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 맘 때는 참 아스란하기도 하고, 제법 운치가 있기도 한다. 아직까지 꽤나 멋들어진 단품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제 제법 아니 꽤나 바람이 차다. 그럼에도 애매하기도 한 것이 꽤나 두꺼운 옷을 꺼내어 입기엔 아직 한낮의 햇살은 아직 온기를 품고 있다는 점이다.
옷 장사를 하는 나는 이 시기가 참 바쁘다. 여전히 얇은 옷을 찾는 사람들부터, 바지런하게도 두터운 외투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다양하다. 나는 신상을 준비하면서도 지난날 재고를 정리하기 위해 골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사이즈 단위가 많은 아동복은 재고를 남기지 않는 것이 성공의 기준이다. 재고가 쌓이는 건 앞으로 남기고 뒤로 밑지는 형국이다. 남 좋은 일만 시키는 일이다. 재고를 정리하다 보면 지난해가 아닌 지지난 해의 옷들도 보이다. 그런 옷을 찾을 때마다. 내가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이 거리도 예전 같지가 않다. 한때는 카페거리로 꽤나 유동인구가 많았다. 넓은 길에 차도 없고, 조경과 벤치도 곳곳에 있어 산책 겸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사람들과, 신혼부부들이 꽤나 많았다. 한때는 매장에 쏟아지는 손님들로 걸음을 옮기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날은 너무도 기분이 좋아 cctv를 캡쳐해 두고는, 두고두고 히죽거리며 보기도 했다.
백일 화려한 꽃이 없다고, 이런 거리도 서너 블록쯤에 새로운 쇼핑센터가 들어서자 썰물 빠지듯 사람들이 빠져나가 버렸다. 이제는 주말을 빼면 그저 자리 나 지키고 있는 정도였다. 사람을 구경하기도 어려웠다. 한 번 생기를 잃은 거리는 금세 표가 났다. 어쩌다 들어오는 손님도 그저 한 바퀴를 휘익하고 둘러보고는 문 밖을 나서기 일쑤다. 옆 사람이 고른 옷이 예뻐 보이고, 옆 사람이 기분 좋게 득템한 얼굴로 옷을 사야, 사지 않으면 손해 보는 것 같은 것이 판매 노하우이건만, 한가한 매장에 홀로 들어온 손님은 영 텐션이 낮다. 사도 그만 안 사도 그만인 표정이다. 나도 영 흥이 나지 않으니 또 고객도 심드렁하다.
'아구구 벌써 점심 때냐.. '
시간은 점심시간을 지나버렸고, 나는 아직까지 포스에 개시를 찍어내지도 못했다. 거리에는 지나다니는 손님이 보이지만 테이크아웃 커피 하나씩 들고 다니는 폼이 점심을 먹으러 나온 주변의 회사원이다. 내게는 그다지 반갑지는 않다. 간혹 급하게 옷을 찾으러 오기도 하지만, 정말 필요할 때 아니면 저들은 이곳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기운 좀 내 보고자 으라차 기지개를 켠다. 찌뿌둥한 허리며 어깨를 돌려보고, 단단히 맨손체조도 해본다. 금세 몸이 더워지고 혈기가 도는지 볼이 달아오르는 느낌도 난다. 좀 정신이 든다. 뿌드득 소리를 내는 허리를 풀고는 으쌰 으쌰 파이팅을 한다. 재고 정리라도 해 세일 상품을 정리해 놓아야 한다. 주말에 미끼 상품에 이만한 것도 없으니, 아까워 보여도 그래야 사람들이 들어온다는 것을 안다.
'음??' 분명 저장되어 있는 번호라 발신자 이름이 뜨는데 누군지 잘 모르겠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시간이 지나 동생 친구란 걸 기억해 내었다. 이런 전화는 안 받으면 괜히 찝찝함을 털어낼 수 없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지만 전화를 받았다
"어~ 민수야 오랜만이네.."
"예 형님 저기 혹시 성준이 만나셨어요?"
"성준이? 언제? 얼굴 보지 꽤 되었는데... 명절에 보고 못 봤나?"
"저 형님... 여기 성준이 집인데 한 번 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성준이네? 왜 무슨 일 있어?"
분명 어딘가에서 줄창 술을 마시고는 아직 못 일어난 것일 것이다. 어쩌면 구급차를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지병이 있는 걸 알면서 성준이는 술과 담배를 멀리하지 못했다. 술도 꽤나 마셨고, 담배도 곧잘 피웠다. 이제는 머리가 컸다고 협박이 통하지 않는다. 뭐라 해 봐야 서로 마음만 상해 등을 돌리기 일쑤기에 이제는 한 두 마디 정도 건네고는 싫어하는 표정이라도 보이면 금세 입을 닫고는 말을 돌린다. 오늘도 그런 일이겠다.
"민수야 급한 일이야?"
".... 저 형님... 그게"
이 새끼가 무슨 생각인 거지? 지금 뭐 하자는 일인지 도무지 감이 오지가 않는다. 한낮의 도로는 막힘이 없었다. 점심을 거른 탓에 배에는 꼬르륵 거리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당이 떨어졌는지 정신도 멍하다. 이 멍한 정신이 혈당 때문인지 성준이 새끼 사고 친 것 때문인지 모르겠다. 일단은 성준이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틱. 틱. 부싯돌이 빠진 건지 라이터는 소리만 거창할 뿐 불꽃을 튀우지 못했다. 몇 번 반복하다 짜증이 뻗쳐 조수석에 라이터를 던져 버렸다. 에잇... 진짜.. 이 새끼는 정말 뭐 하자는 거야.. 아 정말 민폐다 민폐야..
