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이직을 했다. 지금의 회사보다 더 좋은 조건의 연봉계약을 했다. 안정적인 회사에 유연한 업무강도, 탄탄한 복지가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확정통보를 받은 첫날, 남편은 몇 달 동안 끙끙 앓던 불안한 마음을 비로소 완전히 내려놓고 드르렁 쿨쿨 코를 골며 깊은 잠을 잤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태평하고 깊어서 나는 한시름 마음이 놓였다. 지난 시간 우리 가정에 드리운 어둡고 무거운 장막이 벗겨진 것이다.
기분이 좋은 날의 귀가길에 남편은 습관처럼 케익이나 빵을 샀다. 코가 삐뚫어지게 술을 마시고 핸드폰을 택시에 두고 내려 고생을 한 적이 여러번 있었으나, 손에 쥔 빵 봉지 만큼은 절대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엊그제는 생일상에 올릴 법한 제법 큰 무화과 케익을 사오더니 오늘은 흑임자 케익 한조각을 내밀었다. 사랑을 주는 사람, 받는 사람 이분법적으로 연인 사이의 관계를 정의한다면, 단연코 그는 주는 사람이고 나는 언제나 받는 쪽일 것이다.
그의 눈이 슬퍼보이는 까닭을 알면서도 물었다. 이렇게 좋은 날 왜이리 슬퍼 보이는지, 아직 남은 고민거리가 있는지. 그는 멋쩍은 듯 웃으며 실없는 소리를 몇 마디 했다. “그냥, 내일 네가 나를 좀 출근시켜줄래?” 얼마나 회사가 가기 싫으면 ‘출근하다’의 피동형 어미를 달아 ‘출근시키다’라는 말을 쓸까. 그가 원하는 건 더 좋은 회사로 이직을 하고 승승장구하는 직장인의 삶이 아닐 터이다. 내가 아는 그는 배짱이처럼 누워서 하루종일 빈둥대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 사람, 아이들과 술래잡기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 좋아하는 삼류 조폭 느와르 영화를 정주행하느라 밤을 꼴딱 새는 사람이었다.
이제 더 반짝이는 신발을 신고 날렵한 옷깃을 세우고 그가 새롭게 나아간다. 영어에 ‘내가 너의 입장이라면’ 이라고 말하고 싶을 때, ‘If I were in your shoes,’라는 표현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작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어깨, 손등, 검버섯, 양말 같은 것들이다.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옛날 예적 유럽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신발을 응시하는 시선이 있었다. 친구의 신발을 바라보며 그의 삶을 대신 살아보는 상상을 했던 멋진 시인이었으리라. 오늘은 나도 너의 신발을 신어보고 싶다. 너의 슬픔과 기쁨, 두려움과 희망의 정체를 알고 싶다. 단숨에 어른이 되어버린 소년의 마음, 아빠의 사랑, 두려움을 안으로 심키는 너, 짐작만 할 뿐 결코 알 수 없을 너의 하루를 살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