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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변 Oct 14. 2021

로스쿨 준비생의 스펙관리법

로스쿨 상담소: 나의 이야기③ 스펙이 뭐길래

| 스펙이 뭐길래


스펙이 도대체 뭘까. 세상이 하도 스펙, 스펙 해서인지, 우리 로펌에도 중·고등학생, 대학생은 물론, 해외에 계신 분들이나 다른 곳에서 일하고 있는 변호사들까지 다양한 인턴 문의가 들어온다. 로펌에서 일해 본 스펙이 필요하다거나, 특정 분야(지적재산권 분야라든가)의 업무를 경험한 스펙을 만들고 싶다는 이유가 주를 이룬다.


그렇다면 ‘좋은 스펙’은 도대체 뭘까. 해외 유학 경험, 높은 학점, 만점에 가까운 토익, 좋은 리트 점수 등등 흔히 떠올리는 많은 예들이 있겠지만, 변호사이자 누군가를 채용하는 입장이 된 지금 나의 관점에서 좋은 스펙이란 ‘매력있는 인생 스토리를 뒷받침하는 탄탄한 근거’가 아닐까 싶다.

스펙 쌓기의 어려움이란 ⓒmaarten Van Den Heuvel on Unsplash

| 그 시절 나의 스펙


민망하지만 그래도 구체적인 도움을 드리기 위해, 우선 그 시절(로스쿨을 준비하던 시절) 나의 스펙은 어떠했는지부터 살펴보자.


로스쿨에 지원할 무렵 ‘나’라는 사람은 대략 이런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의 나는 법조인이 되리라는 목표로 살아오지 않았었기에, 당연히 나의 스펙도 법조인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좋게 말하면 개성 있는 이력, 나쁘게 말하면 ‘얘는 왜 여기에 오려는 거지?’라는 의심이 들 만한 이력.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미 살아온 인생을 어쩌겠는가. 나는 내가 가진 아이템들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이 아이템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인생 스토리를 구상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러자 일단 두 가지가 분명해졌다.


① 나의 최대 약점은 ‘나이’다.

② 나는 내 생각보다 더 ‘도전적인’ 사람이다.

나이 미워! ⓒStillness Inmotion on Unsplash

| 나의 약점을 커버하려면


막상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려고 보면 근사한 스펙은 부족하고, 약점은 도드라져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부족한 가운데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 지나온 삶을 송두리째 변경할 수는 없지만, 발생한 일의 순서를 약간 조정하거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나는 기획자의 관점에서 내 인생의 스토리를 정리해 가기 시작했다. 특히 ‘나이’라는 핸디캡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로스쿨 지원 시 ‘나이’라는 핸디캡은 생각보다 더 치명적이다. 특히 합격 커트라인이 높은 로스쿨일수록 어린 지원자를 선호하기 마련인데, 그 이유는 대략 이렇다. 첫째, 어린 분들은 뛰어난 체력을 바탕으로 높은 학업성취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학교의 면학 분위기와 변시 합격률 등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가능성이 높다). 둘째, 어린 분들은 취업 시장에서도 선호된다(=학교의 취업률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확률이 높다).


결국 특별하지 않다면 어린 지원자에게 손이 가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스스로 답을 찾을 때까지 계속해서 자문했다.


‘나는 나이를 이만큼 먹을 동안 무엇을 했나?’

‘나는 정말 나이만 먹은 사람인가?’


그러자 어느 순간 반발심 같은 것이 생겼다. 나도 분명 그냥 나이만 먹은 건 아닌데. 나도 나름 열심히 살았는데. 나는 억울함을 호소하듯, 의심이 드는 바로 그 구간에 가장 촘촘한 스펙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나도 헛되이 나이만 먹은 게 아니라 그 시간들을 치열하고 의미 있게 축적했다는 항변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에 설득력이 있으려면 직장 경력 등을 통해 얻게 된 아이템들을 더 많이 발굴해서 배치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다시금 지나 온 PD로서의 시간들을 몇 번이고 돌이켜 보았다. 그러자 잊혔던 기억들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 저작권 연구회 활동: 당시 KBS에는 ‘자율 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직원들의 연구활동을 지원하는 사업이 있었다. 나는 이 사업에 지원해, 리더로서 ‘저작권 연구회’라는 팀명으로 작은 논문 형식의 보고서를 작성하여 직원 대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한 경험이 있었다.


□ 동료 PD의 저작권 분쟁: 낭독 프로그램을 연출하던 내 옆 자리의 선배 PD가 저작권 분쟁에 휘말려 고생하는 모습을 바로 옆 자리에서 생생하게 지켜본 경험이 있었다.


