제법 호주인 같았어.’라는 생각까지 미치자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컨디션도 덩달아 좋아지는 것 같았다.
물론 해가 쨍하고 몸은 날아갈 듯 가볍고, 계획한 모든 일이 척척 해결된다면야 바랄 것이 있겠냐마는 남는 것도 없지 않을까. 우리의 이번 여행이 무탈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무의미하지 않길 바란다. 남은 시간, 우리는 또 어떤 날을 살아보고 어떤 의미를 찾고 만들어낼 수 있을까. 오늘보다 더 유의미할 내일을 위해 일단은 이쯤 하고 자야겠다.
홍박사✐
오늘은 골드코스트에서의 나흘 일정을 마치고 다시 브리즈번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새벽에 러닝을 하다 갑자기 비가 쏟아졌는데 옷과 러닝화가 흠뻑 젖어버렸다. 안경 렌즈에 빗방울이 가득해져 시야를 가렸지만 오히려 눈앞 풍경은 더 트여 보였고 역시나 몸을 움직였더니 기분이 더없이 상쾌해졌다. 우중 뜀박질이라니.. 한국에서라면 시도조차 하지 않을 일을 여행에서는 기꺼이 해보게 된다. 안타깝게도 앞으로 3,4일간 연속으로 비 예보가 있었다. 이 소중한 시기에 날씨가 어떻게 이러나 싶었지만 비도 여행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굿바이 골드코스트!
골드코스트에서 브리즈번으로 가기 위해서는 트램 종착역(헬렌스베일역)까지 가서 에어트레인으로 환승해 1시간 정도를 더 가야 한다. 비가 오는 와중에 커다란 캐리어 2개를 끌고 가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지만 마치 다시 여행이 새롭게 시작되는 느낌이 들어 나쁘지만은 않았다.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올 무렵엔 비가 더 가열하게 쏟아져서 마치 우리를 구하러 온 노아의 방주라도 된 것처럼 반가웠다.
열차에서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하다가 우리는 각자 가져온 책을 읽기로 했다. 김 군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은이는 데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나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 비 오는 날, 처음 타보는 호주의 기차 안에서 각자 책을 읽고 있으니,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낭만 있게 느껴졌다. 어둑한 하늘과 비로 인해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모든 것들이 우중충해 보였지만 기차 안은 우리만의 따뜻한 공기로 가득 메워지는 듯했다. 이렇게 별 것 아닌 순간에 감정은 몽글몽글 부풀어 오르고 여행의 시간은 비로소 충만해진다. 1시간 남짓한 이 시간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만 같다. 고개를 슬쩍 돌려 아이의 표정을 보니 이야기에 흠뻑 빠져든 것처럼 보였다. 아이의 기억에도 이 시간이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았으면 좋겠다.
남은 브리즈번의 일정은 사우스뱅크 지역에 머물기로 했다. 사우스뱅크는 브리즈번의 도서관, 미술관, 박물관 등이 모여있는 지역으로 남은 일정을 차분히 보낼 수 있는 곳처럼 느껴졌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박물관을 둘러보고(호주 동. 식물에 대한 전시가 있어 아이가 환호했다) 퀸즐랜드 주립 도서관에 가서 남은 하루를 보냈다.
평소에 주말마다 셋이 함께 새로운 도서관을 탐방하는 일이 우리의 취미이자 루틴이라 이곳에서도 여러 도서관은 꼭 가보기로 일정에 넣었었다. 언젠가 다양한 도서관을 방문한 경험기를 책으로 엮어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있는데 목차에 외국의 도서관도 쓰윽 넣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야호!) 우리는 각자 원하는 자리를 잡아 각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관광하듯 도서관을 구경의 대상으로만 두지 않고 공간에서 충분히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낯섦 가득했던 공기가 어느새 편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나란히 책을 읽었던 브리즈번행 기차가 뒤이어 도서관이란 역에 도착했다는 상상을 했다. 수만 가지의 책들이 잠자고 있다가 우리가 역에 도착하자마자 깨어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손짓하는 장면. 역장 역할을 하는 사서는 우리에게 충분히 시간을 보내도 좋다고 손짓한다. 기차는 앞으로 이곳을 떠나 어디로 향하게 될까. 정시 출발 정시 도착을 하지 않아도 좋으니 계속 달려갔으면 한다. 칙칙폭폭 땡-
홍이은✐
오늘은 로빈슨 크루소를 알려주겠다. (아빠 크루소*) Let’s Go!
