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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육상쟁(骨肉相爭), 형제간 유산 상속 분쟁

원소의 아들 원담과 원상

by 제갈해리

요즘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자식들 간에 부모님의 유산을 서로 상속받으려고 하는 분쟁이 벌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 상속 분쟁 때문에 법적 소송이 일어나기도 하고, 형사 사건까지 벌어지기도 한다. 요즘 세상이 각박해져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원래도 그런 분쟁들이 있어 왔을까.


삼국지연의 안에서 그 내용을 살펴보자. 여기, 형제간 유산 상속 분쟁의 대표적인 주인공들이 있다. 바로, 중국 삼국시대 하북 최대의 군벌 원소의 아들들인 원담과 원상이다.


원담은 비록 원소의 장자였지만, 후에 원상이 태어나고, 첩 유씨 소생의 원상이 원소의 총애를 받게 되면서 백부(죽은 원소의 형)의 양자로 입적되고, 원소의 호적에서 폐출되어 후계 구도에서 일찌감치 밀려난다. 거기다가 원소의 영향력이 평원국의 일부에만 그쳤던 청주자사에 임명되어 권력의 중심부에서 완전히 소외되기까지 한다.

반면, 원상은 형들에 비해 크게 나이가 어렸지만, 원소를 닮은 풍모가 있었고, 용모가 아름다운 미소년이었다 한다. 그리고 사람됨이 대담하고, 강인한 성품이었다 한다.


원소는 평소 이러한 원상의 재능과 용모를 아끼며 총애하고 있었고, 당시 원소의 총애를 받고 있던 원상의 생모 유씨가 원소에게 원상을 거듭 칭찬하는 말을 하며, 원소를 부추겨 마침내 원소는 원상이 장성하면 후계자로 세울 뜻을 품 된다.


서기 202년 5월, 관도에서의 패배로 생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원소가 죽음을 맞이한다. 원소는 후사를 정하지 못하고 죽었는데, 많은 무리들이 원담이 장자라 하여 원담을 옹립하려고 했고, 원담도 이에 호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업으로 향한다. 하지만, 원소가 생전에 원담을 폐출시켜 후계에서 배제시켰던 점과 사실상 원상을 후계자로 공인한 것과 다름없던 점을 생각한다면 원소가 급사했기 때문이었지, 사실상 원상을 후계자로 정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평소 원담과 사이가 나빴던 원소의 참모 심배와 봉기는 유씨와 가까웠고, 원담이 정권을 잡으면 해를 당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원담이 도착하기 전에 원소의 유명(遺命)을 칭탁해 기주를 장악하고, 원상을 옹립해 원상이 원소의 지위를 물려받게 한다. 청주에서 뒤늦게 도착한 원담은 이에 스스로 거기장군이라 칭하고, 군사를 여양에 주둔시키며 시위한다. 이로써 형제간의 골육상쟁이 시작된다.


202년 9월, 조조가 북상해 여양의 원담을 공격해 오자, 마침내 원담은 원상의 정통성을 승인하며, 원상과 화해했고, 원상은 원담을 도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조와 맞섰다. 또한 원상은 주변 세력들을 규합해 조조의 배후 습격을 시도하는 한편, 여양 교외에서 조조와 약 반년에 걸친 대전을 벌였다.


전황은 일진일퇴를 거듭했으나, 203년 3월, 조조군의 총공세에 마침내 패하여 여양성에서 농성하게 된다. 원담과 원상은 조조가 포위망을 형성하자, 이를 저지하려고 하지만 실패했으며, 결국 밤중에 포위를 뚫고 업으로 귀환했다. 조조는 계속 군대를 진군시켰으나, 원상은 오히려 반격을 가해 조조를 격파했다. 결국 조조는 허도로 퇴각하게 된다.


이때, 원담은 패주하는 조조군을 추격해 급습하면 그들을 전멸시킬 수 있다고 원상에게 진언했으나, 원상은 이를 믿을 수 없어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조조가 퇴각한 이후에도 계속 업에 남아있던 원담군에 대한 무기와 병력의 보충을 중단하며, 청주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는데, 후계에 여전히 미련을 가지고 있던 터라 원담은 이런 일련의 조치들에 격노했다. 이에 더해 곽도(郭圖), 신평(辛評) 등의 부추김이 더해지자, 마침내 원담은 군사를 이끌고 원상을 습격하기에 이르나, 오히려 크게 패하여 남피(南皮)로 도망간다.


