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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포티와 올드 피프틴의 지뢰 찾기

by 성준

추억의 게임 지뢰 찾기를 기억하세요? 뭐 이름만으로도 올드해 보이는 게임이지만, 마우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스릴과 성취감까지 얻을 수 있는 꽤나 중독성 있는 게임입니다. 이 게임의 묘미는 처음 어느 블럭을 해체하느냐에 따라 전략과 진행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꽤나 넉넉한 빈칸을 클릭했을 때, 맵의 1/3 정도가 확 열리는 그 순간은 꽤나 짜릿하죠. 쌍쌍바가 딱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을 때의 쾌감, 식당에서 원하는 숫자의 젓가락만을 딱 집어내었을 때의 묘한 대견함 같은 느낌이 들곤 합니다.


하지만 첫 클릭으로 지뢰를 건드린다면, 게임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바로 게임 오버! 이게 바로 이 게임의 함정입니다. 물론 첫 클릭이 제대로 성공했다 해도, 전체 지뢰를 찾아가려면 꽤나 머리를 써야 합니다. 각 칸에는 주변 8칸 안에 몇 개의 지뢰가 있는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만, 어느 블럭이 지뢰인지 찾아가려면 주변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야 하는 논리적인 작업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마지막 지뢰를 찾기 위해서는 1/2의 확률에서 찍기 신공을 발휘해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요즘 그 지뢰 찾기 게임을 현실에서도 하고 있답니다. 바로 사춘기 딸아이와의 대화에서 말이죠. 처음에 어떤 말을 건네느냐에 따라 게임은 시작될 수도, 혹은 그 자리에서 닫혀 버릴 수도 있습니다. 어느 곳에 지뢰가 숨겨져 있는지는 아빠는 모르지요. 그날그날의 감정일지, 컨디션일지, 호르몬일지, 아니면 아이만이 알고 있는 아주 깊숙한 곳의 지뢰일지 아빠는 모릅니다. 같은 곳을 클릭해도 어느 날은 안전지대가 되기도, 또 다른 날은 뇌관이 되기도 합니다. 지뢰는 언제 터질지 모릅니다.


어느 날은 첫 클릭에 1/3이 열리기도 하지만, 대부분 몇 수 두지도 못하고 게임이 끝나버리기 일쑤죠. 딸아이와 하는 지뢰 찾기는 주변에 지뢰가 몇 개가 존재하는지 친절히 설명하지는 않는답니다. 그렇다고 아빠는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학교에 늦었다며 차로 데려다 달라고 합니다. 그럼 제가 유리한 고지에서 게임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저에게 신세를 지며 시작하는 게임이 될 테니까요. 게다가 오늘은 실실 웃으며 차를 타는 뽐새가 기분마저 좋은 것 같습니다. 게임을 시작할 최적의 타이밍인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첫 번째 클릭은 화장입니다.


-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 아빠 오늘 화장이 잘 된 것 같지 않아? 엄청 자연스럽지. 어제 푹 잤더니 화장이 잘 먹었어

- 넌 요 광대가 뻘건 건 눈에 안 보이냐?.

- 이것도 엄청 약하게 한 거야. 안 그래도 엄마한테 한 소리 듣고 거의 지웠어.

- 너 오늘은 코도 엄청 세웠네. 하는 건 좋은데 좀 자연스럽게 하면 안 되니.

- 애들도 다 이 정도 한다니까. 애들이 나 화장 엄청 잘한다고 했어


아직까지 괜찮은 수를 두고 있습니다. 어느 날에도 똑같은 수를 두었던 적이 있는데 그날은 화장이 지뢰였습니다. 학교까지 가는 길 우리 부녀는 아무 대화 없이 똑바로 앞만 보고 달려갔습니다. 심지어 차에 내리고는 다녀오겠다는 인사도 없었지요. 오늘은 그 지뢰는 피했습니다. 끝까지 가 봐야죠!


- 어휴... 근데 너 영포티 들어봤지? 너 혹시 아빠가 너네처럼 옷을 입으면 어떨 거 같아? 애들처럼 헐렁하게 옷도 입고, 비니도 쓰고, 귀로 뚫어 보고 말야

- 아~ 정말 싫어. 짜증 날 거 같아

- 그치? 아저씨가 애들 인척 하면 꼴불견이지? 근데 그렇게 입는데 아빠 친구들이 아빠한테 옷 잘 입는다고 하면? 그건 어때?

- 그래도 그건 아닌데? 자기들끼리 그러는 거 아냐. 별로야. 이상해

- 그래 바로 그거야. 니들도 니들끼리 예쁘다, 잘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어른 흉내 내는 것 밖에 아니라니까? 우리가 영포티면, 니들은 올드 피프틴이다.


