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세상을 등진 가족을 지닌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내게도 이런 피가 있지 않을까? 나일 수 도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우리 가족이 그런 부류인건 아닐까.
나의 외조모는 한창 때의 아들을 잃었다. 그 아들의 큰 아이가 갓 스물이 되던 해. 머리속의 폭탄이 터져버렸다. 평생 겪어보지 못한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큰 병원 응급실을 찾았던 외삼촌은 다시 걸어 나오지 못하셨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는 작은 아들을 잃었다. 평생을 불안함과, 미안함에 싸우셨던 어머니는 막내 아들의 마지막 선택을 막아낼 수 없었다.
그럴 팔자인걸까?
이런 시대에 팔자를 운운하는 것도 이상하고, 인간의 길흉화복이 정해진 것도 아니라는데. 어머니와 할머니 그들의 삶에 자식을 먼저 잃어야만 했던 까닭이 있었을까? 괜히 팔자탓을 하고 싶다.
팔자라는 건 참 편하다. 잘되든 못 되든 넌 그럴 운명이었다는 결정론적 사고. 내가 어려움에 처한 것도, 내가 성공한 것도 그렇게 정해져 버린 삶이라는 것은 참 비겁하지만 편하다.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의문이 사라진다. 이런 생각이 순간의 마음이 편해질지는 모르겠지만, 발목을 잡는다. 그 수렁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다. 아니 방법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그럴 팔자라는데 내 힘으로는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는다.
나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우리 집안은 이런 팔자를 타고 났으니까.
운명론적인 사고는 현실이 꽤나 평안하게 다가온다. 지금의 고통과 불편이 당연히 거쳐야 하는 것이기에 수용하는 것이 최선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기독교의 교리도 어쩌면 운명론적 사고 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우리는 죄인이니까. 감당해야만 하는 몫인게다.
이런 부정적인 사고는 대부분 삶에 있어 취약한 시기에 인간의 마음속으로 파고든다. 현실의 고통을 직시하기보다는 외면하고, 옆으로 미뤄두고, 잠시 눈을 돌리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 그 순간 천천히 스며든다. 때로는 현실의 고통을 경감시켜주기도 하고, 죽을 듯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강력한 진통제와도 같아 끊어내기가 힘들다. 점점 더 익숙해지고, 많은 양이 필요해진다.
운명론적인 사고가 긍정적인 쪽으로, 낙관적인 쪽으로 작용한다면야 더 할 나위 없이 바람직한 일이 될 수 도 있다. 나는 성공할 사람이고, 나는 이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다. 내 운명의 끝은 찬란한 성공과 평안이 될 것이다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운명론만큼 달콤함도 없을 것이다.
두 가지 생각의 차이점은 현재의 상황이 중간인지, 최종 스테이지인지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지금이 과정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최종의 결과에 대해 무엇을 개선해야 할지, 또는 운명적으로 어떻게 바뀌게 될런지에 대한 문제점과, 희망을 가진다. 아직 결론이 지어지지 않은 일이기에 그 마지막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내가 성공하리라는 운명에 대한 기대가 강한 노력으로 이어지지 않을 지 몰라도, 최소한 지금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쯤은 인식하고 살아간다. 그래도 희망은 품고 사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 최종 단계라 믿는 사람은 더 이상의 개선점을 찾아 낼 수 없다. 이미 레이스는 끝이 났고, 시상식은 벌어졌으며, 나는 메달을 따지도, 완주하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바꿀 수 가 없는것이다.
팔자라는건 지금 내 삶이 최종 단계에 다다랐다고 믿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다.
나는 그런 팔자야.
내 팔자가 그렇지
이런 말 버릇을 달고 사는 사람은 은연중에 자신의 레이스가 끝났다 믿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팔자라는 건, 결국 지금의 삶이 어디쯤에 와 있는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말인지도 모른다.
마치 인생이라는 레이스가 이미 끝났다고, 시상대 위에 나란히 서지 못한 우리는 이제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마음.
그래서 우리는 “내 팔자가 그렇지”라는 말로, 마치 출발선조차 없었던 듯 삶을 접어두곤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말에는 희망의 뒷면이 늘 따라붙어 있다. ‘나는 그럴 팔자야’라고 말하는 사람도, 사실은 그게 아니기를 바라는 사람들 아닐까. 달라지고 싶지만 너무 오랫동안 아파왔기에,
이제는 그렇게 말하는 편이 차라리 마음이 편해서.
그러니 그 문장 끝에 아주 조심스레 하나만 덧붙여 보자.
“나는 그럴 팔자야.”
“…하지만 단지 지금뿐일지도 몰라.”
팔자든, 운명이든, 그 어떤 말로든 나를 설명하는 일이 중요할 수는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지금’이라는 순간의 위치를 정확히 보는 일이다. 우리는 어쩌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중간 어딘가를 지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지금의 고통이 마지막이 아닐 수 있다는 것, 그 생각 하나만으로도 삶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이건 팔자에 맞선 싸움이 아니라, 팔자라는 이름 아래 놓여 있는 나의 ‘지금’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다.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나도 모르게 ‘끝’이라 믿어버린 어떤 시간에서, 다시, 시작을 떠올리는 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