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모든 감각을 일깨우는 한사람
내 발은 걷고 또 걸어 동네를 몇 바퀴나 돌고 고래 벽화를 3번이나 봤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같은 자리를 서성이고 있었다. 골목을 훌쩍 벗어나니 바다가 보였다. 계속 동네만 뱅뱅 돌다간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넓고 푸른 바다를 보고 싶었다.
새파랗고 용감하게 휘몰아치는 파도와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찬란한 겨울바다의 윤슬은 언제 봐도 장관이다. 바다 앞으로 걸어가서 숨을 크게 들이마셔 보았다. 방파재 위로 성큼 올라가서 파도가 크게 밀려왔다가 다시 사라지는 광경을 넋 놓고 지켜보았다. 잠시 휘청했지만 잠자코 그 자리에서 한참을 버텨보기로 했다.
탈북한 이후로 사람들과 말하는 것이 두렵다. 나의 말투로 인해 출신이 발각되어 벌어지는 일들이 나에겐 버겁기만 하다. 결핍을 티 내기 싫어서 고개를 들고 어깨를 펴고 당당하고 씩씩하게 생활했지만 불안함은 늘 내 안에 있었다.
내가 적응을 하고 살아갈 수 있을지. 은주가 없어진 지금, 남쪽과 북쪽 어디에도 마음 붙일 곳은 없다고 생각했다. 돌아갈 곳도, 머물 곳도 불확실한 나라는 존재는 어디에 속할 수 있을까?
나처럼 집이 없고 부모가 없는 아이를 고아라 부른다. 모든 사랑을 포기한 채 살아왔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는 사랑을 갈구했다. 하여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부르면 혹여 사랑일까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사랑이 다정히 따뜻함이 이렇게 쉬울 수 있다는 게 억울하다. 나에게 이런 온기를 주는 이들에게 나는 자꾸만 화가 난다. 왜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난 거냐고.
남조선이 좋은 곳인지 아닌지 아직 불확실하다. 하지만 내 곁에 머무는 이들이 꿈에서만 존재하는 천사들 같아서 나는 이곳이 천국이 아닌가 두리번거리게 되는 것이다.
어느덧 시끌벅적 분주해진 시장통을 활보했다. 어차피 방에 들어가면 할 수 있는 거라곤 컴퓨터게임뿐이라 산책을 하기로 했다. 아이들에게서 들은 게임을 해 보았지만 하면 할수록 아까운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듯해서 조급해졌다. 굳이 이겨서 뭐 하나 싶었는데 또 이기려고 눈을 부라리며 바보상자에 홀려 있는 내가 한심하기 짝이 없어서 문을 박차고 나왔다. 지금 집에 가면 나는 또 게임을 시작할 게 뻔하니 사람들을 구경하기로 했다.
허름한 반찬가게 앞에서 멈추었다. 나의 모든 감각을 일깨우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반찬통에 갖가지 반찬을 담으며 손님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특유의 친화력이 가득한 말투이다.
“더 줄게. 더 넣었어. 오늘 양념이 맛있게 됐어. 김치도 딱 잘 익었는데 갖고 가요 5천 원 치만 드릴까?”
양념이 여기저기 묻어있는 앞치마에 손을 슥슥 닦고 반찬을 정리하며 아줌마는 콧노래를 불렀다. 쭈뼛쭈뼛 앞으로 걸어간 나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반찬통을 들여다보던 아줌마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큰소리로 인사를 한다.
“어서 오세요 뭘 좀 드릴까요?”
“어머? 너 언제 왔니? ”
아줌마가 양념 묻은 장갑을 벗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가게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자 한순간에 반찬가게 손님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수많은 눈빛들이 만들어낸 것은 물음표일 것이다. 하지만 아줌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래서 나는 그 시선에 당당히 맞설 수 있었다. 사실 내가 아줌마를 찾아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알고 왔어? 그나저나 집에 돌아가는 길은 알아? ”
“모릅네다... ”
나는 이제 길을 잘 찾을 수 있었다. 내가 혼자 산책도 곧잘 다니는 걸 알면 아줌마는 깜짝 놀랄 것이다. 혼자 텅 빈 집에 가기 싫어서 거짓말을 했다. 더 솔직한 내 마음은 아줌마의 일상에 함께 있고 싶었다.
“어떡하지. 아줌마가 일이 많아서 지금 데려다 주기가 힘든데.”