진행이 나쁘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물꼬는 텄습니다. 아빠의 말에 딸은 조금은 수긍한 듯합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걸 보니 아빠 말이 조금은 먹혀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감정적으로 대꾸하지도 않고, 눈을 흘기지도 않습니다. 반박할만한 단어를 찾느라 머리를 굴리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오늘은 제대로 지뢰를 피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아냐. 나 화장 안 하면 못 나가. 이제 화장 없이는 밖에 못 나가

- 아니 그니까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할 거면 제대로 자연스레 예쁘게 하라고. 화장은 한 듯 안 한 듯 자연스럽게 하는 거야.

- 아니야 화장은 한 게 티가 나야 하는 거야.

- 아니라니까. 그게.

- 괜찮아 내가 만족하면 그게 좋아


마지막 클릭을 어디로 해야 할지 망설여집니다. 제대로 지뢰를 찾아내느냐 아니면 마지막 지뢰를 앞두고 여기서 게임을 종료하느냐 마지막 한 수에 달려 있습니다. 마우스를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려옵니다. 지금까지 논리적으로 지뢰를 잘 피해왔습니다. 함정과 힌트를 잘 분석해 거의 모든 맵을 클리어 해 나가고 있습니다.


학교에 데려다주는 그 짧은 시간, 딱 우리의 게임을 진행하기 좋은 시간입니다. 더 길어지면 지뢰는 시한폭탄처럼 저절로 터져 버리니까요. 사춘기는 유저에게 그리 친화적인 게임은 아니니까요. 그 적당한 시간 안에 얼마나 많은 지뢰를 피해 질문을 던지고 대화를 나누느냐가 이 게임의 핵심입니다. 오늘의 게임 스코어는 이니셜을 남겨 놓아야 할 정도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빠는 이곳에서 게임을 멈춥니다. 아빠의 지뢰 찾기는 마지막 지뢰까지 찾아내는 게 목표가 아니니까요. 아빠는 딸과 함께하는 게임이 하고 싶은 겁니다. 그냥 조금 더 길게 딸아이와 이야기가 하고 싶은 것이니까요. 끝까지 지뢰를 찾을 필요는 없거든요. 그저 지뢰를 피한 채로 딸아이와 핑퐁처럼, 티키타카처럼 이야기가 하고 싶은 겁니다.


사춘기에 접어든 딸과의 대화는 점점 난이도가 높아지는 지뢰 찾기 같습니다. 예상보다 지뢰는 점점 많아지고, 친절한 설명조차 없는 게임입니다. 규칙과 조건은 매번 새로 게임을 시작할 때마다 리셋되거나, 변경되는 일도 잦아집니다. 한마디로 녹록지 않은 난이도 상의 게임입니다.


어린 시절 아빠 곁에서 몸을 기대고 곤히 잠든 아가, 그저 아빠 말 한마디에 까르르 웃음 짓던 아가, 꾸중을 해도 '이리 와~' 한마디면 울먹이는 얼굴로도 꼭 안아주던 그 아가는 어디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아빠에게 그런 딸인데, 이제는 조심스레 지뢰를 찾아가며 대화를 이어갑니다. 안타깝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합니다. 때로는 서글플 때도 있지요. 어떤 날은 배신감 마저 들기도 합니다.


그 서운한 감정들은 일시적인 찰나의 이야기입니다. 그런 순간이 있어도, 여전히 그 어린 시절 천사 같은 아이고, 무럭무럭 자라주어 대견한 아이입니다. 이제는 제법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자신의 목표도, 해야 할 일도 찾아가는 성장하는 아이입니다. 점점 더 내 품을 떠나는 연습을 하고 있는 아이입니다.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깃털로도 하늘로 날아오르려 열심히 날개짓을 하는 아이입니다. 어른의 눈에는 어설퍼 보이고, 아직 부족해 보여도, 높은 창공의 구름을 바라보는 그 눈빛은 세상 어느 별보다 아름답게 반짝입니다. 그런 눈빛을 만나는 날이면, 더 게임이 즐거워집니다. 때로는 코끝이 찡해지기도 하지요.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가 되는 그런 순간입니다.


오늘 아빠의 지뢰 찾기는 여기서 멈춥니다. 끝까지 지뢰를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어느 날 보다 더 많은 공간을 열었습니다. 아이의 더 많은 마음을 들여다본 셈입니다. 이런 날은 여기서 멈추어도 좋습니다. 마지막의 지뢰보다 아이와 함께하는 티키타카가 더 즐거우니까요. 이런 날에는 아이도 기분 좋은 목소리로 인사합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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