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자리 잡았나 싶었는데, 어젯밤부터 기온이 내려간다. 저녁 산책을 위해 다시 패딩 점퍼와 목도리를 꺼내어 주섬주섬 입고 나선다. 걸으며 느끼는 건 '낮보다 바람이 차구나.' 하는 것이다. 남편은 야간 근무를 들어갔기에 혼자 천천히 걸어본다. 사흘 전만 해도 밋밋하던 아파트 단지 안의 벚꽃나무가 어느새 활짝 만개했다. 자연은 정말 자연이고, 신기하다. 한 시간하고 십여 분을 더 걷고 집으로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식탁에 앉아 책을 읽으려고 펼쳤더니 이내 눈이 감기기 시작한다. 이제 열 시를 조금 넘겼는데...... 독서가 간절해서 자리 잡고 앉아도 때로는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커튼의 가느다란 틈사이로 밝음이 느껴진다. '지금 몇 시일까.' 휴일에도 습관적으로 옆에 두고 자는 알람 시계를 보니 다섯 시 오십팔 분이다. 여덟 시간가량 푹 잔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휴일이라고 늦게까지 누워 있으면 몸이 더 피곤하다. 그래서 아쉬운 듯해도 휴일에도 평일과 비슷한 시간에 기상하려고 한다. 아침에 퇴근해서 올 남편의 식사, 아침과 점심 사이 언젠가쯤 일어날 아들의 식사를 준비한다. 이렇게 준비해 놓고서 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을 계획이다. 두어 시간쯤 책을 읽고 나면 예약해 두었던 미용실을 다녀올 것이다. 그러고 나서 집으로 오면 아마도 오후 두 시쯤 되지 않을까.
"과장님, 이제 곧 아들도 군대 가고, 오늘처럼 남편분 야간 근무 들어가시면 시간 진짜 여유롭겠는데요?"
"지금도 여유 많아요. 아들 밴드 연습한다고 점심때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고, 남편 야간 근무 들어간 날에 퇴근해서 집에 혼자 있으면 절간이 따로 없어요. 그런 날에는 저녁 식사도 간단하게 과일하고 삶은 계란으로 끝내고, 책도 읽고 산책도 하고 그래요."
"뭐죠? 이 공허함이 느껴지는...... 공허하진 않으세요?"
"아휴~~ 전혀요. 그냥 좋아요. 남편 건강하고 성실하게 일해주고 있고, 아들도 몸과 마음 건강하게 잘 자라줘서 지금 제가 여유 있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가끔 혼자 책 읽다가도 식구들한테 고맙다는 생각이 많이 들죠."
"와~~ 부럽네요. 저는 언제쯤 그런 마음의 여유가 가능할까요. 하하."
"정대리 아들이 이제 여덟 살이니까 앞으로 십이 년만 기다리면 될걸요. 그동안 예쁘게 잘 키워 놓으세요. 그리고 남편 하고도 의리 잘 쌓아놓고요^^"
"네? 십이 년이요? 너무 아득한 시간이잖아요. 퇴근해서 집에 가면 또 다른 제 업무가 다 분장되어 있어요.^^ 그나저나 과장님, 참말로 부럽습니다."
며칠 전,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을 둔 직원과 퇴근 후 일상에 대하여 짧은 대화를 나눴다. 직원은 최근 한 달 동안 애가 아팠고, 본인도 아팠고, 출근했다가도 갑작스레 휴가도 두 번 냈고, 그 사이 예기치 못한 지각도 했던 탓에 조금 지친 상태여서 인지 나의 상황이 더욱 간절하게 보였던 듯하다. 그러면서도 "솔직히 말하면 조금 외롭기도 하죠?"하고 반의 하듯 묻기도 했다.
그날 정대리와의 대화는 딱 십 년 전, 나와 그때 함께 근무했던 선배와의 대화를 쏙 닮아있었다.
군 복무 중인 첫째 아들, 대학교에 입학한 둘째 아들, 성실하고 가정적인 남편, 무엇보다도 동글동글함이 느껴지는 두 아들과 남편의 심성과 엄마 아내를 향한 예쁜 언어들. 이제 막 3년에 걸친 승진시험을 마무리하고 또다시 회사에서는 영업실적에 고군분투하고 또 다른 직장처럼 느껴지는 집에서도 버거웠던 나에게 선배가 집에서 직장에서 누리는 환경은 내가 꼭 가지고 싶은 꿈처럼 다가왔다. 과연 나에게도 저런 때가 올까. 나도 저 상황을 가지고 싶다...... 하고 말이다.
시간이 흘러 선배는 재작년에 퇴직했고, 귀여운 손자를 얻은 할머니가 되었다. 나는 그때 선배의 나이가 되어 후배로부터 십 년 전의 내 모습을 보고 있다. 내 꿈을 이루었음에도 그걸 느끼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후배 정대리는 깨워주었다. 마치 "다 가졌잖아요.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듯.
짧은 길이지만 카페로 향하는 도로 양쪽 가로수에 피어오른 벚꽃이 봄의 시작을 알려주고 있는 오늘 아침이다. 마치 솜사탕처럼 몽실몽실한 느낌의 꽃뭉치가 너무 예쁘다. 잘 자라준 아들도, 건강하고 성실한 남편도 참 고맙고, 지금 감사함을 충분히 느끼려고 하는 나 자신도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