□ 토론 프로그램 연출 경력: 10년의 근무 기간 동안 다양한 프로그램을 해왔는데, 그중에는 토론 프로그램도 있었다. 이때 다루었던 주제에 한계가 없었기 때문에 어떤 방향성을 지닌 자기소개서를 만들더라도 이와 관련된 주제를 다룬 적이 있을 것이다.


□ 강도 높은 업무 환경: 동료 PD와 비교해서도, 혹은 다른 업종의 누구와 비교해서도, 업무에 투여하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었다. 업무 강도가 높은 환경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 다양한 협업 경험: 다양한 분야의 선후배 및 스태프들과 협업을 해 본 경험이 있기에, 인간관계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 싱가포르 ABU 콘퍼런스에서의 주제 토론: 싱가포르에서 열린 ABU 콘퍼런스에서 한국 방송사 대표로 주제 토론을 한 경험이 있었다. 주제는 '인터랙티브 미디어'였다.


| 매력적인 스토리, 근거로서의 스펙


별 거 아닌 일들도 고민의 시간을 거치면 어떤 스펙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의 스토리에도 색이 더해졌다. 또한 늘어나는 아이템에 따라 나의 이미지도 구체화되었다. 그렇게 다듬은 나의 스토리와 스펙은 대략 이러했다.


□ 총체적인 이미지: PD로서도 충분히 도전적인 삶을 살아왔지만(KBS PD, 강도 높은 업무 환경, 다양한 프로그램 기획·연출 경력 및 수상 경력, 해외 콘퍼런스 발표 경험 등), 이제 새로운 분야에의 도전을 꿈꾸는 진취적이면서도 책임감 있는 사람.


구체적인 인간형: 동료 PD 저작권 관련 분쟁 등을 통해 저작권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지원 배경, 동기),   깊이 있는 연구를 위해 본격적으로 법학 공부를 병행하고 저작권 연구회를 기획하여 보고서를 발표하는  적극적으로 관련 경험을 쌓았으며(학업에 대한 진정성, 가능성), 강도 높은 업무나 협업 등을 충분히 소화할  있는 체력과 유연성이 있고(책임감, 실력, 체력, 인성), 글로벌한 업무도 소화할  있는(외국어 능력) 사람.

나는야 도전적인 사람! ⓒTim Jones on Unsplash

이렇게 나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는 조금씩 초점을 잡아가고 구체성을 띄어 갔다. 이후에도 무수히 많은(아마도 한 100번쯤?) 수정의 과정을 거쳐(어린 시절, 실패와 극복의 경험 등이 추가되었던 것 같다), 나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는 제출 직전이 되어서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그리고 다행히 좋은 결과를 얻어 로스쿨에 진학했고(내 동기 120명 중 나보다 연장자는 단 1명이었다. 휴우~), 이제는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 스펙은 계획적으로 쌓아야만 할까


글을 마치기 전에 빼놓지 않고 이야기하고 싶은 게 남았다. 바로 스펙을 축적하는 방향성의 문제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① 미리 목표와 방향을 정해 놓고 그와 관련된 스펙을 쌓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② 자유롭고 풍성하게 일단 살고 난 후에 비로소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것이 나은지 하는 문제다.


①안의 장점은 명확하다. 미리 자기가 가야 할 방향과 인재상을 정한 후 관련된 스펙을 쌓기 때문에 방향성이 잘 잡혀있다는 것(선명성). 준비 기간이 짧고 시간이 부족하다면 이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기에, 많은 중고등학생 및 대학생들이 이 쪽을 택하는 듯하다. (그리고 이 방식이 대체로 안전하다)


그러나 나는 감히 ‘최고’의 자기소개서는 ②의 방향성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유는 간단하다. ①안처럼 미리 자기가 가야 할 방향을 정한 후 관련된 스펙을 쌓다 보면, 스펙의 종류가 천편일률적이 되기 쉽기 때문에. 예를 들어 공익변호사가 되고 싶다면 봉사활동을, 지적재산권 변호사가 되고 싶다면 지적재산권 관련 단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식이다.


그러나 나는 스펙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스펙들이 모여 주장하는 ‘인생 자체가 매력적인지’ 여부라고 생각하기에, 그러려면 스펙을 통해 드러나는 지원자의 인생이 일단 ‘입체적’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매력적인 모든 이야기에는 반드시 어떤 예측불허의 입체적인 계기와 고비, 양면성 등이 녹아있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스티브 잡스도 이런 이야기를 한 게 아니었을까.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스티브 잡스 님은 알고 계셨어! ⓒM.D. Mahdi on Unsplash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나의 결론은 심플하다. 결국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스펙은, 계획되지 않은 다양한 경험, 즉 예측불허의 수많은 dots에서 출발한다는 것. 그러니 진정 뛰어난 스펙을 만들고 싶다면 (그리고 아직 기회가 있다면) 지금까지 해보지 않은 새로운 경험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는 것.

매거진의 이전글 <퍼블리>에 글이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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