민수가 전화로 대강 상황 설명을 해 주었다. 듣는 동안 내 얼굴이 화끈 거리며 창피했다. 무단결근을 했고, 회사 동료에게 연락을 받아 성준이 집에 와봤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이 녀석 무슨 생각으로 회사를 다니고 있었던 건지. 창피했다. 내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이런 사원이면 진즉에 잘라야 했다. 그래야 정신 차린다. 아니면 오히려 회사에 독이다.
민수는 성준이의 고등학교 동창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꽤 오래도록 붙어 다니고, 대학 때는 거의 함께 살다시피 시간을 보내온 녀석이다. 성준이의 가장 밑바닥까지 아는 녀석은 그 녀석밖에 없지 않을까? 아마 내가 모르는 성준이의 모습도 민수는 꽤나 깊이 알고 있을 것만 같다. 아니 나는 애당초 성준이에 대해 많이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해 서른세 살인 성준이는 24년을 싸워왔다. 지겹게도 참 독하게도 싸우며 살아온 서른세 살이었다. 그렇게 싸우면서도, 이기는 날도 없이, 매일을 넘어졌다 다시 일어났다. 어쩌면 싸웠다고 말하기도 어렵겠다. 한 방 맞고 넘어졌다 그저 다시 일어나 꾸역꾸역 다시 살아왔던 것뿐이니까. 우리는 그 싸움을 한 번도 제대로 이겨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내 싸움이 아니라 여기며 살아왔었는지 모른다. 나는 안타까운 척을 하는 방관자였는지 모른다.
그날도 성준이의 집에 가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민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들었지만, 이 녀석 또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라 여겼고, 엉뚱한 해프닝쯤으로 끝나버릴 거라 장담했다. 그게 그리 쉬운 일인가? 그런 배짱이면 살 길을 찾을 것이지. 문제가 해결이 되냐 속으로 되뇌며 차를 몰았다.
성준이의 집에서도 민수를 만나고 상황을 이해하고, 문제가 생겼음을 인지했지만, 믿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할 것이라 자신을 했다. 불쌍해 보이려 쑈를 하고 있다고, 그러면 가족들이 해결해 주겠지 하는 생각일 거라고 여겼다. 며칠이 지나면 실없는 웃음으로 헤헤 거리며,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오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우리는 큰일이 있지 않으면 얼굴을 볼 날이 많지가 않다. 전화는 한 달에 한번 고작 할까 말 까다. 형제지만 친구보다 못한 사이였다. 성준이를 보내고 나서 크게 일상에 변화가 오지 않았다. 나는 그전에도 동생의 얼굴을 보고, 통화를 하는 것이 년 중 행사 정도였기에 지금 당장 무엇하나 달라진 게 없었다. 그래서 다들 그렇게 사는 것이라 생각했다. 누군가를 잃어도 일상은 변하지 않는구나. 하고 그렇게도 살았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일은 아니다.
나는 그 후로 오랫동안 힘들어했다. 미안함에 죄책감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음에
가볍다 여겼음에
나는 오래도록 후회하며 살아야 했다.
우리 사이는,
그 흔한 드라마처럼 뜨겁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냉랭한 남남처럼 외면한 것도 아니었다.
애매한 거리.
툭툭 말을 던지고, 괜히 티격태격하고,
서로를 챙긴다기보다는
그저 ‘있으니까 있는’ 사람처럼.
나는 그렇게,
형제라는 말에 안심하고 살았다.
다정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믿었다.
언젠가는 말하겠지.
언젠가는 웃겠지.
언젠가는 술 한잔 기울이며 서로를 이해하게 되겠지.
그 ‘언젠가’는
생각보다 빨리 사라졌다.
그날,
네가 떠났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니,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설마”라는 말만 되뇌다가,
얼어붙은 채로 침대 끝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곧 밀려온 건,
거대한 ‘후회’였다.
왜 그렇게 자주 짜증을 냈을까.
왜 마지막 생일에 전화 한 통 안 했을까.
왜, 아무것도 몰랐을까.
왜 그렇게 무심했을까.
왜… 단 한 번도 너에게
“힘들지 않냐”고 물어본 적이 없었을까.
우리 사이엔
“사랑한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없었다.
심지어 “미안하다”는 말조차
자존심 앞에서 늘 삼켜졌다.
그건 어쩌면
‘영원히 볼 수 있다’는
어리석은 착각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너는 조용히 떠났고,
나는 그 조용함에 짓눌려
수년을 살아야 했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시간은 괜찮음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또렷한 괴로움을 주었다.
그날, 마지막으로 네가 보낸 메시지를
아직도 지우지 못한 채
나는 가끔 그 말을 곱씹는다.
"형, 그냥… 잘 지내."
그 '그냥'이라는 말속에
얼마나 많은 마음이 있었는지,
나는 네가 없어진 뒤에야 알았다.
살갑지 않았던 그 시간이,
사실은 다정하지 못했던 내 시간이었다는 걸.
그리고 이제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용서를 구할 수 없다는 걸.
형이라는 이름은
생각보다 무겁고,
생각보다 오래 아프다.
나는 지금도
조금 더 다정했더라면,
그 하나의 바람을 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