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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니 Sep 29. 2024

또렷이 남겨진 기억

Day. 10

2024년 8월 13일 화요일



김 군✐


애석하게도 브리즈번에는 하루종일 비가 왔다. 호주 사람들은 장대비가 아닌 이상 대부분 그냥 비를 맞고 다닌다. 그래서 우리도 우산 없이 길을 나섰다. 부슬부슬 내리는 이슬비를 맞으며 아침을 먹으러 숙소 앞 카페에 들렀다. 주문을 하고 앉아있는데 익숙한 인상의 동양인 종업원이 살며시 다가오더니 암호처럼 “한국분이세요?”라고 인사를 건네왔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들려온 한국어가 어찌나 반갑던지. 순간 긴장이 풀려 활짝 웃으며 그렇다고 하자 원래 1개만 나오는 브라우니 서비스를 (아마도 사장님 몰래) 3개나 챙겨주셨다. 고맙기도 해라. 타지에 살다가 동향인을 만난 기쁨이 작고 까만 브라우니 세 조각 안에 꽉꽉 압축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 진한 달콤함을 최대한 오랫동안 아껴먹었다.

제임스 스트리트의 멋진 샵들

아침을 느긋하게 다 먹고도 비는 그칠 줄 몰랐다. 궂은 날씨를 피해 퀸즐랜드 주립 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을 먹기로 했다. 모던한 건물 안에 근사한 작품들이 잔뜩 전시되어 있었지만, 어제부터 발동이 걸린 두통이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아 도통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급한 대로 미술관 카페로 가서 커다란 머그잔 가득 커피를 들이부었음에도 헤롱 헤롱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홍박사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식당 가서 짬뽕 먹기”. 미술관을 빠져나와 골목 안쪽에 위치한 근처 한식당을 찾아갔다.


미술관은 그림을 그리는 곳이라 주장하는 어린이


별말 없이 자리를 잡고 앉기만 했을 뿐인데 사장님은 대뜸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해 오셨다. 우리에게서 한국인 특유의 바이브가 느껴졌던 것일까. 그는 조금 신난 말투로 이것저것 메뉴 추천에 가볼 만한 관광지 추천까지 덤으로 해 주셨다. 추천대로 주문을 마치자 곧 매운 떡강정과 비빔밥, 그리고 짬뽕이 테이블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들은 뭐랄까. 여행으로 지칠 대로 지친 영혼의 배를 살살 어루만지는 외할머니의 약손 같은 맛이었다. 떡강정은 한국에서 지코바 치킨을 시키면 양념치킨 중간중간 들어가 먹는 재미를 더 하는 바로 그 떡의 맛을 떠올리게 했고, 비빔밥은 호주에서 공수한 재료로 구성되어서 맛이 한국과 비슷한듯하면서도 달라 신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짬뽕의 빨갛고 얼큰한 국물은 성분이 궁금할 정도로 두통에 직빵으로 그 효능을 발휘했다. 신기하게도 짬뽕 그릇이 비워지는 양에 비례하여 머리를 조여 오는 통증도 사라졌다. 


침 나오쥬?
그럴거에유


릇을 깨끗이 비워갈 때쯤 사장님은 간만의 한국인들과의 대화가 그리우셨는지 호주에서의 이민 생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려주셨다. 본인이 언제, 왜,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그동안 어떤 기쁨과 어떤 부침이 있었는지에 관한, 이방인의 삶을 살아본 사람들만이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 길고 긴 이야기의 반은 이해했지만 반은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브리즈번에서는 부모가 석사 학위 과정을 이수하면 자녀 교육이 공짜라는 대목에서 홍박사와 나의 눈빛은 순간 반짝 빛났다..!) 갈 길이 여즉 먼 탓에 아쉽지만 그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또다시 길을 나섰다.


