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추선생 방통
일찍 죽어 안타까운 인물들 특집 3편으로, 이번에는 봉추(鳳雛)선생 방통(龐統)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방통은 자는 사원(士元), 형주 남군 양양현 사람으로, 어린 시절에는 순박하고 둔해 알아봐 주는 이가 없었는데도 삼촌인 방덕공만은 그를 중하게 여겨 봉추(鳳雛:새끼 봉황.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 재주가 무척 뛰어난 훌륭한 인재)라 칭한다. 18살이 되어 방덕공과 친밀했던 영천의 사마휘에게 평가를 받으러 가서 그와 밤새 대화를 나눈다. 사마휘는 방통을 높게 평했고, 후에는 점차 이름이 알려져 남군에서 공조(功曹:하급 관원들의 임용을 관장하고 근무실적을 평가하는 인사 담당자)로 복무하게 된다. 방통의 성정은 사람을 견줘보는 것을 좋아하고 인재를 길러서 양성하는 데 부지런했는데, 이로부터 인물평의 대가로 널리 알려진다.
유표 밑에서 공조 일을 수행하다가 주유가 남군태수가 되자, 주유의 휘하에서 일하게 되고, 주유가 죽자, 상여를 운구해 오에 이르는 역할을 맡는다. 그가 오를 떠날 때, 육적, 고소 등 오의 관료 다수가 그를 방문할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유비가 형주를 다스리게 되고, 남군이 유비의 소유가 되자, 방통은 유비의 부하가 되는데, 유비는 처음에 방통을 종사로 삼고, 계양군 뇌양현의 현령을 맡게 한다. 그러나 현에 있으면서 제대로 다스리지 않아 얼마 지나지 않아 면직된다. 그때, 동오의 노숙이 유비에게 이런 내용의 서신을 보낸다.
"방사원은 사방 백리를 다스릴 재주(百里之才)가 아닙니다. 치중, 별가(주목의 보좌관 중 으뜸 가는 벼슬) 등의 임무를 맡겨야 비로소 그 뛰어난 재능을 충분히 펼칠 것입니다."
제갈량 역시도 자신보다 방통의 재주가 더 뛰어나다고 말하며 방통을 추천한다. 이에 유비가 방통을 만나 얘기를 나눠보고, 크게 평가해 치중종사로 삼는다.
얼마 후, 장송이 유비에게 입촉할 것을 제안해 유비가 망설이고 있을 때, 방통이 유비를 설득한다.
"형주를 황폐해져 사람과 물자가 고갈되었고, 동쪽으로 오의 손권이 있고, 북쪽으로 조씨가 있어 곤란합니다. 지금 익주는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강성하여, 호구수 백만에 사부 병마로 나오는 바가 잘 갖춰져 있으니, 지금 임시로 빌려 대사를 정할 만합니다."
그러자, 유비가 말한다.
"지금 내게 있어 물과 불 같은 관계에 있는 자가 조조요. 조조가 급하면 나는 너그럽고, 조조가 사나우면 나는 인자하고, 조조가 속이면 나는 충직했으니, 매번 조조와 반대로 하여 일을 이룰 수 있었소. 지금 사소한 이유로 천하에 신의를 잃는 것은 내가 취할 바가 아니오."
이에 방통이 대답하길,
"역리로 취하되, 순리로 지키어 의리로 보답하고, 대사가 이룬 뒤, 대국(大國)에 봉해 준다면 어찌 신의에 위배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취하지 않으면 끝내 남을 이롭게 할 뿐입니다."
라고 한다. 이에 유비가 마침내 그 말을 옳게 여겨 행한다. 제갈량은 남아서 형주를 지키고, 방통은 유비를 수행해 촉으로 들어간다.
유비가 촉으로 들어가 익주목 유장과 광한군 부현에서 만난다. 이때, 방통이 유비에게 계책을 올린다.
"지금 이 모임을 틈타 유장을 붙잡는다면 장군께서는 용병의 수고로움 없이 앉아서 한 주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유비가 대답한다.
"이제 막 다른 나라로 들어와 은혜와 신의를 아직 드러내지 못했는데, 그리 할 수는 없소."
결국 유비는 방통의 계책을 거절한다. 유장이 성도로 돌아간 뒤, 유비가 유장을 위해 북쪽으로 한중을 정벌하려 하니, 방통이 상중하책을 들면서 다시 유비를 설득한다.
•상계(上計): 은밀히 정병을 뽑아 밤낮으로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가 곧바로 성도를 습격하십시오. 유장은 굳세지 못한 데다 또한 평소 대비가 없어, 일거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중계(中計): 양회, 고패는 유장의 명장으로 각각 강병들을 거느리고 관문을 점거해 지키며, 듣기로 여러 차례 유장에게 장군을 형주로 돌려보내라고 간언했다 합니다. 형주에 위급한 일이 있어 되돌아가 구원하려 한다고 하며 되돌아가는 것처럼 하십시오. 이 두 사람은 장군이 떠난다는 것에 기뻐하여 필시 경기병을 타고 만나러 올 것이니, 장군께서 이 틈을 타 그들을 붙잡고 진격하여 그 군사를 차지하고, 이내 성도로 향하십시오.
•하계(下計): 백제(白帝)로 물러나 형주와 연결하고 서서히 돌아와 도모하는 것입니다. 만약 망설이며 거행하지 않으면 장차 오래지 않아 큰 곤란을 겪을 것입니다.
이에 유비는 중계를 옳게 여겨 양회, 고패를 참수하고, 군사를 되돌려 성도로 향했고, 지나는 곳마다 번번이 승리를 거둔다.
유비는 파죽지세로 진격해 광한군 낙현을 포위한다. 방통은 군사를 이끌고 성을 공격하다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으니, 그때 나이 35세다. 유비가 몹시 애석하게 여겨 그를 말할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방통은 형세가 불리해도 주군의 뜻이 완고하다면 쉽게 거스르지 못했던 제갈량과는 달리, 조운, 법정처럼 아닌 건 아니라고 확실히 말하여 주군을 제지할 수 있는 강직함과 올곧은 성정을 지녔다. 이 덕분에 유비는 방통을 제갈량에 버금갈 정도로 후하게 대우했다.
또, 제갈량이 정석을 기반으로 한, 완벽하게 승리할 수밖에 없는 정파 같은 전략을 세웠다면, 방통은 대담하고 훨씬 유동적인 상황 변화에 따른 전략을 세우는 데 능해 사파 같은 전략을 많이 세웠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방통을 이렇게 평한다.
방통은 평소 인재를 견줘보는 것과 경학(經學), 사모(思謨: 모책을 생각함)를 좋아하니 형, 초 땅에서 그를 고준(高俊: 높은 준걸)이라 일컬었다. 위나라 신하에 견주자면 방통은 순욱의 중숙(仲叔: 형제, 막상막하)이고, 법정은 정욱, 곽가의 주려(儔儷: 견줄만한 짝, 동류)이다.
만약 방통이 낙성 전투에서 유시에 맞아 전사하지 않고, 더 오래 살았다면 삼국시대의 판도는 많이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촉나라의 역사는 많이 바뀌어 있었을 것이다. 유비가 형주의 관우를 잃을 일도 없었을 것이고, 이릉대전에서 참패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북벌이 애석하게 실패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방통은 유비에게 있어, 인재가 많지 않은 촉한에 있어 정말 뼈아픈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삼국 중 최약체였던 촉이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 그리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초한지의 장자방처럼 뛰어난 책략가이자, 위나라의 순욱처럼 대국적인 전략가였던 봉추선생 방통. 그의 명복을 빌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