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 쿵! 쿵!"
수인은 조금 더 힘을 줘서 손님의 방문을 두드렸다. 세 번이나 노크를 했는데 대답이 없음에 조금 고개를 갸웃거렸다.
- 저기... 노크가 좀 공격적인 거 같은데?
손님은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냈고, 수인은 '벌써 세 번이나 노크하고 불렀잖아요.'라는 말을 애써 삼키며 말했다.
- 아... 저녁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씀드리려고요. 식탁에 준비되어 있어요. 식사하세요
윤성은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지금 밥을 먹지 않으면, 이 동네에서 간식이며 야식은 꿈도 꾸기 어려울 것 같아 말없이 식탁에 앉았다. 망쳐버린 옷 때문에 짜증이 솟구치기는 했지만, 허기도 밀려오고 있었다.
- 오빠. 저 사람 좀 별론데?
- 왜?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나?
- 아니 내가 세 번이나 노크하고 문 앞에서 불렀는데 대꾸도 없길래 조금 크게 방문을 두들겼더니, 나보고 공격적이라고 뭐라고 해. 내가 뭘 어쨌다고, 자기가 못 들어 놓고는 괜히 승질을 내잖아.
- 아니 아까도 오자마자 내가 뭘 물어봐도 대꾸도 잘 없고, 산책 전에도 내가 분명히 오른쪽길로는 가지 말라고 말했거든. 그래놓고는 아까 넘어지고 우리 보고 말 안 해줬다고 뭐라 했잖아. 좀 별로야. 성격이
- 그치? 오빠가 말을 안 했을 리가 없어. 뭐야 저 사람? 사람말을 제대로 듣지를 않아. 그래놓고는 되려 짜증이나 내고 말야. 재수 없어.
윤성이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는 동안 스탭 룸에서는 윤성의 뒷담화가 사과새싹 마냥 돋아나고 있었다. 윤성은 생각보다 저녁식사가 마음에 들었다. 혼자 살아온 후로 대부분 식당이나, 술자리로 저녁을 해결했기에 오랜만에 가정식 차림이 마음에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밥과 국은 물론 거의 대부분의 반찬을 싸악 비워낸 후였다. 배가 부르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았다. 허기짐에 감정도 더 예민해진 건 아닌가 살짝 걱정이 되기까지 했다.
'왜 그렇게 세게 방문을 두드린 거야. 괜히 짜증나게시리. 그래도 내가 좀 싸가지 없게 말했나? 이따 슬쩍 미안하다고 할까? 혹시 내가 못 들었던 건가? 또?'
윤성은 여자 스탭에게 사과를 할까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못 들어 또 이런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과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은 두려움에 우울해졌다. 처음 겪는 상황에 당황스럽기는 윤성도 마찬가지였다.
"못들었다라.... 못 듣는다.. 라... 내가?"
윤성은 갑자기 목덜미가 싸늘하게 느껴졌다.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고개를 돌리는 거실문이 열려있었다. 열려있는 거실문을 바라보았다. 거실 밖 마당에서는 남자 스탭이 화로대에 장작을 쌓아두고 있었다. 여자 스탭은 화로대 주변에 캠핑의자 세 개를 놓아두고, 작은 테이블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아까 입실할 때 설명했던 불멍인 모양이다. 윤성은 아까의 행동에 어떻게 사과도 할 겸 마당으로 내려갔다. 조금 쭈뼛거리며 수인에게 말했다.
- 저... 저도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을까요?
- 그럼요. 여기 의자도 손님이 앉으실 자리예요. 식사는 괜찮으셨어요?
- 네.. 잘 먹었어요. 요리 솜씨가 좋으세요.
- 저녁은 저기 해진 오빠가 차린 거랍니다. 저는 주로 청소! 요리는 잘 못해요.
- 아.. 네.. 저녁 잘 먹었습니다.
윤성은 해진에게 인사를 건넸고, 해진은 연기에 콜록거리며 윤성에게 목례로 답했다.
- 저기 제가 해 봐도 될까요?
- 불 피우는 거요? 요 며칠 장작이 젖어 불이 잘 안 붙는데... 한 번 해 보시겠어요?
- 한때 캠핑이 취미였어서.. 이런 거 좋아해요
윤성은 해진보다도 능숙하게 장작을 쌓아 올렸고, 불길이 솟아올랐다. 제법 커진 불길에 연기는 잦아들고, 따스한 색의 불꽃이 주변을 감싸주었다. 해진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 작은 농담을 던졌다. 잘 익은 불길에 어색함이 조금 수그러 들었다. 분위기도 불빛 마냥 따스해지는 느낌이었다.
