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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민박집

제 13화. 두 남자 이야기

by 성준

민우는 가만히 상자를 손으로 쓸어내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남겼다. 해진이 장작을 두어개쯤 더 넣었다. 해가져 싸늘한 바람이 둘 사이를 헤집고 들어왔다. 기온이 내려가면서 공기가 좀 더 쨍하게 느껴졌다.


- 상자 안의 물건은 확인해 보신거에요?

- 아.. 아직 안해 봤어요. 당장이라도 열어보고 싶은데. 무엇이 들어있을지 겁나기도 하네요. 아니 솔직히 말해서 나쁜 거나, 위험한 게 들어있지 않을 거는 알고 있어요. 아마 실장님이 먼저 보셨을지도 몰라요. 이런 상자를 따로 보관해 두셨다면 대충 어떤 물건인지는 알고 계실거에요. 아마도 어머니가 제게 하고 싶으신 말이나, 전해주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은 들어요.


- 그런데 왜... 확인을 안하시고.

- 모르겠어요. 그냥 이걸 열어 확인을 해야 하는 건지. 아직 확신이 안서요. 제가 이 안에 들어 있는 걸 확인한다고 어머니가 살아돌아오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가 저를 아끼시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왠지 이걸 확인하게 되면 좀 겁이 나네요.


- 어떤 점이 두려우신거에요? 남기신 물건이 위험한것도 아니고, 그저 어머니가 남기신 마지막 말씀이실 수도 있는데..

- 예 그래서 겁이나요. 이 상자를 열어서 안에 내용물을 확인하고 나면, 그 다음엔? 무엇이 남을지 몰라요. 확인하고 나면, 더이상 어머니에 대해 궁금한 것도, 없어질 것 같아서.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저는 또 늘 그렇게 살아왔던 것처럼 살아갈 것 같아서요. 이걸 확인하는게 맞을까. 아니면 확인하지 않는것이 맞을까... 결정을 못내렸네요.


- 그럼 열지 않으실건가요?


- 언젠가는 결정을 내려야 하지 않을까요? 아마 어느 순간에는 열어보게 될 거라 생각해요. 평생을 확인하지 않을 수는 없을테니까요. 그런데 쉽게... 아니 조급하게 열어보지는 않아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해진은 자신도 아버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리워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다. 민우를 위로하려는 말도 아니고, 자신을 이해받고 싶었던 까닭도 아니다. 그저 그런 사람이 여기도 있다라는 것을 확인해 주고 싶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지만, 크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 특수청소를 하셨다고 하시니까... 죽음이라는게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것 같아요. 생각보다 자주 그리고 때로는 갑자기 다가오기도 하니까요.

- 맞아요. 모두에게 올 수 있는 일이지만, 되도록이면 겪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매일 그런 현장에서 제 삶을 꾸려나가면서도, 제게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적 없거든요. 아마 해진씨도 아직 그런 생각 깊게 해 본적 없을거에요..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거에.. 우리 모두 피해갈 수는 없지만 가능하면 천천히 겪으시길 바래요.


해진은 마른 침을 삼키며 고민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해야 할까? 괜히 불편해 질 수도 있으니 분위기를 맞춰 넘어갈까? 결국 말을 삼키며, 대신 화로대에 장작을 하나 더 넣었다. 타닥타닥 장작에 불꽃이 반디불이 되어 하늘 솟아 오른다.


- 네 조급하게 열지 않겠다는 말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이제 남겨진 자들의 몫이잖아요. 어떤 방식으로든 한 발씩 나아가는 건 남겨진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 저 솔직히 이곳에 아무런 기대도 없었어요. 그저 오늘 혼자 집에서 상자를 열어볼까 말까 고민하며 있을 것이 두려워, 아무생각없이 그저 시간을 보내려 온 곳인데.... 여기에 오길 잘 한 것 같아요. 저녁도 아주 맛있었어요.

그냥 조금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아요.


- 내일이고, 언제고 또 다시 그런 기분이 드실 수 있을거에요. 하지만 또 느끼실 수 있을거에요. 지금처럼 조금 마음이 가벼워 질 수도 있을 거라는 걸요. 그런 기분이 또 하루를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 주겠죠?