아웃도어 용품점은 등반을 하는 곳이라 주장하는 어린이


비 오는 거리를 정처 없이 헤매고 다니다 보니 어느덧 또다시 다가온 저녁 먹을 시간. (끼니때는 도대체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는가.) 피자 피자 노래를 부르는 아이를 위해 근처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찾았다. 이번에는 대문자 E이신듯한 사장님께서 우리를 일본인으로 보셨는지 자꾸 알 수 없는 일본어를 구사하셨다. 그의 일본어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잠깐 마가 뜨는 타이밍에 “Actually, We’re from South Korea.”라고 고백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고향 사람을 만난 표정을 하시더니 “안녕하세요! 고마워요! 괜찮아요! 말랑말랑~” 하며 폭풍 한국어를 뱉어내셨다. 유창한 발음에 깜짝 놀라 어디서 한국어를 배웠냐고 묻자 여자친구가 한국사람이란다. 아침과 점심에 이어 우리가 브리즈번에 와 있는 한국인임이 또다시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남은 날을 헤아려보다가 이대로 잠들 순 없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라이브 공연 중인 Bar를 찾아갔다. 비는 어느덧 그쳤고 피아노 소리와 노랫소리가 저녁 대로변까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쿵쿵대는 리듬에 맞춰 콩닥대는 마음을 안고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피아노 앞쪽 자리가 비어 있어 냉큼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보아하니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시는 오늘의 연주자께 QR코드로 신청곡을 보내서 연주를 듣는 시스템이었다.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듣고 싶은 노래를 신청했고, 연주자께서는 신청곡들을 열정적인 연주와 노래로 들려주었다. 누군가는 목청껏 따라 불렀고, 누군가는 일어나 춤을 추었고, 누군가는 술을 마시며 분위기를 만끽했다. 우리가 신청한 노래도 제법 많이 채택이 되었는데, 재미있었던 점은 신청한 대부분의 노래들이 ‘한국인이 사랑하는 팝송 100선’에 들어가 있을 법한 곡들이었다는 것이다. (비틀스, 빌리 조엘, 스티비 원더, 엘튼 존, 마이클 잭슨, 아바, 스팅, 퀸 등등등 기라성 같았던 우리네 팝송 선생님들��) DNA에 새겨진 가사를 흥에 겨워 따라 부르다가 도 ‘아, 난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가 보다’라는 생각에 괜스레 알 수 없는  심통이 나기도 했고 또 조금은 웃기기도 했다.


한국에 살 때는 내가 한국인임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살지만 외국에 나오면 갑자기 국적과 언어가 덜컥거리며 의식된다. 마치 호흡을 의식하지 않고 살다가 물에 들어가면 나에게 아가미가 없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듯이. 그리고는 이 많은 나라 중에 하필 한국에 태어나 그 많은 언어 중에 하필 한국어를 구사하게 된 팔자에 대해 곱씹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그것을 전공으로 삼고 밥을 벌어먹는 삶을 살고 있으니, 외국에서의 삶은 더더욱 요원한 것이 된 지 오래다. 그 흔한 어학연수조차 가본 적 없이 평생을 한국에서만 살아온 터라, 나에게 외국에서 산다는 건 막연히 이루지 못한 로망이자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꿈같은 것이었는데 오늘 곳곳에서 마주친 어떤 장면들은 ‘내가 만약 외국에 나가서 살았더라면…’으로 시작하는 상상들을 다시금 되살아나게 하는 것들이었다. 언젠가 그 상상은 현실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번 여행이 어떤 계기가 되어주지는 않을까.


자꾸만 가본 적 없는 길을 서성이게 되는 밤이 깊어간다.






홍박사✐


최근 한 두 달 사이에 김 군의 두통 문제로 술을 줄였는데 오늘 참았던 것이 터지고 말았다. 비를 맞으며 포티튜드 밸리에서 제임스 스트리트까지 꽤 긴 거리를 종일 돌아다녔더니 저녁이 되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지쳐버렸다. 근처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급히 찾고 한걸음에 달려가 저녁식사 겸해서 와인 한 병을 호기롭게 주문해 버렸다. 그래, 호주에 왔으면 쉬라즈 한 병은 마셔줘야지!(쉬라즈는 호주 와인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계기를 만들어준 품종으로 후추향과 같은 스모키 한 향이 특징이(란)다)


검붉은 유혹이 찰랑인다


이은이는 엄마 아빠의 지친 기색을 눈치챘는지 한 손엔 피자, 다른 손에는 ‘빨간 머리 앤’ 책을 들고 조용히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주었다. 이런 순간, 아이의 침묵은 정말 금이 된다. 피자는 거들뿐 우리는 와인 한 모금 한 모금에 집중하며 이러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와인 맛이 정말 좋았다!) 여행에 대한 감상, 현실 속 삶, 미래에 대한 생각들.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이야기를 서로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이야기에 꽤 집중했던 것 같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창밖 풍경이 마치 현실 속 삶의 피로와 고단함을 보여준다면 따뜻한 조명과 좋은 음식과 술은 여행이 주는 잠시나마의 도피처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우리만이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암호 부호 같은 이야기들까지. 영원할 수 없어서 더욱 간절하고 소중한 순간이었다.


