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말했다. 삶의 변곡점은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완벽한 순간에 도달한다고. 모든 것이 정상적이라 여기는 순간. 우리 삶의 방향을 바꾸는 문제가 고개를 빼꼼히 내민다고 했다. 누구는 신의 계획이라, 누구는 악마의 덫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의미없는 우연이지만, 무언가 이유를 만들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일이라 생각되어야 받아들이기도 수월해진다. 우연은 이유가 없지만, 이유가 없다면 우리는 질문을 멈출 도리가 없다.
- 자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윤성은 오늘도 매일처럼 스탭들에게 밝은 인사로 준비를 마쳤다. 이미 뉴스의 스크립트를 확인했고, 프롬프트 역시 확인을 마쳤다. 수어로 표현할 수 없는 신조어는 최대한 쉬운 설명으로 대체할 동작들을 준비 마쳤다. 오늘의 메인 뉴스는 어느 연예인의 음주 운전 대국민 사과의 내용이다. 최근 높은 시청율을 기록한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으로, 인기의 대열에 올라탈 예정이었던 젊은 배우가 종방 뒤풀이에서 음주 운전이 적발되었다. 늘 그렇듯 여론은 순식간에 차갑게 돌아섰고, 호감형 캐릭터로 국민 남친 이미지를 담당할 예정이었던 그는 CF며 팬사인회며, 예정되어 있던 모든 행사들이 도미노 무너지듯 취소되었다.
윤성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터라 배우의 음주운전이 안타까웠다. 그간 오랜 무명을 묵묵히 견뎠고, 그 열정을 옆에서 보아왔기에 자신의 일인듯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연은 안타까웠지만 윤성에게 일은 일이었다. 윤성은 나즈막히 '그러게 성공 바로 앞에서 이게 무슨 일이냐. 지 팔자 지가 꼰거야' 하고 본인만 들을 수 있게 중얼거렸다.
- 생방 1분 전입니다.
인이어를 통해 PD 의 라스트 콜이 들어왔다. 데스크의 아나운서가 물을 한 잔 마시고,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을 때 윤성은 아이처럼 손을 쥐고 펴기를 반복했다. 첫 문장의 대사를 다시 한번 손으로 되짚어 보았다.
- 자 방송 5초전, 스탠바이 셋! 둘! 하나! 큐!
타이틀 음악이 플레이되고, 오늘의 뉴스 꼭지들이 자막으로 브리핑 된다. 앵커는 첫 문장을 다시 짚어가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 오늘 배우 A 씨가 기자 회견을 발표했습니다. 지난 3일 높은 시청율을 기록한 드라마의 종방연을 마치고 자택으로 돌아가는 길, 배우 A씨는 혈중 알콜 농도 0.128의 만취 상태로 약 5Km 운전한 혐의로 경찰에 적발되었습니다.
윤성은 앵커보다 반 숨이 지날 때 부터 수어로 해당 내용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벌써 8년차의 베테랑으로 몇 년째 저녁 뉴스의 메인 수어통역사로 일하고 있었다. 뉴스 오른쪽 하단 작은 동그라미 안이 윤성의 공간이다. 일반 사람은 앵커의 표정과 목소리 그리고 자료 화면을 보느라 윤성에게 관심이 없지만, 어떤 이들에게 윤성은 세상의 소식과 자신들을 연결해 주는 존재다.
그들에게 윤성의 수어는 정확하고, 이해하기 쉽다는 평가가 많다. 현실의 세상에서 그들은 조용한 존재들이지만, 커뮤니티 안에서 윤성은 꽤나 인기 있다. 매일 방송이 끝이나면 윤성의 수어 덕분에 오늘도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잘 접했다는 응원글들이 윤성의 SNS 에 달리곤 한다. 윤성의 SNS는 꽤나 시끌벅적하다. 그들은 소리를 잃었다지만, 세상과 단절된 존재가 아니다. 그저 소통의 방식이 다른 사람들일 뿐이었다.
윤성은 인이어의 멘트에 집중하며, 템포를 조절하고 있었다. 오늘도 윤성의 손은 물흐르듯 매끄럽게 뉴스를 전달하고 있었다.
- 툭!
갑자기 귓속에서 툭 하고 아주 작은 파열음이 스쳤다. 그와 함께 인이어를 낀 윤성의 오른쪽 귀에서 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듯, 깊은 물속으로 가라 않는 듯 앵커의 뉴스가 먹먹하고, 깊게 울리기 시작했다. 또렷하고 명료하게 들리던 앵커의 멘트가 어색해졌다.
순간 윤성은 앵커의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아, 발음이 새는 거라 착각을 했다. 하지만 앵커의 한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윤성은 앵커가 아닌 자신에게 문제가 발생한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먹먹해진 오른쪽 소리와 함께 왼쪽귀에서는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노래방 마이크 두개가 가까워지면 스피커에 울렸던 그 '삐~'소리가 왼쪽 귀에서 시작되었다.
'이명이라는건가?' 윤성은 생각했다.
어지러움과 함께 식은 땀이 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생방송이었다. 윤성은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표현하지 않으려 애썼다. 뉴스가 얼마 남아 있기 않을 것이었다.
윤성은 곁눈질로 프롬프트를 훔쳐보았다. 이제 몇 문장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제껏 프롬프트보다 앵커의 멘트로 타이밍을 잡아왔다. 윤성은 소리 대신 눈으로 프롬프트를 쫓으며 타이밍을 잡았다. 내용은 모두 외우고 있지만 수어가 뉴스를 먼저 앞지를 수는 없었다.
프롬프트의 마지막 말 "깊이 사과드립니다."라는 멘트에 앵커의 입모양을 보면 타이밍을 잡았다. 입모양이 ㅅ 에서 "과"로 넘어갈 때 윤성은 가슴으로 손을 끌어안고, 정중한 고개 숙임으로 이야기를 전했다. 아슬아슬하게 타이밍을 맞춘 것 같았다.
- 윤성씨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역시 깔끔해
인이어로 뭉개진 피디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가 낯설었지만, 인이어의 주인공이 누군지는 잊지 않고 있었다. 윤성은 티내지 않기 위해 식은 땀을 훔치며 유리너머 피디와 눈을 맞추고 목례로 인사를 했다.
- 네 고생하셨습니다.
윤성은 본인의 목소리마저 낯설게 느껴졌다. 윤성은 남들 모르게 방송을 마쳤다.
- 돌발성 난청입니다. 여기 달팽이관 위쪽의 이부분의 기능이 저하된 거라 보시면 되요. 아직 뚜렸하고 직접적인 원인은 규명되지 않지만, 바이러스나, 혈류 장애, 자가면역질환 처럼 여러가지가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대부분 특별한 원인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빨리 치료를 시작하면 회복될 확률도 높아지니 서둘러서 치료를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윤성은 의사의 말들이 100%로 이해되지 않아 몇 번이나 되물었다. 생각해보지 못한 질병에 당황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천천히 들어보면, 설명이 제대로 들리지 않아 중간 중간의 문장이 빠진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못 듣게 될 수도 있다고? 내가?
진료를 마치고 대기실에 앉아 있는 윤성은 병원 벽보다 더 하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평생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야기를 대신 해 주는 삶을 살아왔기에 이런 상황에 익숙하다고 생각했지만, 윤성 자신이 소리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상황에 놓이게 되자, 누구보다 그들을 잘 알고,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선적이었는지 깨달았다. 윤성은 들리지 않는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어느 하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