세 사람은 모닥불 곁에 둘러앉았다. 수인이 내린 커피는, 지금 분위기에 딱 어울릴만한 커피였다. 이제는 예뻤던 노을도 쉬러 가고, 적막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가로등하나 없는 마당에는 일렁이는 모닥불이 타올랐고, 세 사람은 커피를 마시며 가만히 불길을 바라보았다. 제법 평화로운 밤이었다.
- 혹시... 아까 제 방 노크를... 몇 번... 하셨나요?
- 어.. 나오시기 전까지 한 세 번 정도 했었던 거 같아요..
아... 그랬구나. 윤성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윤성이 또 소리를 놓친 것이었다. 혹시 낮의 길도 미리 주의를 주었던 게 아닐까 의심이 되었다.
- 저 그럼 산책 전에 그 길로 가지 말라고 설명도 해 주셨었나요? 혹시...
-.... 네.. 아까 미리 말씀드리긴 했어요. 말씀드렸었는데 헷갈리셨나 봐요.
그랬다. 윤성은 또 자신이 소리를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괜히 스탭들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냈던 것이었다. 모닥불 기운 때문인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괜히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 캠핑 의자에 몸을 묻었다. 올려다본 하늘은 아주 까맣고, 그 까만 밤하늘 사이사이에 반짝이는 보석들이 보였다. 저기에 북극성도, 카시오페아도, 오리온자리도 보인다.
- 저기... 제가 요즘 소리를 잘 못 들어요..
- 네??
- 돌발성 난청이래요. 제가 하는 일이 뉴스를 수어로 통역하는 일을 하는데.. 왜 있잖아요 뉴스 보면 오른쪽 아래 어떤 남자가 열심히 손으로 설명하는 듯한 그림들.. 제가 그런 일을 하거든요.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귀가 잘 안들리더라고요. 피디가 콜 하는 것도 종종 못 듣기도 했어요 최근에. 사람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면, 입모양이며 상황이며 대충 종합해서 알아듣는데 눈 마주치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중간중간 말들이 잘 안 들려요. 가끔은 이명이 심해지기도 하고. 오늘도 그랬나 보네요. 미안합니다. 제가 못 들어놓고, 괜히 짜증 내고 심한 말을 했네요. 죄송해요
-... 아... 그러셨구나.. 저희도 아까 조금 당황하긴 했어요. 분명히 들으셨던 것 같은데 화를 내시고, 하셔서... 그런 일이 있는지는 몰랐어요 그것도 모르고 저희는 저희끼리 막 뒷담화...앗...아니 뭐 그렇게 심한 건 아니고.. 불평을 좀 했어요...
수인은 윤성을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아까 해진과 나눈 뒷담화까지 자백하고 말았다. 서둘러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스스로 꿀밤을 주었다.
-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오히려 제가 미리 말씀을 못 드렸으니.
- 지금은 저희 말 다 잘 들리시는 건가요?
- 지금처럼 얼굴 보고 집중하면 다 알아들어요
해진과 수인은 윤성의 이야기를 듣고는 어떤 위로를 건네어야 할지 몰랐다. 청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상상만으로도 오싹해지는 두려움을 어떻게 윤성에게서 덜어줄지 알지 못했다.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이의 아픔을 오롯이 이해할 수도, 그 상황이 나아지리라 희망을 잃지 말라는 조언도 모두 위로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가 적막을 대신했다. 세 사람은 그저 멍하니 일렁이는 불길을 보며, 각자의 삶을 돌아보고 있었다.
- 이곳은 아버지의 과수원이었어요. 지난가을 아버지가 돌아가셨고요. 어머니는 저 어릴 적에 돌아가셔서, 졸지에 천애고아가 되었죠. 저 친구도 손님으로 왔다가 이곳이 마음에 들어 함께 민박집을 운영하게 되었어요. 저는 가끔 저 친구가 꽤나 듬직하다고 느껴요. 제가 많이 위로받거든요. 기운도 얻고. 그렇다고 저 친구가 제게 따스한 말을 하거나 무언가 해주는 건 없어요. 오히려 손이 많이 가는 타입이거든요. 그런데 가끔 외롭거나, 공허함이나, 삶이 허망하다 느낄 때면 저 친구를 찾게 돼요. 그냥 저 친구가 곁에 있는 게 묘하게 든든하거든요.