헤롱헤롱한 어른과 똘망똘망한 어린이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이대로 숙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극적 결론을 내리고(취했다..) 기분을 한층 더 띄워줄 수 있는 음악 가득한 공간을 찾았다. 해외의 낯선 도시에 가면 라이브로 연주하는 곳을 반드시 찾는 편인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가족 모두 음악을 애정하기도 하고, 그 도시의 밤 문화와 사람들을 바로 눈앞에서 경험할 수 있어 여행하는 기분이 충만해진다. 바의 이름은 두밥바(Do-Bab Bar). 재즈 한 가닥으로부터 지었을 이름을 두고 전 세계에 얼마나 많은 두밥바가 있을까 상상을 해보니 웃음이 나왔다. 비바람을 뚫고 도착한 그곳에 초로의 남성이 사연을 받고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며 일당백 역할을 하고 있었다. 테이블에 있는 큐알을 스캔해 웹 페이지에 신청곡을 쓰면 바로 불러주는 구조였는데 우리는 신이 나서 좋아하는 서로 경쟁하듯 음악을 적어냈다. 여러 관객의 신청곡을 소화하느라 모든 노래를 본인만의 방식으로 편곡해 다소 빠른 템포로 불렀는데 흥을 돋우기에는 그 편도 괜찮았다.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자 관객 몇몇은 나와서 자유로이 춤까지 추었다.


Just the way you are~~~


와인에 칵테일까지 들이켰더니 이제 취기가 제대로 올라왔다. 오늘로써 호주 여행 10일 차가 된다. 그간의 방심과 즐거움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던 긴장과 불안을 음악과 함께 날려버리는 유쾌한 시간이었고 가족과 함께 즐기기에도 잘한 선택이었다.(홍이은도 어깨를 들썩들썩) 가는 비까지 뿌리는 궂은 날씨에 컨디션까지 조금 다운된 하루였지만 인생에는 언제나 반전이 기다린다는 듯 늦은 밤이 되자 가장 농밀한 즐거움이 우리를 감싸주었다.


숙소로 돌아와 오늘의 기록을 남기는 이 시간에 취기는 여전히 남아 키보드를 치며 무슨 글인지 모를 글을 쓰고 있지만 아무래도 좋다. 우리의 대화, 와인의 맛, 편안한 음악만은 또렷이 남겨질 테니까.






홍이은✐


숙소에 오자마자 씻고 뻗어버려 딱 하루만 일기를 쉬어갑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오늘의 일정

숙소 → 포티튜드 밸리 (Fortitude Valley) → 전스 키친 (Jeon’s Kitchen) → 제임스 스트리트 (Jame’s Street) → 이탈리아 레인 (Italia Lane) → 두밥바(Doo-Bop Bar) → 숙소


◇ 포티튜드 밸리 (Fortitude Valley)

유럽인들이 브리즈번에 정착할 때 바로 이곳이 중심지였다고 한다. 유서 깊은 번화 가인만큼 다양한 상점들이 길을 따라 즐비하고 거리 한쪽에 차이나타운도 조성되어 있다. 토요일마다 마켓이 열리고 (우리는 가보지 못했다.) 밤이 되면 더 화려해진다고 하니 (밤에도 가보지 못했다.) 일정이 허락한다면 맞춰서 들러보시길!

◇ 전스 키친 (Jeon’s Kitchen)

포티튜드 밸리 골목길 안쪽에 위치한 한식당. 한국인 사장님이 직접 운영 중이다. 짬뽕, 비빔밥, 보쌈, 치킨 등 한식 메뉴들부터 맥주, 소주 등의 한국 주류까지 모두 구비되어 있다. 여행하다가 혈중 빨간 맛 농도가 떨어졌을 때 들러서 충전하면 좋다.

◇ 제임스 스트리트 (Jame’s Street) -강력추천

한국의 가로수길을 떠올리게 하는 곳. 쭉 뻗은 길을 따라 편집샵, 명품 매장, 유기농 마켓, 레스토랑, 카페 등 고급진 분위기의 점포들이 한데 모여있다. 가게 구경도 재미있고, 거리를 오가는 호주 멋쟁이들의 패션 구경도 재미있다. 지금 브리즈번에서 가장 핫한 곳이라고 하니 반드시 찾아가 볼 것.


◇ 이탈리아 레인 (Italia Lane)

포티튜드 밸리에 위치한 피자와 파스타를 메인으로 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음식 맛이 훌륭하고 서비스도 친절하며 분위기도 매우 근사하다. 추천받아 마신 쉬라즈 와인이 특히 훌륭했다. 어쩐지 기분을 내고 싶은 저녁이라면 가 보는 것을 추천.


◇ 두밥바(Doo-Bop Bar)

매일 저녁 7시부터 11시까지 라이브 공연이 펼쳐지는 바. (일요일, 월요일은 휴무) 간단한 술과 함께 근사한 무대를 즐길 수 있다. 땅콩, 감자튀김, 버거 등의 간단한 안주도 마련되어 있다. 공연 라인업을 미리 확인해 보고 원하는 시간에 맞춰 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인스타그램에 공연 정보가 업데이트되고 있다. @doobopb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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