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첫날
바르셀로나 도착 첫날이다. 출발 전 온라인으로 예약했던 숙소 위치가 좋다.
AV. Sarria에 위치해 있는 숙소에서 바르셀로나에서 가려던 명소 대부분이 근방에 있다. 여러모로 가성비가 좋은 숙소다.
카운터에 있던 구스티오의 인상도 서글서글하니 좋다. 첫날 점심을 구스티오에게 추천받아 거리로 나왔다.
우리나라 봄과 달리 이곳의 봄 날씨는
너무 좋다. 활짝 핀 벚꽃, 배꽃을 보고 떠나고 싶었는데 비 오고 바람이 많이 불어서 그러지 못해 아쉽다. 출발하는 날에는 밤부터 쏟아지던 비가 내내 그치지 않고 내렸다. 긴 겨울지나 처음 맞는 꽃의 계절인데, 궂은 날씨로 우리나라 봄은 사람을 애끓게 한다.
파란 하늘과 맑고 쾌적한 바르셀로의 4월은 봄이라기보다는 여름 같다. 사람들이 걸친 옷이 긴팔과 점퍼, 카디건 같은 것들이라서 여름으로 볼 수는 없지만 맑은 하늘과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은 영락없는 여름이다.
이국적인 풍경과 낯선 사람들 속에 있자니 비로소 여행자라는 실감이 난다. 오늘이 특별한 날이라도 되는지 거리 곳곳에서 젊은 아이들이 장미꽃을 팔고 있다. 붙임성이 좋은 여자아이가 생글거리며 나에게 꽃을 사라기에 잘됐다 싶어서
"나는 꽃을 왜 사야 하는지 이유도 몰라"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여자 아이는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를 능숙한 말로 대답했다. "오늘은 바르셀로나의 축제인 '산 조르드 Sant Jordi의 날'인데 이 꽃을 사서 네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면 사랑이 이루어질 거야."
"어머나, 얘들아 무슨 말이니? 이 나이에 그런 일이 생기지도 않겠지만 생겨도 큰일 날 일이다 얘!"
뭐 대충 요런 식으로 말을 했더니 내 말을 듣고 있던 까만 머리 여자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앙큼한 것, 내 얼굴 주름이랑 흰머리 보면 몰라? (아, 나중에 보니 모자 쓰고 얼굴도 반이나 가렸다. 어째 이상 터라니.)
얘들은 나를 몇 살로 봤을까? 나를 미혼으로 보았던 걸까?
아니다, 그냥 꽃이나 하나 팔겠다는 마음이겠지 뭐. 여행자라고 하는데도 꽃을 사서 사랑의 결실을 맺어보라는 철부지들이 어이없어 가려고 발걸음을 떼려는데
장미가 그려진 책꽂이를 내밀며 이번에도 열성적으로 설명을 해댄다. 자주 읽는 책에 장미꽃 책꽂이를 꽂으면 세 가지 기억나는 문장이 어쩌고 저쩌고... 열정 천사 나셨다. 4유로 벌겠다고 이리 열정을 보인다. 그냥 가버릴 타이밍도 놓친 것 같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사진이라도 한 장 건지자 싶어 물어보자 말끝 나기 무섭게 하모 하모 된다며 같이 셀피도 찍자며 핸드폰을 달란다.
동전 네 개 받고서 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활짝 웃는 귀여운 도둑들이다. 요런 귀여운 열정 청춘들이라면 기꺼이 몇 번은 더 당해줄 마음까지 생긴다.
숙소로 돌아와서 구스티오에게 꽃을 주면서 물었다.
"오늘이 무슨 날이길래 장미꽃을 주는 거니?"
꽃을 받고서 얼굴이 더 환해진 구스티오는
보노 산 조르드의 날은 밸런타인 데이라고 보면 된단다. 아, 그제야 확실하게 이해가 되었다.
발렌타인데이라면서 꽃은 내가... 너한테... 주었네...?
길을 오가는 사람들 손에 장미꽃이 들려있다. 꽃을 든 사람들의 표정이 밝고 부드럽다. 역시 꽃이 참 좋다. 꽃 한 송이 받고 사람들 표정이 화사하게 바뀌었으니 말이다. 거리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보니까 내가 꽃값으로 준 4유로는 비싼 값이었다. 2.5유로 쓰여 있는 것도 여러 곳이었다. 앙큼한 귀여운 도둑들 같으니라고. 그래도 그 아이들이 밉지가 않다.
산 조르디날에 꽃을 주고받는 것은 젊은 사람들만 그러는 게 아니더라. 나보다 더 주름이 자글자글 많은 할머니도 장미꽃을 손에 들고서 영감님을 쳐다보며 웃고 있는데 그 모습이 보기도 좋았고 부럽기도 하더라.
근데 그 영감님, 새로 만난 분은 아니겠지? 요즘은 사이좋아 보이는 중. 노년 커플을 볼 때면 고게 그렇게 궁금하더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