어두운 밤바다에 저 멀리 등대 불빛 하나 보이는 것처럼요. 아무도 내 삶에 남아있지 않다고 느끼다가도 그 등대처럼 저기에 사람이 있고, 내가 가야 할 방향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래도 몸이 움직여져요. 저 친구가 위로의 말을 건네거나 무언가 하려 했다면 더 이상했을지도 몰라요.
힘이 부친다 생각할 때 항상 거기에 누군가 있다는 기분이 드는 것만으로도 조금 숨이 쉬어지는 그런 느낌 있잖아요. 그냥 저한테는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었거든요.
윤성은 해진의 그 이야기에 가슴이 시렸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보며 버텨왔는지, 무엇을 보며 달려왔는지 삶을 되짚었다. 항상 자신이 기준이었고, 자신의 목표가 우선이었다. 스스로 성공을 위해 채찍질을 했고, 힘이 들 때도, 성공에 기뻐할 때도 항상 자신만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인생에 있어 가장 깊은 골짜기를 걷고 있는 것 같은 순간에 윤성은 기댈 곳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연락해 볼 생각조차 못했다. 그저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윤성은 수인을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해진이 부러워졌다. 분명 그는 자신만큼 힘든 일을 겪었을 것이고, 회복되어 가고 있다고 했다. 윤성은 자신에게는 어떤 등대가 있는지, 있기는 한 것인지 두려워졌다.
- 그래서 요즘 조금 우울했는데 괜찮아질 거예요. 안 그래도 병원 검사 마치고 오늘 온 거예요 2-3일 후면 결과도 나올 거고, 최악의 경우라면 또 그때 가서 걱정하면 될 거예요
윤성은 오늘 처음 만난 스탭들에게 너무 죽는소리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괜히 괜찮은 척했다. 아직도 마음속에는 하고 싶은 말도, 털어놓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그냥 지금이 적당한 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해진도 수인도 그 이야기를 더 파고들지 않았다. 세 사람은 화로대에 장작을 던지고, 밤하늘을 바라보고 커피를 마시며, 맥주도 비웠다.
불멍의 대화가 무엇을 해결해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윤성의 귀는 여전히 잘 들리지 않고, 앞으로의 일들에 대한 대비책을 제안해 주지도 못했다. 그저 따스한 분위기의 따스한 말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들려주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런 대화 속에서 윤성을 묘한 편안함을 느꼈다. 최소한 자신이 생각하는 것 말고도 다른 방향으로 지금의 현실을 바라보거나,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아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위안이 들었다.
윤성은 오랜만에 깊은 꿈을 꾸었다. 해진의 이야기처럼 홀로 표류하던 바다 위에서 등대를 찾는 꿈이었다. 어둠과 부서지는 파도에 불안하던 윤성은 저 멀고 먼 해변가에 작은 불빛이 등대임을 깨닫고는 무언가 안도감이 드는 그런 꿈이었다.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모르던 윤성은 그 불빛 하나만으로 방향도, 목적도 찾게 된 그런 꿈이었다.
- 오빠~ 여기 좀 봐!! 꺄아~~
수인의 한 껏 오른 목소리에 설거지를 하던 해진이 티브이 앞으로 달려왔다. 티브이에는 우리나라 청년 실업을 걱정하는 뉴스가 한창이었다.
- 우와. 다행이다. 정말 잘 되었다.
- 그치 잘 됐지? 생각보다 멋진데...
해진과 수인은 청년 실업 문제 기사를 들으며 계속 미소 지었다. 그들의 시선은 뉴스의 앵커가 아닌 오른쪽 하단 작은 원안에서 열심히 손을 움직이는 남자에게 있었다. 윤성이었다.
소리를 잃어가던 손님. 인생의 가장 깊은 구간을 지나고 있다던 손님은 다행히도 멋지게 삶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무엇이 그를 어둠 속에서 건져내었을까? 과연 어떤 사람일까 해진은 궁금했다.
냉장고에는 며칠 전 윤성에게서 온 엽서가 붙어 있다.
"곧 방송 복귀해요. 다음에 휴가 내면 꼭 다시 방문할게요.
저도 있었네요. 그 등대 같다는 사람이.
같이 갈게요. 그곳의 노을. 그 사람에게도 보여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