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경 Mar 15. 2023

귀신의 시간에 난 거실에 앉아 있었지 (5)

그를 만나기 100m 전

매일 조금은 다르게 꾸준히 찾아오는 독특한 통증에 대처하는 나의 태도는 점차 자학적인 면모를 띠게 되었다. 정형외과에서 처방받은 약으로는 통증을 가볍게 만들 수도,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할 수도 없다는 것을 매일 아침 확인하면서 시니컬한 기분을 유지했다.

통증의 농도는 짙어지고, 염증의 발병 범위도 넓어졌다. 말단의 작은 관절뿐만 아니라 무릎이나 고관절, 목과 어깨, 팔꿈치, 손목, 턱관절까지 통증이 발생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믿을 수 없는 만큼 공평하게 모든 곳이 예측 불가능하게 발적하고 하루에서 반나절 정도 극한 통증을 보이다 뚜렷한 원인 없이 나았다. 아침에 확인되는 통증 부위를 주의하지 않고 사용하면 반드시 오후에 극한 통증을 겪었고 다른 곳이 발적 할 때까지 계속해서 나의 일상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스스로를 위한 독백의 시간을 통해 마침내 나는 다음의 결론에 이르렀다.     

‘특정 상황에서 어떤 개선의 의지도, 바람도 가지지 않는 사람은 대개 비슷한 심정일 거야. 몰라서 그렇거나 해보았으나 포기한 상황일 테니. 무지한 상태에서의 노력은 현재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며 가능성 없는 희망은 반드시 남겨두어야 할 삶의 에너지마저 다 소진하게 만들지.’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끊임없이 구분하고 의식하며 지냈다.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한 나의 사회생활은 불안정한 기반에도 불구하고 순탄히 이어갈 수 있었고 아이들은 제 나름의 속도로 매 순간 성장하고 있었다. 덕분에 생존형 삶을 유지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행복했고 생에 대한 애착은 한없이 질겨지고 깊어지는 대신 그 형상을 따라 검게 우울감이 드리워졌다.     


통증과 함께하는 생활이 점차 몸에 익어 익숙해질 즈음, 한방 전문의이자 양방에 관한 공부를 이어가고 있는 ‘가족’에게 한약을 지어먹을 요량으로 전화를 했다. 사는 지역이 달라 전화로 증상을 알린 뒤 한약을 지어먹곤 했었으니까. 지난번에 비위가 약해서, 홀로 느끼는 자신의 구취가 힘들어서 전화로 이미 몇 번 통화한 적이 있었고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민한 탓입니다. 예민해서 쉽게 스트레스받으며 그로 인해 모든 증상이 생긴다고 보입니다. 특히 본인의 구취를 신경 쓰시는데 그것은 사실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는 수준이 대부분이거든요. 건강한 사람도 상황에 따라 구취가 있다가 없어지기도 하니까요. 병이라 보긴 어렵고 대개 심인성으로 생각됩니다. “  

   

이번 증상에도 혹시 심인성이란 말을 들을까 하여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통화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말씀을 들어보니 이 증상은 류머티즘으로 보입니다. 류머티즘이 지닌 몇 가지 증상적 특징이 있는데 모두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류머티즘은 정형외과에서 진단을 받거나 치료받을 수 있는 병증이 아니에요. 자가면역질환이고, 류마티스내과로 가셔야 해요. 광주에 있는 대학병원에 류마티스내과가 있어요. 제가 주치의를 소개해드릴 테니 검사를 받아보세요. “     


통화를 마치고 나는 한참을 그대로 앉아 멍하니 있었다. 심장이 불편하게 쿵쾅 대고 왠지 모를 설렘으로 입안 가득 침이 고여 꼴깍꼴깍 삼키지 않으면 입술 사이로 흐를 것 같았다. 두 손을 무릎께 올린 후 꼭 쥐며 생각했다.     


드디어 내가 주치의를 만나고 확진을 받은 후 치료받을 수 있게 되었어. 하지만 이번에도 류마티스내과 전문의에게 나의 병증이 류머티즘이 아니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크게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이 병증에 대해 뭔가 도움이 될 만한 말을 해줄 수도 있으니까. 의사는 그런 존재가 아닌가! 병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아픈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영혼의 빛이 다른 존재.