1. 등장인물
로빈슨, 염소, 폴(앵무새), 프라이데이, 프라이데이 아빠, 선장님 , 선원
2. 식량
양고기, 치즈, 비스킷, 포도, 코코넛, 오렌지, 라임, 우유
3. 도구
냄비, 그릇, 짚, 오두막, 금, 은, 총, 각종 옷 등
4. 장소
외딴섬, 바다, 포로나라, 영국 마을
5. 식물
밀, 코코넛 나무, 잡초, 라임나무, 오렌지나무, 포도나무
6. 시간
35년 동안
7. 요리
거북이알, 채소, 양고기, 치즈, 빵, 건포도
8. 옷
양털로 된 옷
9. 내가 외딴섬에 간다면?
토마토 스파게티를 해 먹을 것이다
10. 느낀 점
무인도에서 생활하는 게 이렇게 쉬울 줄 몰랐다. 그리고 무인도로 가는 방법으로 비행기가 추락해서 무인도에 가는 것뿐만 아니라 배로 무인도에 갈 수도 있었다. 무인도에 생물이 많다는 점을 알았다. 그리고 무인도에 야만인이 사는지 몰랐다.
아빠 크루소* : 턱수염이 무성한 아빠와 닮았다는 의미
⛳︎ 오늘의 일정
숙소 → 헬렌스베일역 (Helensvale Station) → 사우스뱅크역 (Southbank Station) → 새로운 숙소 → 페퍼 잭 샌드위치 (Pepper Jack Sandwiches) → 퀸즐랜드 박물관 (Queensland Museum) → 퀸즐랜드 주립도서관 (State Library of Queensland)→ 울스워스(마트) → 숙소
◇ 페퍼 잭 샌드위치 (Pepper Jack Sandwiches)
여태 체인점인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브리즈번에 딱 하나 있는 곳이라서 매우 놀라운 샌드위치 전문점. 커다란 바게트 빵을 베이스로, 다양한 종류의 샌드위치를 주문할 수 있다. 사이드 메뉴와 키즈 메뉴, 비건을 위한 메뉴 등도 잘 갖추어져 있다. 가볍고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고 싶을 때 찾으면 딱 좋겠다.
◇ 퀸즐랜드 박물관 (Queensland Museum)
이 지역에 살았던 공룡들부터 발발했던 크고 작은 전쟁들에 대한 자료들, 지금까지 살고 있는 각종 야생 동식물들까지 퀸즐랜드의 길고 긴 역사를 한 번에 톺아볼 수 있는 박물관. 거의 대부분의 전시가 무료로 진행되고 있어 부담 없이 들러보기 좋다. 과학센터에서는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도 열리고 있다고 하니 관심이 있다면 미리 알아보고 찾아가자!
◇ 퀸즐랜드 주립도서관 (State Library of Queensland)
무려 1896년에 개관되어 아직까지도 호주에서 중요한 도서관 중 하나로 꼽힌다는 퀸즐랜드 주립도서관은 크고 깔끔한 내부와 방대한 서적으로 현지인들에게도 매우 사랑받는 도서관이다. 굿즈샵과 카페, 키즈 코너도 마련되어 있다. 도서관의 위치 덕분에 브리즈번 강변을 내려다보면서 독서를 즐길 수 있고 도보 5분 거리에 박물관, 미술관 등이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