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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샘 Sep 22. 2024

비오는 날



영국 유햑시절에는 자주 우산을 쓰지 않고 빗속을 걸었다. 하늘에서 선녀가 침을 뱉는 듯 방울을 툭툭 튀기는 것이 그 나라 특유의 날씨였다. 사람들은 귀찮았는지 아니면 조금 무신경한 국민성 탓인지 우산을 쓰지 않고 그 비를 맞았다. 처음 영국에 도착했을 때 어떻게든 비를 맞지 않으려고 우산속에 몸을 우겨 넣었다. 얼마 후 화려한 꽃무늬가 프린팅된 모자달린 우비를 샀다. 한두 번 모험적으로 시작한 일이 어느새 습관이 되어 삼개월쯤 지나니 나도 왠만한 비는 그냥 맞고 다녔다. 오늘도 비가오네? 하늘을 보고 날씨가 흐리면 우비를 입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질좋은 영국의 우비는 흩뿌리는 빗속에서 내 몸을 잘 감싸주었다. 비를 맞으면 머리를 후두둑 두드리는 소리가 귓속 고막을 울렸다. 굵은 물줄기가 몸에 부딪히는 감각이 온전히 전달되었다. 빗속에서 길 위를 여행했고 낯선 사람과 장소를 두드렸다. 

동행한 친구들과 빗속 산행을 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쫄딱 비에 젖은 여자 넷이서 황무지 같은 비포장 산길을 올랐다. 그 날은 억수같이 비가 퍼부었고, 땅은 불어난 물이 범람하여 무릎까지 잠기는 곳도 있었다. 희한하게도 영국인들은 그 폭우속을 우산없이 그냥 걸었다. 비를 맞으면서 정상을 올랐다가 다시 비를 흠뻑 맞으면서 산을 내려왔다. 아름다운 연인이 손깍지를 꼭 하고서 길을 내려오다가 우리 일행과 부딪혔다. 우리는 모두 같은 꼴로 비에 홀라당 적셔 있었는데, 그 모습이 우스워 서로 이를 드러내놓고 웃어재꼈다. 빗줄기가 너무 거세서 그들이 건넨 얘기가 잘 들리지 않았다. 

많은 순간에 비를 맞았고 그럴때마다 나는 혼자있어도 외롭지 않고, 두려웠지만 용기가 났다. 비가 내리면 아이들이 한번쯤 그 비를 흠뻑 맞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일부러라도 우산을 펼치지 않고 걸었으면 좋겠다. 오늘 비가 많이 와서 아이들 어린이집 등하원이 어려웠다. 유모차에 레인커버를 씌우고 나는 여느때처럼 우비를 입었다. 두손으로 유모차를 안전하게 끌려면 다른 도리가 없었다. 영국생각이 났다. 그때가 참 좋았다. 다음번엔 아이들과 꼭 우산없이 비를 맞아보리라. 첫째 아이의 자동차 무늬 우비, 둘째의 형광노랑색 공룡 우비가 있으니 준비물은 다 갖췄다. 다음번 일기예보를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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