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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경 Jun 08. 2023

귀신의 시간에 난 거실에 앉아 있었지 (6)

에너지 구슬의 비밀

외래 진료 신청을 하고 만난 광주 대학병원의 류마티스 내과 주치의는 담담하고 차분하게 문진을 하고 이어 촉진을 했다. 흉부와 손, 발 엑스레이를 찍고 나의 반려자와 함께 차분히 대기한 끝에 확진을 받았다.

     

”류머티즘입니다. 희귀 질환 산정특례를 신청할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

     

놀랍도록 매끄럽고 기품 있는 말투다.

산정특례란 희귀 질환자로 확진받은 후 등록 절차에 따라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등록한 후 본인 부담률을 10%로 경감받는 제도이다. 처음 외래 진료를 받은 후 병원 측에서 당일 등록 대행해 주었다. 당시에는 그 제도가 어떤 내용의 제도인지 몰랐으나 류머티즘 치료를 중단하지 않고 지속할 수 있게 하는 기본이 단단한 의료혜택이다. 류머티즘은 여생을 함께해야 할 병증으로 투병 기간이 길어질수록 산정특례자로서의 감사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깊다.

산정특례애 관한 간단한 안내를 받고 대기 중인 내게 주치의가 물었다.     


”현재 통증 강도나 염증 치수가 무척 높은데 지금까지 어떻게 지내셨나요? “

”가까운 정형외과 치료를 받았어요. “

”정형외과요? 그곳에서 어떤 종류의 치료를 받았나요? “

”물리치료를 받거나 처방받은 약을 매일 먹었어요. “

”그럼 가장 최근에 복용한 약의 처방전을 가져올 수 있겠어요? “

”네. 다음 진료 시 가져올게요. “   

  

1차 의료기관인 의원의 경우 대개 약국 제출용 처방전 1장을 발급받고, 2·3차 의료기관인 종합·대학병원은 환자 본인용, 약국 제출용 처방전으로 2장을 발급받는다. 하여 본인 확인용 처방전을 발급받지 못한 까닭에 최근 복용한 약의 처방전을 재발급받기 위해 다니던 정형외과에 들렀다. 내원 목적을 말하고 의원의 원장을 만났고 그가 물었다

.     

”처방전은 왜 필요하세요? “

”제가 대학병원에서 류머티즘 확진을 받았어요. 대학병원 담당의가 그동안 복용한 약의 처방전을 가져오라고 해서요. “     


하얀 가운을 입은 그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뭔가 복잡한 심사가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고.     


”아, 네…. 그간… 약이… 별… 건… 없는데…“   

  

그가 모니터를 바라보며 자판을 두드린다.

    

”그동안 복용한 약이 특별한 것은 아니에요. 소염진통제였거든요. “     


당신의 말대로라면 당신이 처방한 특별하지 않은 소염진통제를 매일 한 주먹씩 먹었군요. 특별한 차도도 없이 하루 세 번, 그 알약에 기대어 절망하기도 하고 간혹 차도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지내왔단 말입니다.

     

간호사가 처방전을 건네주었다. 내가 실제 복용했던 알약의 수와 재발급된 처방전에 적힌 알약의 수가 달랐다. 절반 정도 수량이 줄었지만 따지고 싶지 않았다. 이젠 이 병원도 다시 올 일이 없을 것이기에 홀가분히 집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불신과 애증으로 잘 버무려진 류머티즘과 정형외과와의 잘못된 만남은 끝이 났다.     

다음 류마티스 내과 예약된 진료일에 정형외과의 처방전을 제출했고, 그것에 관해 내 담당 주치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조작되긴 했지만 특별하지 않다던 그 처방전은 정말 특이 사항 없이 ‘흔한’ 소염진통제일 뿐이었던 것이리라.     


진료실을 나오며 본능적으로 내게 시선을 꽂는 다수의 대기자들을 마주했다. 환자로 보이는 이들 대개의 연령대는 노년이었고 간혹 드물게 젊은 여성, 젊은 남성은 감지되지 않았다. 대개 젊은 남성은 환자와 동행한 보호자였다. 보호자와 환자는 극명하게 다른 모습으로 대기하고 있었고 약간의 관찰력만 있으면 쉽게 구별해 낼 수 있다.

동행한 보호자는 느긋하지만 온 신경이 환자에게 쏠려있고 환자는 불편한 표정으로 절뚝거리거나 혹은 환부를 잡고 있는 모습을 보이며 적어도 이 공간에서 자신이 주인공임을 알고 있다.

