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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다섯 번째

비극 속에서의 낙관

by 현정아

‘비극 속에서의 낙관’ 페이지를 열며

오랜만에 도서관에 왔다. 나는 도서관 냄새가 좋다. 여름을 묻히고 들어온 도서관 풍경은 공기부터 다르다. 책 넘김의 고요가 좋다. 고요가 아닌 고요가 낳은 순간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작은 발걸음, 책을 꺼내 보는 눈동자의 또렷한 솜씨, ‘사라라락’ 넘기는 종이마다의 훑어내는 소리가 사람을 집중하게 만든다. 책을 따라가는 시간이 근사해진다. 이 근사의 시간은 비극이 아닌 행운이다. 작은 걸음이 크나 큰 결실이 된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만큼 나와 오롯이 함께 하는 즐거움이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그리하여 알아간다는 재미를 살포시 느끼기에. 삶은 알아가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희망이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을 제한하는 3가지 비극적인 요소
1) 고통
2) 죄
3) 죽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삶에 대해 “예스”라고 대답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 모든 비극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삶이 그 자신의 잠재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p.219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스”라고 대답하는 것’


이 말은 인간이 삶의 부정적인 요소를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창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가 되기도 한다. p.220

예스맨을 호구라 한다. 'YES'라 하면 무시하는 세상이다.

“NO”할 줄 알아야, “NO”를 해야 제대로 된 리더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일상 안에 주어지는 어떤 일들은 하기 싫고 두려운 것들이 존재한다. 그것을 해내는 것 자체가 나의 잠재력을 테스트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것이라 여겨진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해내지는 않는다.


생각이 다르고 상황이 다르지만 내가 맞는 것들은 모두 처음이기에 그것을 넘기 위해서는 비극 속에서의 “YES”를 찾아내 수용하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 필요하다. 나이기에 스스로 행하는 최선이 그것을 만들어간다. 주어진 환경 안에 놓인 삶들에서 나는 어떤 과정을 즐기며 새로운 것을 찾아낼지는 나만이 아는 숙제인 것만 같다.

중요한 것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p.220

낙관이란 비극에 직면했을 때 인간의 잠재력이

1) 고통을 인간적인 성취와 실현으로 바꾸어 놓고

2) 죄로부터 자기 자신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며

3) 일회적인 삶에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동기를 끌어낼 수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p.220

고통은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그것은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다. 고통 안에 잠재된 나를 발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정하기보다 받아들여지는 자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마음가짐의 선택이야말로 성장의 계기가 되리라.


나는 어제와 다르지만 어제가 있었기에 존재하고 또 배워갈 수 있는 것이다. 고통 또한 지나는 것이고 어떤 고통은 넘어선 순간 가벼운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그 안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를 인도할지 생각해 본다. 나만이 가진 열쇠를 풀어낼 단서가 최선이라는 지금과 만나 이끌 수 있는 삶이면 좋겠다. 때론 삐걱거리고 때론 넘어지더라도 다시 열어내는 순간들이 쌓여 단단함을 이룰지니.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함으로써 행복한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p.221


사람이 일단 의미를 찾는 데 성공하면 그것이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힘도 준다. p.222


의미에 대한 지각은 현실에 깔려 있는 가능성을 깨닫도록 만든다.
보다 쉽게 말하자면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일이 행해져야 하는가를 깨닫게 한다는 말이다. p.229


행복이라는 물꼬를 틀려면 내가 행복해져야 한다. 내 생각이 바르고 행복해야 사물이 그렇게 보인다. 작은 순간들의 기쁨이 더 나은 행복을 이끈다. 더러 행복에 연연해 찾기보다 주어진 하루 안에도 감사와 행복이 존재한다. 누군가가 해 주는 한마디 말속에도, 누군가의 배려 속에도, 누군가의 가벼운 인사에도 그것이 존재한다. 행복은 내 곁에 무궁무진하게 열려 있지만 내가 그것을 느껴가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어떤 방법을 통해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사람이 삶이 의미에 도달하는 데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
1) 일을 하거나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통해서
2) 어떤 것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을 통해서
3)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무력한 희생양도
그 자신을 뛰어넘고, 그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p.230


삶의 의미를 찾는데 시련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시련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시련에서
여전히 유용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p.233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
p.233
태도의 선택


태도를 선택할 수 있다니. 내가 행하는 것이 곧 내 선택이다. 마음가짐 또한 그렇다. 시련은 누구에게나 오지만, 애써 시련을 맞을 필요는 없지만 기어코 다가오는 시련 앞에 내가 어떤 마음으로 풀어가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다. 독서는 그래서 인간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마음의 양식임에 틀림없다. 종이 안에 놓인 인생철학을,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문장들을 보듬어가는 일들이 어쩌면 내게 주는 가장 근사한 선물인지도 모른다.


‘시련에 대처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 p.234


삶의 순간들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시간들이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으며,
지나간 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런 삶의 일회성이야말로 우리에게 삶의 각 순간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은 아닐까? p.237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당신이 지금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p.237


“Sed omnia pra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sunt”

그러나 모든 위대한 것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실현시키는 것도 힘들다.
스피노자 <윤리학>의 마지막 문장
p.242

오늘의 독서로 8월의 하늘이 깊고 푸르다. 단단한 여름을 담담하게 보내며 읽고 쓰는 나.


걸어가는 이 길의 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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