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군의 대명사 유선
대학 시절의 일이었다. 당시 나는 '의사소통능력'이라는 교양 과목 강의를 듣고 있었는데, 기말고사 조별 과제로, 도서를 홍보하는 프레젠테이션을 하게 되었다. 우선, 자료를 수집하는 것에서부터 PPT를 만드는 것, 그리고 발표까지 모든 조원들이 협력해야만 하는 과제였다.
나는 PPT 자료를 취합하고, 발표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한 조원이 발표 당일까지 PPT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조원에게 자료를 제출하라고 독촉했는데, 발표 직전인 당일 자정이 되어서야 자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조원이 만든 PPT 자료는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자료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여기저기 허점 투성이었고, 마치 어디선가 복사 붙여넣기한 것 같은 상태였다.
그러나, 발표 당일이 몇 시간 후였기 때문에 내가 마저 조사를 해서 자료를 취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밤새 자료를 찾아 PPT를 완성했다. 이윽고 날이 밝았고, 기말고사 과제 발표 시간이 되었다. 나는 오랫동안 준비한 만큼 자신감 있게 발표에 임했고, 유창한 발표 실력으로 교수님과 다른 수강생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았다.
발표는 그렇게 훌륭하게 마무리되었지만, 나는 자료를 제대로 제출하지 않은 그 조원에 대해서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만일 내가 자료를 좀 더 조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더 낮은 과제 점수를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발표 당일 날까지 과제를 미루다가 당일 날 자정이 되어서 엉망인 자료를 넘겨주다니... 그 조원이 다른 조원들에게 이런 피해를 주는 이유를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너무나 무책임하고, 게을렀던 것이다.
우리 주변을 보면, 무능함으로 주변에 피해를 주는 사람들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회사에서 일하다 보면 중요한 거래처와의 계약이 있을 때, 무능한 팀장이 팀을 잘못 이끌어 계약을 놓치거나 계약이 파기되는 경우를 왕왕 볼 수가 있다. 또, 무능한 부모나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치면 아이들이 되려 잘못된 길로 빠져들기도 한다.
이렇게 무능함은 주변에 크나큰 피해를 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삼국지 속에서 무능함으로 주변에 큰 피해를 준 인물은 누가 있을까. 여기, 무능하고, 어리석어 한 나라를 멸망시킨 인물이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바로, 유선(劉禪)이다.
유선은 삼국지의 영웅 중 한 사람이기도 한 유비(劉備)의 맏아들로, 207년, 형주의 신야에서 출생한다. 출생 당시, 감부인이 북두칠성을 품에 안는 꿈을 꾸고, 태어난다. 208년, 조조가 형주를 공격했을 때, 장판파에서 조조군에 의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지만, 조운의 활약으로 목숨을 건진다. 이후, 계모인 손부인이 동오로 돌아갈 때, 어린 유선을 데리고 돌아가려다가 조운이 손부인으로부터 유선을 탈환해내기도 한다.
유비가 한중왕에 올랐을 때는 세자로 책봉되고, 221년, 유비가 황제로 즉위하자, 태자로 책봉된다. 이릉대전에서는 유비가 성도가 아닌 백제성(영안궁)에 머물러 유선이 대신해 성도를 지키게 된다. 223년, 소열제 유비가 이릉대전에 참패해 실의 속에 병들어 죽자, 유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17세다.
이후, 승상 제갈량에게 국사를 관장하게 하고, 황실의 제사 등 국가 의례와 필수적인 결재만을 담당한다. 234년, 제갈량이 북벌에 실패하고, 오장원에서 병사하자, 상복을 입고 3일 간 애도한다. 그 후, 장완, 비의, 동윤 등의 신하들에게 국정을 맡기다가 그들이 세상을 떠나자, 드디어 친정을 하게 된다.
바야흐로 암군의 시대가 온 것이다. 유선은 그때부터 사치와 향락에 빠지고, 환관 황호를 총애해 촉한의 기강을 문란하게 한다. 결국 환관 황호는 촉한의 정치를 좌지우지하게 되고, 북벌에 실패한 대장군 강유를 대신해 염우라는 무능하고 실력 없는 인물로 대체하려고까지 한다.
이후, 위의 사마소가 대군을 보내 촉을 대대적으로 공격하는데, 위장 등애가 모두가 방심한 틈을 타 요충지인 음평 지역으로 쳐들어온다. 그러자, 강유는 장익과 요화 두 장수를 보내서 양안과 음평 지역을 지켜야 한다고 상소를 올리지만, 유선은 강유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아 그의 요청을 묵살한다.
결국, 등애는 강유관에서 마막을 격파하고, 면죽관에서 제갈첨과 황숭을 전사시키고, 파죽지세로 성도로 쳐들어온다. 이에 촉의 조정에서는 동오로 도주하자는 주장과 남중 7개 군으로 도망치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초주의, 위나라에 항복하자는 의견이 결국 유선의 마음을 흔든다. 유선은 등애에게 항복하고, 등애는 유선의 항복을 받아들인다. 이후, 위나라군의 내분을 틈 타 강유가 촉한 재흥을 위한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강유는 죽고 만다.
유선은 살아남은 가족들과 함께 위의 수도 낙양으로 이송된다. 낙양에서 위의 실권자 사마소는 유선과 촉한의 옛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푸는데, 유선을 위해 옛 촉의 가무를 추게 한다. 그러자, 옛 신하들은 모두 슬퍼하지만, 유선만은 기뻐하고 웃으며, 태연자약한다. 이에 사마소는 어이없어하면서 "저렇게 사람이 무정하니, 촉이 망했을 것이다. 제갈량이 살아 있었더라도 힘들었을 텐데, 하물며 강유는 가능했겠는가?"라고 한탄한다.
그 정도로 유선은 무능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 이런 무능한 인물이 황제 같은 높은 자리에 있으면 그 피해의 여파가 주변, 아니 나라 전체에까지 미칠 수가 있다. 그는 위에 항복해 사마소로부터 안락공이라는 칭호를 받는데, 그는 이름에서처럼 국가의 안녕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더 생각하는, 이기적이며, 무능하고, 어리석은 인물이었다.
이렇게 무능함은 주변 사람들과 사회 전체에 퍼지게 되면 마치 1급 감염병처럼 온갖 피해를 낳게 된다. 주변에 어마어마한 피해를 끼치는 무능함. 사회를 좀 먹는 그런 무능함을 우리는 배척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