환자 자신만을 위한 시간과 공간, 자원들이다. 거대한 대학병원의 규모와 각 구간에 배치된 다수의 전문 인력들, 모든 시설과 기구, 약물.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전문적 능력을 최대치로 쏟아줄 것이란 막연한 믿음을 가진 채 막이 오르면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하는 현재 시점의 주인공들.

젊은 나이의 여성 환자는 대개 마른 몸에 흰 피부를 지니고 있다. 미들 힐을 신고 있고 사무실에서 성급히 빠져나온 듯한 인상이다. 노인들 틈에 등을 세우고 차분하고도 신경질적인 모습으로 대기자 명단 모니터를 응시한다.


그녀들의 체질과 삶의 방식, 외부 상황을 인지하는 습성이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런 식의 일반화는 곤란하겠지? 그렇지만 너무나 딱 들어맞지 않는가 말이다!

발이나 다리에 통증이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니 평소 즐겨 신는 스틸레토 힐을 신고, 술도 적잖이 좋아해 취하도록 마시며, 잠이 오지 않으면 그런대로 깨어있고 그런 날이 있는가 하면 끝없이 잠이 쏟아지는 토요일, 일요일은 오후 한, 두 시까지 자기도 할 것이다. 사적인 공간에서 절도나 절제, 규칙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곤란하고도 불편한 요소들을 참을 수 있게 하는 에너지는 제한적이며 재충전되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점차 길어지고 있음을 인식할 즈음 전체적인 큰 변화를 계획할 것이다.

생활 습관을 포함한 일상을 대하는 전체적인 큰 변화는 어떻게 시작되어야 할까? 류머티즘 질환을 앓고 있는 ‘우리’는 매 순간 이행해야 할 신체적, 정식적 움직임 속에서 끊임없이 통증의 양상과 정도를 의식해야 하는데 여기에 답이 있다.


통증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내가 취한 전혀 새로운 방식은 이렇다. 하루 동안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가늠하고 종일 수행하는 신체 동작의 총량을 제한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추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인 개념이다.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에 놓인 작은 상자에 에너지 구슬이 50개 생성되어 채워져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이 상자는 어제 아침에도 비슷한 수량의 에너지 구슬이 재생되어 채워져 있었고, 어제 잠들기 직전까지 전량 모두 사용하게 되어 텅 빈 상자였다.

아침에 일어나 몸을 일으키고, 약을 삼키고, 씻고 화장을 하고 옷을 입은 후 출근하는데 보통의 날은 에너지 구슬 5개를 사용한다. 그리 어렵지 않은 동작과 복잡하지 않은 루틴이지만 만일 조조강직이 심하다면 상황은 매우 달라진다. 일어나 걸을 때 발걸음을 뗄 수 없는 날 에너지 구슬은 2개쯤 더 쓰이고 머리를 감고 씻을 때 손가락을 사용할 수 없다면 에너지 구슬 5개가 더 추가로 소요된다. 옷을 입을 때 팔을 들어 올릴 수 없이 큰 관절의 통증이 있다면 그 평범한 동작에 에너지 구슬 3개를 더 사용해야 한다. 보통의 날 아침 출근 준비에 에너지 구슬 5개를 사용하지만 통증이 심한 아침엔 10개 정도 더 소모된다. 만일 상자에 50개의 에너지 구슬이 생성되어 있다면 나머지 35개의 에너지 구슬을 소진하며 근무를 하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걷고, 서고, 앉으며, 일을 마친 후 귀가해 집안일을 수행해야 한다.

대개의 초기 류머티즘은 아침에 극한 통증과 함께 발갛게 발적 하며 부어올라 해당 관절을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많으며 깨어나 계속 활동하고 해가 머리 위에 떠오를 때쯤 서서히 부드럽게 풀린다. 조조강직이 심한 아침은 가볍게 씻고, 입기 쉬운 형태의 옷을 선택하며, 걷기 편한 넉넉한 사이즈의 신발을 신고, 출근해서도 격한 동작이나 무리하게 많은 일을 처리하지 않도록 하는 등의 스스로를 위한 배려가 필요하다.

신체활동을 포함, 정신적으로도 무리하면 할수록 다음 날 아침 채워지는 상자의 에너지 구슬 수는 적어지며, 충분하지 못한 수면 시간이나 질이 낮은 수면, 과음 혹은 크게 화를 내거나 지나치게 누군가를 미워하는 등의 정서적 소모, 지나친 카페인의 섭취를 비롯해 이 밖에도 다음 날 내게 채워지는 에너지 구슬의 수를 평소보다 적게 만드는 요인은 수 없이 많았다.


나를 살게 하는 에너지 구슬은 나에 의해 많아지기도, 적어지기도 했다. 그것은 내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며 철저하고도 완벽하게 나에 의해 결정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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