이미 정통성과 세력에서 크게 밀리고 있던 원담은 원상과 화해하자는 청주 내부의 반대 여론까지 묵살하고, 전쟁 수행을 위해 백성들을 노략질하며, 도적떼와 이민족 무리까지 끌어들여 무리하게 내전을 진행시켰으나. 또다시 원상에게 참패하게 되는데, 이때 원담군의 흐르는 피와 쌓인 시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형주자사 유표(劉表)는 원담과 원상에게 각기 편지를 보내 골육상쟁을 말렸으나, 원담과 원상 모두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원상은 원담의 근거지인 평원(平原)까지 포위하여 원담을 궁지에 몰아넣었으나, 다급해진 원담이 조조에게 항복하고, 조조도 이를 받아들여 여양으로 북상해 오자, 결국 군사를 물려 조조와 대치해야 했다.


204년 1월, 심배와 원상은 원담에게 화해를 요청했으나, 원담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원상은 심배에게 업을 지키게 하며, 직접 군사를 이끌고 원담을 공격했는데, 조조는 원상의 부재를 틈타 재차 기주를 공격했고, 마침내 업을 포위해 심배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204년 7월, 심배의 위급함을 전해 들은 원상은 그를 구원하기 위해 기주로 황급히 귀환했고, 안팎에서 협공하여 조조를 물리치려 했으나, 도리어 크게 패했으며, 부장들의 배신까지 겹쳐 거느린 군사의 대부분을 잃고 단기로 도망쳤다.


원상은 중산(中山)으로 가서 세력을 수습했으나, 병주의 고간은 원상에게 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원상을 배신해 독립하고 칼을 돌렸으며, 재차 원담과 조조의 공격까지 받아 그 세력이 완전히 궤멸되어 원상은 하는 수 없이 유주의 원희에게로 피신했다.


한편, 원담은 조조의 업성 점령과 원상의 패퇴를 틈 타 기주의 5개 군국을 점령하는 등 세력 확대에 매진하면서 야욕을 드러내 결국 조조에게 공격을 받는다. 205년 1월, 남피에 도착한 조조와 싸워 한 번은 조조를 격파해 철수까지 고려하게 만들지만, 이어진 전투에서 격전 끝에 패하고 목숨을 잃는다.


205년 1월, 원희의 부하장수 초촉(焦触)과 장남(張南)이 원희를 배반하고 습격해 유주를 장악하자, 원상은 재차 원소에게 우호적이었던 오환족의 왕 답돈(蹋頓)에게로 달아나게 된다. 원래 조조 진영에서는 완전히 세력을 잃어 한낱 망명자에 불과한 원상을 더 이상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으나, 원상이 답돈의 원조를 받으며 재기할 기회를 노렸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조조에 대한 반란을 사주하며 오환족을 이끌고, 유주 일대를 공격해 피해를 입히는 등 조조의 골칫거리가 된다. 이로 인해 조조의 책사 곽가(郭嘉)는 원상을 위험인물로 평가, 이를 좌시하다가는 조만간 유주는 물론 기주와 청주까지 원상이 되찾을 위험성이 높음을 설파한다.


207년 마침내 조조는 곽가(郭嘉)의 진언을 받아들여 원씨의 재기를 뿌리 뽑기 위해 오환을 공격했으며, 원상은 오환족과 함께 조조에게 맞섰다. 애당초 조조군이 오환의 깊숙한 곳까지 진군해오지 못할 거라 여기고, 마음을 놓고 있던 원상과 오환족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고도(古途)로 급습을 받은 데다가 왕 답돈까지 허무하게 전사해 완전히 와해되기에 이른다. 원상은 기병 수천 기를 이끌고, 요동의 군벌 공손강(公孫康)에게로 달아났다. 그러나, 공손강은 원상과의 첫 회견 자리에서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워 많은 복병을 배치시켜두고 있었다. 결국 원상 형제는 살해되었고, 목은 조조에게 보내져 업의 저자에 내걸렸다.


이처럼 원담과 원상은 서로 아버지 원소의 후계를 이어 하북을 차지하려는 다툼을 벌이다가 원담은 도리어 아버지의 원수인 조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원상은 변방에서 객사하게 된다. 한때, 원담과 원상이 합심했을 때는 조조를 물리칠 수 있었지만, 결국 골육상쟁을 거듭해 조조에게 패배하고 만다. 원담과 원상의 사례는 형제간 유산 상속 분쟁이 초래한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이러한 비극을 초래한 유산 상속 분쟁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요즘에도 일어나는 자식들 간의 유산 상속 분쟁에 원담과 원상의 일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원소가 죽으면서 형제간에 싸움이 일어나기를 바랐을까. 서로 합심해 가정과 나라를 지키기를 원하지 않았을까.


비록 원소는 원담과 원상을 편애해 형제간의 비극을 초래했지만, 설사 부모가 자식을 편애했다고 해서 자식끼리 유산 상속을 다투고, 서로 철천지 원수까지 된다면 그것이 과연 옳은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들에게 삼국지연의는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골육상쟁(骨肉相爭), 형제간 유산 상속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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