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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샘 Sep 22. 2024

유기농 무색소 하얀 라면


동료들은 자식교육에 열정적이고 먹는 것에도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다. 세상을 글로 배운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육아도 책으로 학습하고 해답을 얻으려 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도 두꺼운 대학 전공책같은 육아서를 열심히 공부했다. 육아공부는 수면교육서, 뇌 발달에 좋은 놀이백과, 부모교육서, 이유식과 유아식 책, 엄마표 한글/수학/영어 공부법, 집콕놀이 안내서 등 가짓수가 많았다. 육아서를 한 권씩 독파해 나갈때마다 육아라는 과목의 소단원을 하나씩 정복해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모든 공부가 그렇듯 막히고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여러번 읽고 메모하고 외우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남편과 남동생이 생라면을 아이들에게 준 것이 계기가 되어 명절날 또 대판 싸움이 났다. 남편은 명절인데 생라면 몇 점 먹는게 이렇게 크게 화낼 일이냐고 항의했다. 나는 원칙이 모호한 그의 육아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른들앞이라 둘다 참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다. 헌데 처음 맛보는 생라면을 오독오독 씹어먹는 아들들을 보니 배속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용암처럼 솟구쳤다. 그동안 쌓아온 육아서적의 공통된 의견은 '모든 육아법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이좋고 따뜻한 부부사이와 긍정적인 가정의 분위기'라고 했다. 아, 이러면 안되는데 하면서도 잘못을 저지르는 내가 미웠지만 자꾸만 일이 벌어진다. 사소한 라면 한 봉지의 문제는 평소 서로가 아이들을 훈육하는 태도, 말하기 습관, 가정의 규율과 같이 다수의 논쟁거리로 번졌다. 


부부가 싸우는 이유의 팔할은 자식문제라더니 우리부부는 백프로다. 임신전엔 우리도 꽤 다정한 부부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툴툴거리지 않고 점잖게 말하는 법을 잊은것 같다. 저 사람이 내가 운명이라고 여긴 그 사람이 맞나, 낯선 눈으로 그를 찬찬히 훑어본다. 볼록한 배, 붉어진 피부, 주름들, 앞으로 굽은 어깨가 보였다. 두번의 제왕절개 수술로 내 몸에는 커다란 수술자국이 났고 같은 시간에 그도 늙어갔다. 우리는 부부는 원초적이고 치졸하게 서로를 헐뜯었다. 사는게 바빠서 제대로된 사과를 건네지 못하고 어영부영 며칠이 지나면 감정이 누그러져 그만 잊고 마는 식이었다. 틈만 나면 싸우는 우리 부부를 보고 가족들은 부부상담을 권유했다. 당사자인 우리는 오히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못하고 뭐 이런일로 상담을 받냐며 의아했다. 


육아서에 따르면, 아이의 입맛은 비단 건강뿐 아니라 아이의 수면, 기분상태, 지능, 학업성취 등 많은 것을 결정한다. 무엇을 먹느냐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철학적인 문제로 직결되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다. 곱씹어보아도 생라면을 어린 아이들에게 먹인 것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아 괘씸한 마음이 든다. 유기농의 합성첨가물이 함유되지 않은, 깨끗하고 순수한 라면이 있다면 또 모를까. 라면은 맵고 짤수록 맛있기때문에 흰색의 순수라면은 분명 출시되자마자 망할 것이다. 그래도 자식키우는 부모의 고충을 헤아리는 마음으로 라면회사에서 사회기부차원의 반짝 제품을 만들어 준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몇 봉지씩 살 것이다. 순수라면 몇봉지로 미래에 일어날 부부싸움을 예방하고 나아가 첨예한 부부의 다름에 작은 공통분모를 만들 수 있다면, 이 얼마나 큰 가성비의 합리적 소비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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