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할 땐 룰대로 불리할 땐 내 맘대로?
내가 뛰는 DMV KBL (DC, Maryland, and Virginia Korean Baseball League) 야구 리그에는 투구 제한 규정이 있다. 선수 출신 (고등학교 이후 운동부 - Varsity - 경력이 있는 경우)의 투구는 1이닝만 가능하다는 것. 절대다수가 30-40년의 경력자인 미국 야구 리그와 달리 DMV KBL에선 성인이 된 후에야 야구를 처음 접한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투수를 하고 싶어도 선수 출신과 경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타자 입장에서 선수 출신이 던지는 강력한 공을 상대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실력자들은 때로 이 룰을 아쉬워하기도 하지만 (나만 해도 선수 출신 투수를 상대하는 것이 훨씬 재미있다), 경력자뿐 아니라 초보자들도 야구를 시작하고 즐길 수 있어야 리그 저변이 넓어지고 선수 수급이 쉬워지는 만큼 리그가 세워지고 운영되면서 투구 규제는 늘 존재해 왔다.
2019년부터 상대 선수로 마주치던 K가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아버지와 열심히 연습하는 걸 봐 왔고, 몸이 커지고 실력이 느는 것을 보면서 '학교에서 따로 운동을 안 해도 저렇게 실력이 늘 수 있구나' 생각하며 만날 때마다 격려하고 조언하던 녀석. 그는 올해 고질적인 제구 문제까지 해결하며 그의 팀을 결승까지 끌어올렸다.
3전 2선승의 결승 2차전에서 1점 차로 석패하고 온 날 저녁, 밤늦게 감독에게서 전화가 왔다.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K가 고등학교 때 Varsity 출전 기록이 있네요"
맙소사.... 지난 수년간 몇십 번 리그 게임과 연습게임을 하면서 '너 선출 아냐?' 농반 진반으로 물어봤어도 단 한 번도 긍정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 이게 무슨 소리야? 올해 그는 우리 팀과의 결승전뿐 아니라 3–4위전, 준결승전까지 팀의 대부분의 투구 이닝을 책임졌다. 지난 몇 년간 선출로 등록되지 않은 채로 리그 규정 이상의 투구 이닝을 소화했음은 물론이다. 우리끼리만 알고 넘어갈 사실은 아니었기에 감독은 리그 운영진에 해당 사실을 공유하며 상벌위원회 개최와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했고, 리그는 “K가 올해 던진 경기 전부 실격, 팀은 다음 시즌 선출 영입 제한”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1승만 더 하면 대망의 리그 우승을 할 수 있기에 K의 팀에게는 가혹하다 느껴질 수도 있지만, 공동체가 다음 시즌에도 공정하게 서 있으려면 규칙의 무게를 한 번은 확인해야 하기에 리그 운영진의 결정을 납득할 수 있었다.
내 속을 끓인 건 처벌의 내용이 아니었다. 해당 팀 감독은 '당신들도 K가 학교에서 운동한 거 알지 않았냐 (정작 다른 팀 감독들은 '누구 알았던 사람 있어요?'라는 반응이었다), 약팀이 열심히 해서 처음 결승 갔는데 태클이 너무하다. 어른들 욕심에 애들한테 상처 주지 말자”라며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였다. 나는 이 말을 바로 어제 결승전에서의 그의 태도와 포개 보았다.
선수 한 명이 약간 늦게 나타나 라인업 제출을 몇 분만 기다려달라 했을 때도 “10분 전까지 라인업 제출이 원칙이니 안 오면 그 선수 빼고 라인업 제출하세요.”
마지막 공격에서 우리 팀 선수가 주루 중 종아리 근육이 끊어져 대주자를 요청했을 때, “룰은 룰입니다. 교체 안돼요”
우리는 그 엄격함을 규칙에 대한 존중으로 받아들였고, 부상자는 걷기조차 힘들어하며 3루까지 절뚝이다 다음 플레이에서 더블아웃 당하며 결국 경기는 한 점 차 패배로 끝났다. 하지만 불과 하루 뒤에 본인이 룰을 어긴 것을 지적당하자 승복과 사과 대신 거짓말과 동정표를 구하는 모습이라니? 지킬과 하이드 같은 태도 변화에 몇 번이고 그의 메시지를 다시 읽어야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열심은 면죄부가 될 수 없고, 성인은 본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20대인 K야 팀 운영진이 하라는 대로 했을 테니 크게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50이 넘은 팀 중추인 감독이 책임을 이런 식으로 면피할 줄이야...
야구는 숫자의 스포츠지만 관계의 스포츠이기도 하다. 새로운 규정을 넣을 때도, 있던 규정을 조정할 때도 우리가 믿는 건 규정 자체보다는 같은 규칙을 공유하는 서로다. 내 행동이 내 아이에게 떳떳했으면 하고, 설령 규칙으로 인해 불리해지거나 경기에 패하더라도 아쉬운 미소를 지으며 상대를 축하하고 싶다. 리그의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행동했으면 한다. 부디 이번 사건이 일회성이길, 그리고 추후엔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