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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초이 Mar 29. 2023

산다는 게 무엇인가

산다 살다 살아있는

 인간의 생로병사는 진리다. 인간만이 그렇지 않다. 모든 생겨나는 것은 시들고 병을 얻고 결국 소멸한다. 태어나고 늙고 병드는 것까지 '살아있는'이다. 늙어도 병들어도 죽음과는 아직 멀다. 죽음의 신사가 멋진 슈트를 차려입고 다가와도 늙은 자와 병든 자는 따라갈 수 없다. 차라리 데려가라고 소리쳐도 듣지 못한다. 스스로 레테의 강을 건너려는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조차 인지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신 어머니를 뵙고 왔다. 치매와 폐렴으로 장기입원치료가 필요하다는 의사의 소견을 따랐다. 병원은 언제 퇴원을 하라고 시일을 정해주지 않는다. 누군가 24시간 간병할 수 있다면 모를까. 나라에서 등급을 매기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장기요양등급은 복지혜택이지만 등급에 해당하는지의 기준은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그렇다고 대들고 따질 수는 없다.


딸과 함께 어머니를 뵈었다. 병동에 면회실이 있다. 면회자는 마스크, 보호복, 위생장갑을 착용한다. 어머니는 환자복을 입은 상태에서 마스크를 쓰고 위생장갑을 꼈다.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비닐장갑 안에서 가늘게 떠시는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비닐장갑 손은 서로에게 온기를 전달하지 못한다. 이것이 올바른 면회 방법인지 알 수 없고 대들고 따질 수 없다. 심장은 뛰는데 가슴은 답답하다. 들고 나는 숨소리는 마스크 안에서 잔바람을 일으킨다.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고 대들고 따질 수 없다.

"아들이 온다고 해서 나왔어."를 여러 차례 반복하신다. "잘 있어. 잘 있어."를 묻는 말마다 대답하신다. 어디가 아픈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묻고 답하기 어려웠다. 환자복 바깥에서 안에 있는 살결을 짐작할 뿐이다. 살이 빠지셨구나. 어떤 언어로 대화해야 하는지 기억할 수 없으시구나. 입으로 토해내는 단어는 어린애로 돌아가셨구나. 단어를 가르칠 수 없고 배울 수 없구나. 눈망울에 잠긴 의미를 내 눈으로 찾으려고 애써도 볼 수 없구나. 그렇구나.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진리인 생로병사를 생각했다. 늙음도 질병이니 생로사든 생병사든 기정사실인 셈이다. 늙음에 병까지 더하여 사는 것도 '살아있는'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심장이 뛰고 호흡이 멈추지 않는 한 '살아있는'것인가. 아니, 마음속에 살아있다는 말을 따르면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나. 자식의 갓난아기 시절의 기억은 어머니의 것이다. 어머니의 늙음의 기억은 자식 몫이다. 배냇저고리 안에서 발버둥 치며 까르르 웃던 내 자식의 모습을 난 언제까지 기억할 수 있을까. 아니, 이미 그 기억은 나의 뼈와 살이 되었구나. 기억이란 그렇게 뼈가 되고 살이 되어 몸을 이루는 것이구나. 기억이 흐려지는 것처럼 기억이 만든 뼈와 살도 야위어가는가 보다.


배냇짓하던 나를 보시던 어머니의 눈빛을 난 기억할 수 없다. 기억이 사라진 어머니를 바라보는 나를 어머니는 기억할 수 없으리라. 내가 가진 어머니의 기억들은 언제까지 내 것으로 남을 것인가. 가장 나중에 남는 모습의 기억이 늙고 병든이라면, 인생의 형벌은 아닌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것인지 당장은 확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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