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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cky Ha Oct 08. 2024

다시, 국숫집

내가 5학년때 엄마는 안성 시내 후미진 골목에 굴 속같은 손바닥만한 식당을 열었다. 그 식당은 빛이 한 톨도 들지 않아서 밤낮없이 불을 켜두어야 했다. 주방 연탄 아궁이 위에서는 커다란 알미늄 솥에 하루종일 소뼈 국물이 끓었다. 뼛국으로 국수를 끓여 갈색 간소고기 고명과 노란 계란 지단, 빨간 다데기를 올린 뽀얀 국물의 사골칼국수가 주메뉴였다.      


70년대말 국가에서 식량증대, 생산증대로 정부가 온 국민을 들들 볶을 때, 우리 아버지는 ‘야마기시즘’을 접하셨고, 한국판 야마기시즘인 ‘산안회’라는 모임에 꽤나 적극적이셔서 친환경 생태 농법을 지향하셨다. 논에는 제초제 대신 오리가 떠다녔고 우리 양계장의 닭들은 볕집 위에서 맘껏 꼬꼬댁 거리며 몰려다녔고 어둡게 만들어준 나무집에 들어가 알을 낳았다. 그야말로 완벽한 동물복지의 실현이었다. 그 시절은 이렇게 건강하게 자란 먹거리에 대한 개념도 없던 때인데다가 험악하게 몰아친 오일쇼크는 아버지의 사람사랑, 생태농업의 꿈을 산산히 부숴버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먹을 거 못 먹고 입을 거 못 입으시며 마련한 많던 농토는 아버지가 진 빚에 농협으로 다 넘어가 버리고 아버지, 어머니는 아홉식구를 먹여 살리고자 없는 돈에 시내에 “솔밭식당”이라는 칼국숫집을 열었다.     


어느 토요일이었다. 학교를 끝마치고 토요일마다 있는 성당 주일학교를 땡땡이치고 동생들을 데리고 10리 길을 걸어서 안성 시내에 있는 부모님의 식당을 찾아갔다. 꼬질꼬질한 몰골의 우리 삼남매는 엄마의 젖빛깔처럼 뽀얀 사골국물의 국수를 먹었다. 나는 그 국수를 맛보고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국수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고기국 구경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던 시절, 소뼈 국물은 너무도 고소해서 한 숟가락 먹고 그 맛의 끝이 너무도 안타까워 또 한숟가락 먹고, 또 먹게되는 그런 맛이었다. 거기에 국수면발은 어찌나 부드럽고 매끄러운지 씹을 사이도 없이 목구멍으로 빨려들어가서 쉬이 줄어드는 양에 나의 마음을 더욱 조바심치게했다. 나는 그 후로 그런 국수를 먹어보지 못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후 나이 쉰이 넘어 동네 이모네 배밭에서 배 솎는 작업을 하던 어느날, 이모 부부는 점심으로 국수를 사주겠다고 했다. 우리 지역에서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속칭 서울식 국수인 사골국수 맛집으로 소문난 집이었으나 어쩐 일인지 나는 알고만 있었지 가보는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엄마의 옛날 국수처럼 뽀얀 국물에 소고기 고명과 다데기를 얹은 제물 칼국수가 나왔다. 첫 맛을 보고는 단번에 엄마가 끓여내던 같은 사골국수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먹으면 먹을수록 엄마의 사골국수 맛이 아니었다. 뭔가 빠진듯한 허전한 맛. 그저 나의 가슴만 먹먹하여 그 시절의 젊은 엄마가 끓여주던 안타까운 국물 맛 생각으로 가슴이 아려올 뿐이었다.     


엊그제 엄마는 팔순이 되었다. 일요일에 가족 전체가 모이는 식사 자리가 있었으나 전날 여동생과 나는 엄마를 모시고 교외에 예쁜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이런저런 옛 이야기를 나누다가 여동생이 오남매가 비용을 내서 엄마에게 작은 칼국숫집을 차려주자는 의견을 내었다. 엄마와 우리는 신이나서 아무말 대잔치로 국숫집을 열었다 닫았다를 수없이 하며 즐거운 수다를 떨었다.     


다음날 엄마, 아부지를 모시고 엄마의 팔순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나는 뭐에 홀린 듯이 미양면 면소재지로 차를 몰았다. 평소에는 안보이던 작은 부동산이 눈에 들어왔고 남편이 부동산에 전화를 했다. 부동산 사장님은 휴일인데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마치 우리를 위해 남겨둔 듯 본인의 건물 1층의 열대여섯 평의 빈 상가를 보여주었다. 사실 그 동네는 아주 예쁜 작은 도서관이 들어와서 지역의 젊은 문화예술인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진출하고 있어서 빈 상가가 없다고 소문이 나있던 터라 기대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사장님은 마침 초등학교 선배인 동네 토박이였고 우리 동네 오빠들과 친구여서 간단한 호구조사를 마치고 흔쾌히 좋은 가격에 우리와 계약을 했다.     


단 이틀만의 창업이라니 정말 속전속결이다. 무엇이 우리 남매들을 이렇게 한 뜻이 되게 하고, 나이든 엄마에게 가게를 선물할 수 있게 한 것일까. 그냥 가지고 무덤으로 가기에는 너무 아까운 엄마의 음식 솜씨. 늙으막이라도 빚에 쫓겨서가 아니라 즐기면서 발휘할 수 있기를 바라는 자식들의 바램과 배고프던 시절 맘껏 먹지 못했던 엄마의 젖빛 사골 칼국수를 안타까운 마음 없이 오래오래 먹고 싶은 우리 오남매의 어린 소망이 만들어낸 기적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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