유의미하고도 중대한 것을 찾아 가슴에 품게 된 사람은 안다. 쉽게 찾아내지 못했을 뿐 이미 인연의 기운이 내 곁에 감돌고 있었다는 것을, 인연의 기운은 내가 찾아 헤매기 전부터 마련되고 있었고 그것이 모습을 드러낼 때가 되지 않으면 나 따위가 아무리 애를 써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마침내 많은 인연이 한 점에 모여 농익었을 때는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수월하게 내 품에 안긴다는 것을.

이 병증에 관해 작은 실마리라도 잡으려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정보를 찾아보기도 했고 주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보기도 했다. 더구나 영혼의 빛이 다른 존재라 믿는, 그간의 정형외과 전문의에 대한 진한 배신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몹시 억울하다. 어렸을 때부터 그다지 세상의 것에 큰 욕심을 내지 않았다. 태어난 이후 바짝 따라붙었던 밑바닥부터 차오르는 생의 번민이나 우울감도 모자라 내 두 발로 딛고 일어서 움직이는 것조차 어렵게 만들더니 병명도 모른 채 몇 해를 보냈느냐 말이야. 정형외과 의사들의 상냥하고 비겁한 친절에 기대어 호전되지 않음에도 성실히 한 주먹씩 삼킨 알약이 모두 몇 알이고 극한 통증에 잠들지 못한 밤이 몇 날이었나!      

통증에 항복한 나는 결국 여생의 의미를 헐값에 내놓고 비싼 값을 치르며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려 마음을 먹고 거의 매일 밤 귀신의 시간에 소파에 앉아 죽을 궁리를 하고 있었다. 죽는다는 것은, 살아 있는 내가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지난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많았고, 걸리는 것 중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처리해 놓은 후 ‘가야겠다'는 욕심을 내다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연일 해가 뜨면 바빴고 해야 할 일도 평소보다 많아졌다. 냉장고 정리, 서랍장 정리, 옷장 정리, 발코니 정리, 정리, 정리, 정리, 또 정리. 맙소사! 정리하다 죽겠어! 아니, 정리하다 못 죽겠어!

주변 사람들도 정리해야겠다 생각하니 어떤 사람들은 내가 눈 감으면 그만이지만 진심으로 아껴 온 몇 안 되는 소중한 사람들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공연히 내 사랑하는 반려자와 초록 초록한 두 아이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고, 가족, 친구, 동료들에게도 새로이 애틋하여 사랑이 솟고 생각만 해도 또 마음이 아려 뜬금없이 전화하거나, 문자를 보내거나, 찾아가 보거나, 이건 아니다 싶어 그냥 눌러 참거나 이 역시 이래저래 정리되지 않았다. 어이쿠! 죽으려니 시간이 모자라. 하루가 어찌나 쓸 것 없이 부서지는지 원.

퇴근하다 꽃집에 들러 꽃을 사려다가도, 검정 슬랙스가 마음에 들어 사려다가도, 달력에 몇 달 후 일정을 메모하다가도, 미래를 생각하며 계획하는 그 모든 것에 계속해서 하면 뭐 하나, 사면 뭐 하나, 가면 뭐 하나, 뭐 하나, 뭐 하나, 이놈의 ‘뭐 하나’가 내 온 사지를 붙들고 늘어졌다. 이런 젠장!     


계속해서 살아갈 생기와 온기가 아직 온몸에 충만히 흐르는 나란 사람,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죽어야겠다는 생각은 결국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싱거운 해프닝으로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이제 또 다른 시작의 기운이 스물 대고 있고 결과는 아직 확신을 가질 수 없다. 불확실성 속에서도 멈출 수 없게 된 채 설렘 가득한 이 일보 전진이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 계속 저울질을 해대고 있으니 한심한 설렘이렷다.


아니다, 아니야. 나약한 인간아, 너는 이렇게 설렘의 쪽배에 올라탄 후 얼마 되지 않아 원망의 파도에 순식간에 잘도 휩쓸리는구나. 그 무엇도 확실한 것이 없는 지금 나 홀로 확신과 위안을 넘어서 절망까지 3종 세트를 만들고 있어. 침착하자, 침착해. 이제 진정한 나의 주치의를 만날 수도 있다. 주치의와의 첫 면담에서 어떤 질문을 받게 될까? 어떤 검사를 받게 될까? 아, 이런, 다시 설레기 시작했어.

서쪽으로 지는 해가, 자세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앉아 오른쪽 다리를 떨고 있는 나를 비웃으며  저녁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귀신의 시간에 난 거실에 앉아 있었지 (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