민우와 해진은 장작들 뒤집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여전히 남자의 무릎위에는 상자가 놓여있었지만, 어쩐지 그 상자의 무게가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그때 별채에서 통화를 마친 수인이 다가왔다. 코끝이 빠알갛고 훌쩍이는 모양새가 어머니와의 통화에 울컥했는지 모른다. 수인은 눈가의 한방울을 찍어내며 자리에 앉았다.


- 무슨 이야기를 그리도 오래 나누셨어요?

- 해진씨한테 인생 상담을 좀 받았어요. 이런 말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속이 깊으신 분 같아요. 이곳 분위기 때문인가요? 무슨 이야기를 나눠도 될 것 같은 그런 곳이네요 여기..

- 그쵸.. 여기 의외로 꽤나 진지한 이야기가 오가는 곳이라니까요. 여기 해진이 오빠 아버지가 만드신 곳인데 저도 이곳에 반해서 여기에 머무르고 있어요. 아버님이 남겨주신 제일 멋진 유산인거 같아요. 이 장소 때문에 민박집이 탄생한 셈이죠.

- ...유..산이요?

- 작년에 오빠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지난 가을 태풍에...


민우는 해진은 그런 경험이 없을거라 생각했었다. 자신만이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겪었고, 해진은 그저 그런 자신의 상태를 이해해주려 애쓰고만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알고보니 해진은 자신보다 먼저 이별을 경험했지만, 그도 겪은 이별을 겪었노라 자신도 알고 있느라 말하지 않았다.


민우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들어 해진을 보니 해진은 멋적은 표정으로 수인을 보며 가볍게 손가락으로 쉿 모양을 했다. 일부러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 ...왜 이야기하지 않으셨어요?


해진은 몸을 가다듬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자세를 고치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에야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 제가 아버지를 여윈 것이 지금 중요한 것은 아니잖아요. 제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그런 사실이 최근 민우씨가 겪은 일들을 이해하고 위로해 주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그 때 많이 힘들었는데.. 누가 옆에서 자신도 그런 이별을 했노라고 위로해 주어도 가슴 깊이 이해되지 않더라구요. 때로는 저의 상처를 모두가 겪는 일이라 가벼이 여기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거든요.


그렇잖아요. 모두가 겪는 일이지만, 본인에게는 얼마나 큰 상실이고, 이별인데 다른 사람의 그것과는 같을 수가 없더라구요. 어쩌면 우리는 각자의 우주를 잃어버린 셈인데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어요. 제가 그랬던 적이 있어서 그냥 말씀 안드린것 뿐이에요.


- 저는 그런것도 모르고.... 지금은 괜찮으신가요?

- 그런 일들이 어떻게 괜찮아 지겠어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 질 수 없는 일이잖아요. 슬프고, 허무하고, 되돌아 볼 수록 후회만 남는 그런 일인데요..


- 아... 오빠가 이야기 안했구나. 아고 전 그것도 모르고 너무 깊은 이야기들을 나누시는 것 같아서 서로 같은 경험을 공유하시는 거라 생각했었는데.. 미안해 오빠. 미안해요 민우씨

- 미안해요 민우씨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해요. 그럴 의도로 말씀 안드린건 아닌데..


민우는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 자신을 위해 이렇게 위로를 전하고, 이해해주려 노력한다는 것이 낯설었다. 아버지의 상실을 이야기 하지 않은 것이 처음에는 화가 났었지만, 그것은 화가 아니라 당황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남자도 나와 같은 고통을 겪었음에도, 자신을 위로 하려 자신의 고통을 감추었다는 점에 당황했던 것이다. 민우는 당황속에서 잠시 말을 잃었다.


바람이 장작 사이 사이를 휘집고 돌며, 불길이 타올랐다. 잘 마른 장작은 바람의 열기를 못이겨 타닥 타닥 작은 파열음을 내며 터져나갔다. 잠시의 침묵은 벌레소리가, 바람소리가, 장작이 타오로는 소리가 대신해 그들만의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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