아줌마가 고민을 하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아침에 곱게 하고 갔던 화장이 어느새 다 지워져 버린 입술에 생기가 없어졌다. 아줌마는 붉은 다홍빛 입술이 잘 어울리는데.
“일없습네다. 마칠 때까지 기다리고 있갔으니 걱정하지 마시라요.”
의도하지 않았던 말이 나왔다. 예의 바르고 모범적인 아이들이 할법한 말들을 하다니. 정말 가식적이다. 아니면 이게 나의 진짜 모습일 수도 있고.
“영애야, 여기 들어가 있어. 티브이 봐도 돼.”
아줌마가 틀어준 텔레비전 속의 만화는 15살인 나에겐 유치할 따름이어서 다시 밖으로 나가 사람 구경을 하고 싶었다. 꼼지락 대며 나갈 틈을 보고 있는데 주방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저기 얘”
작은 조리대 앞에서 멸치를 볶고 있던 여자가 나를 불렀다. 긴 생머리를 하나로 묶고 작은 얼굴이다. 쌍꺼풀이 느끼한 걸 보니 남조선에서 흔하다는 수술을 한 건가 보았다.
“너 영주 아줌마 딸이니?”
“영주 아줌마가 누구입네까?
”응?? 너랑 얘기하던 여기 사장 말이야. 이름을 몰라?"
아줌마는 대답이 없는 나를 가만히 훑어보더니 손뼉을 찰싹 친다.
”아! 그럼 네가 그 집에 산다던 북한애구나. 우리 딸한테 얘기 들었어. “
누굴까? 우리 반에 저 아줌마와 닮은 아이가 있는지 얼굴을 차례차례 떠올려서 끼워 맞춰보았다. 쌍꺼풀 수술 전의 눈을 상상하며 끼워 맞추려니 영 유추가 쉽지 않다. 그냥 물어보면 되는 데 궁금한 티를 내고 싶지가 않았다. 여자는 머쓱한 듯 다시 반찬 만들기에 집중했다.
아줌마가 머무는 반찬가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손님들은 반찬이 비싸다거나 양이 적다던가 간이 부족하다는 둥의 말을 하며 아줌마의 속을 긁기도 했는데 아줌마는 못 들은 척 생글생글 웃으며 손님의 비위를 맞춰주고 있었다. 그렇게 손님들의 반응을 살피며 서있는 모습은 홀로 떨어져 있는 외딴섬처럼 보였다. 학교에서의 나와 닮아있기도 했다.
우리는 함께 점심을 먹었다. 갓 조리한 반찬들은 따뜻하고 촉촉해서 밥이 꿀떡꿀떡 넘어갔다. 물론 그것보다는 아줌마와 함께여서 임을 나는 이제 부인하지 않는다.
해가 지고 깜깜한 밤이 찾아오자 거리에 사람들은 사라지고 하나 둘 가게에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아줌마는 가게를 정리하며 말씀하셨다.
”오늘 가게에서 이것저것 도와주어서 고마웠어. 심심하고 힘들진 않았어? “
”일없습네다. 아주매가 더 힘들지 않았습네까?“
아줌마의 표정과 목소리는 여름의 아침처럼 싱그럽고 환하다.
”뭐 먹고 싶은 것 있니? “
”김.. 밥.. 김밥이 먹고 싶습네다.“
”김밥? 거기서 즐겨 먹었니? “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지마는 들어본 적이 있어서 늘 궁금했습네다."
아줌마는 처음 들은 나의 요구가 사라질까 말이 끝나자마자 득달같이 슈퍼로 달려갔다. 재료를 사 온 아줌마는 빠른 손놀림으로 당근을 썰어서 볶고, 햄을 굽고, 어묵을 조리고, 계란을 부쳐서 길고 고르게 자르고 시금치를 데쳤다. 마치 기계가 작동되듯 망설임 없이 척척 진행되는 광경을 넋 놓고 지켜보았다. 요리가 이렇게 재미있다니, 하루종일 봐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완성된 김밥에 참기름을 바르고 깨를 솔솔 뿌려 접시에 소복이 담은 뒤 아줌마는 따뜻한 물과 차가운 물을 섞어서 컵에 담았다. 정성이 가득한 음식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심정이 되었는데 이것이 나만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조심스레 김밥 하나를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참기름의 향이 확 퍼지며 짭조름하고 고소한 맛이 조화롭게 어울렸다. 밥의 양도 딱 알맞아서 한입에 먹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몇 번이나 울컥했지만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고 행복을 누리자고 다짐하며 꼭꼭 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