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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호 Sep 01. 2021

양파 덕분에 울다

암일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은 날

모양과 위치가 좋지 않습니다. 조직검사를 하려고 해도 자궁을 들어내야 합니다.

출혈 등 이상 징후가 있을 땐 바로 큰 병원으로 가셔서 정밀검사를 받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일 년에 한 번 남편 회사에서 직원의 배우자에게 주는 건강검진을 받아온지 4년 되었다. 첫 검진 때 별거 아니니 일 년에 한 번씩 추적검사해보자던 내 자궁 속 근종은 해마다 커지고 변해갔고,

담당 선생님의 목소리도 변해갔다.


작년부터 1년 추적 관찰 기간이 6개월로 줄어들었지만 따로 병원을 찾진 않았다. 별다른 이상 징후가 없기도 했지만 일주일의 나흘은 8세, 7세, 5세 아이의 엄마로  사흘은 놀이치료사로 근무하고 있는 삶에는 나를 위해 병원에 가는 건 버거운 업무처럼 느껴졌다.

 

작년부터 선생님 목소리에 긴장감이 돌았었는데 이번에는 꼭 병원에 가시라며 당부하시는 모습엔 꼭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 비슷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건강검진을 받은 날에는 부부끼리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아이들과 동행하는 식사자리에선 먹이고 닦이고 닦으면서 어떤 맛인지도 모르고 배를 채우곤 했는데 이런 기회가 주어지면 먹고 싶었던 걸 챙기기도 하고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은근히 기다려왔던 시간이었다.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를 남편에게 전하자,  선생님의 긴장감이 나의 목소리가 되었고 그때야 현실감이 느껴졌다. 아, 내 자궁 속에 뭔가 딱딱한 게 있구나. 어쩌면 나도 할아버지나 고모처럼 몸에 암이 생긴걸 수도 있겠구나.


암일 수도 있다. 내 자궁에 암일 수도 있는 게 있다.

생각만으로 그치고 그 이상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편은 이성적인 사람이었고, 요즘 시대에 조직검사 때문에 자궁을 드러내는 일이 어디 있냐며 일단 예약부터 하자고 했다. 그래야지.


남편과 좋아하는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고 장을 봐오고 하원 하는 아이들을 챙겨 집에 데려다 놓고 여느 일상과 같이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카레를 먹고 싶어 양파를 까고 자르는데 너무 매웠다. 매워서 눈물이 났다. 이상하게 눈물이 너무 많이 났다. 양파를 냄비에 다 넣고도 호흡이 엉킬정도로 눈물이 났다. 둘째 아이가 옆에 와서 "엄마 왜 울어?" 하는데 "어 양파가 너무 매워서 양파가 너무 맵다"하면서도 눈물이 그쳐 지지 않았다.


최근 정신분석 상담 공부를 시작했다. 방어기제를 공부하면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퇴행하기를 두려워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고, 선생님은 내게 "사호 씨 그동안 너무 수고 많았어요. 이제 좀 편안하게 자기를 돌봐주어요"라고 하셨었다. 퇴행의 대표적 사인(sign)은 울음인데, 나는 그동안 남을 위해선 잘 우는 편이었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조금만 슬픈 장면이 나오면 울음을 터트렸지만 나를 위해선 울지 못했었다. 맏이에게 거는 기대감이 높았던 엄마, 완벽주의 성향의 아빠, 요구가 많은 큰 아이, 잘 삐지고 오래가는 둘째 아이, 아직 그냥 아기 같은 막내, 자기 감각에 충실한 남편과 같이 지내기 위해서 나는 건강해야 했다. 실제로 그렇게 많이 아픈 적도 없었다. 나를 위해 우는 시간이라니, 그건 교회에서 기도를 할 때뿐이었다.


슬프고 걱정되는 게 당연한데, 너무 둔해있었던 나에 대한 감각이 양파 덕분에 깨워진 것 같았다. 그렇게라도 울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후련하기도 하고 식욕이 돌기도 했다. 그리고 글을 써야겠다는 의지가 솟았다. 암이라면 얼마나 살 수 있을까를 계산하다 아직 어린아이들에게 엄마에 대해 많은 정보를 남겨주고 싶었고, 엄마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남겨주고 싶었다. 너희를 사랑하지만 엄마도 잘 몰라서 실수를 했었다고 그때 그 일은 너희 잘못이 아니라고 울지 못하는 나 자신 때문이었다고 설명해 주고 싶었다. 엄마가 못 울어서 너희한테도 울지 말라고 했나 보다고, 사랑한다고 그건 사실이라고 글자로 새겨 주고 싶었다.


병과 죽음에 대한 감각이 살아있는 이때, 아이들과의 일을 더 적게 될지, 삶의 통찰을 적게 될지, 그냥 병중 일기가 될지 모르는 이 글에 당신이 함께 있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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