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아물었던 상처들이 덧나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체육시간이었다. 선생님은 내게 오시더니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여기 나가보지 않을래?”
종이에는 중학육상대회라는 글귀가 쓰여있었다. 물음표가 띄워진 얼굴로 내가 쳐다보자 선생님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말을 이었다.
“너 달리기에 재능이 있더라. 부산에서 열리는 대회거든 나가보지 않을래? 생각해 보고 교무실도 찾아오렴. 목요일까지다. 늦으면 안 돼.”
달리기를 잘하는 나를 알아보다니 어쩐지 어깨가 으쓱해졌다. 달리기를 할 때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아무 생각이 안나는 거다. 원래 그렇다. 그래서 아무 생각도 안 하기 위해 달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잘하게 되었던 걸까? 아님 정말 내가 재능이 있는 건가?
수빈이를 보니 문제집을 풀고 있다. 고집스럽게 끄적이는 장면이 이젠 익숙했다. 하교 후 바로 학원을 가야 하는 수빈이와 인사를 하고 집으로 가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수빈인가 하고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돌렸는데 다름 아닌 우시은이었다. 그것도 나를 괴롭히던 아이들이 다 같이 몰려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목을 타고 흘러와서 침을 꿀꺽 삼키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왜?”
“오늘은 지수빈이 없네? 하나뿐인 친구가 없으니 기분이 어때? 아닌가? 북한에 있니?”
아이들은 나를 조롱하며 한참을 낄낄됐다. 타격받지 않는다는 듯 무시하며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 우시은이 앞으로 맨 백팩에서 공책 한 권을 꺼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공책이었다. 너무 놀라서 얼어붙고 말았다.
낡은 공책에 바래진 하얀 토끼 그림과 정성스레 끼워진 스프링.
유일무이한 나의 보물, 나의 집, 나의 생명과 진배없는 북조선에서 가져온 유일한 내 재산이다. 저게 왜 우시은의 손에 있는지 모르겠다. 심장이 뜨거워지게 분노가 일었다. 강한 척했던 나는 금세 무너졌다. 나는 달리기를 잘하고 날쌨다. 하지만 지금은 다리가 후들거리고 이빨이 덜덜 떨렸다.
“영애야 너 여기 와서도 일기를 썼더라? 수빈이에 대한 말도 있고.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랑 수빈이 관계 다 틀어지게 할 수 있어. 네가 남조선 어쩌고 하면서 여기 처음 와서 쓴 글들도 어디 한번 학교게시판에 올려볼까? 아? 고아원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겠다. ”
수빈이가 나에게 실망해도 상관없다. 다만 수빈이가 상처받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기에는 내가 처음에 수빈이의 친절함을 의심하고 불신하는 내용도 적혀있기 때문이다. 그때와 지금의 우리는 많이 변해 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수빈이에게 조금의 생채기도 내고 싶지가 않다.
우시은에게서 일기를 되찾으려 달려들고 내쳐지며 바닥에 굴렀다.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몇 번이나 달려들고 밀쳐지고 또. 다시 매달렸다. 탈북했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때보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겨우 아물었던 상처들이 다시 덧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도움을 청할 사람은 없지만 백 미터 남짓만 가면 우리 집이다. 나는 있는 힘껏 뛰었다. 문 앞에 다다르자 무리들도 뛰어오는 것이 보인다. 힘겹게 벨을 누르고 털썩 주저앉았다. 나를 보호하고 일기장을 찾아야 했다. 부디 아줌마가 집에 있기를 바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끼익 철컥.
아줌마는 거실에 달린 뻐꾸기시계처럼 대문에서 튕기듯 나왔다. 파자마를 입은 채로 서서 상황을 살펴보는 아줌마의 표정이 굳었다. 이어서 아저씨가 뛰어나왔다. 아저씨는 지체하지 않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아이들을 나무랐다. 그리고 우시은 손에 있던 나의 일기장을 낚아챘다. 아이들은 기세에 눌려서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히 굴고 있다.
나는 그대로 집안으로 들어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다. 쿵쿵거리는 가슴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침대맡에 앉는 소리가 들린다. 아줌마였다.
“영애야 괜찮니?”
이불속에 있어도 아줌마의 손길과 눈길이 느껴진다. 표정도 알 것만 같다. 아줌마를 슬프게 한 것이 마음 아프다. 내가 반응이 없자 아줌마는 문을 닫아주고 방을 나가며 혼자만의 시간을 주었다. 함께 지낸 시간만큼 아줌마도 나의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한 것 같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노라니 온몸이 축축해서 찝찝하다. 땀범벅이 되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힘없는 손으로 문고리를 돌리고 나왔다. 나를 믿어주고 내편인 사람들에게 발걸음을 옮긴다. 소파에 기대앉은 채 하염없이 울고 있는 아줌마를 보고 나는 비로소 그 답을 알게 된다.
내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혼자만의 시간이 아니었다. 그동안의 설움을 털어놓는 시간이었다.
“영애야...”
아줌마는 멍하니 서있는 나를 보고 놀란 듯 눈물을 닦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이내 두 팔을 크게 벌린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품속으로 달려갔다. 아줌마에게서 풍기는 갖가지 반찬냄새에 배가 고파진다.
“고맙습네다. 아줌마”
내가 아줌마에게 건넨 한마디에 어깨를 흔들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고작 이 말 한마디를 그동안 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네다. ”
아줌마는 나를 쓰다듬으며 흐느껴 울다가 잠긴 목소리를 감추려 헛기침을 했다.
“영애야 너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우리 영애 그동안 혼자서 많이 힘들었겠구나. 아줌마가 미안해. 이제부턴 숨기지 말도록 해. 뭐든지 꾹꾹 눌러 참는 것은 좋은 습관이 아니야.”
세상에 나밖에 없는 듯했던 이상한 행성에서 아줌마와 아저씨는 나를 품어주었다. 내가 하는 사소한 행동이나 표정에도 진심을 기울여 바라봐주었다. 그럼에도 돌아오는 것은 나의 차가운 태도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기다려주었다.
조건 없는 사랑이 있다면 이런 것일까. 가슴한구석이 벅차올랐다. 나를 바라보며 웃어주는 아저씨와 아줌마의 얼굴이 보였다. 사진을 찍듯 그 모습을 선명하게 담아두고 크게 소리쳤다.
“안녕히 주무세요.”
항상 웅얼거리던 내가 크게 말하자 아저씨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좋아한다. 고작 그 정도로 환한 웃음을 짓는 아줌마와 아저씨의 행복은 참 쉽다. 행복이 쉬운 거라는 걸 나는 그들을 통해 배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