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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샘 Sep 22. 2024

무소유의 육아



  아이들과 간단히 외출할 일이 생기면 강박적으로 놀잇감 가방을 챙겼다. 다이소에서 산 노란색, 빨간색 천가방에는 두 아이가 평소에 즐겨하는 그림그리기 재료들이나 스티커, 색종이, 작은 장난감 등을 넣었다. 아이템은 매번 조금씩 바뀌지만 내 가방에는 늘 아이들이 시간을 떼울만한 무엇인가가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어깨는 무거웠지만 마음은 든든했다. 어렸을 땐 돌덩이 같은 교과서를 이고지고 다녔고 조금 지나서는 온갖 잡동사니와 전공서적을 넣은 배낭을 멨다. 엄마가 되니 그간 쌓아온 보부상력에 초보 엄마의 불안이 더해져 내 가방의 상태는 이제 초맥시멀의 끝을 달렸다. 

  놀이터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에게 넉넉히 나눠줄 만큼의 간식 봉지, 물병, 음료수, 휴지, 가위, 빨래집게,상비약, 모기퇴치제, 각종 화장품, 여벌옷…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상 필요한 물건은 모두 구비해두었다. 한창 소나기가 내리던 한여름에는 비소식이 없어도 우산과 성인용, 아이용 우비를 늘 챙겼다. 사용하지 않는 날이 많은 물건일지라도 없을 때 발을 동동 구르기보다 필요할 때 찾을 수 있는 장소에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덕분에 나는 어깨와 목 통증에 시달렸다. 평생을 거북목으로 살아서 고통에 둔감해졌나 싶다가도 가끔 혈자리를 누르는 마사지를 받으면 손가락만 지그시 눌러도 뒷목이 너무 아팠다.

  이번 주말의 캠핑은 너무 급하게 벼락치기로 준비물을 챙긴 탓에 빠진 물건이 정말 많았다. 수건도 챙기질 않아서 근처 마트에서 한 장에 오천원짜리 수건을 샀는데 가격대비 질이 좋지 않았다. 아이들 먹을 것도 제대로 챙기질 못해서 인스턴트 칼국수라면에 야채조금 썰어넣어 한 끼를 떼우게 했다. 남편의 캠핑용 슬리퍼도 없었으며 편한 활동복을 챙기지 않은 나는 땡볕에 긴 청바지를 입고 땀을 뻘뻘 쏟았다. 어린이집 가을운동회를 마친 직후 출발하는 일정이라서 아마도 우리 부부 모두 캠핑보다는 달리기계주나 학부모선서같은 것에 정신이 팔렸나보다. 아이들의 운동회는 잘 끝났지만 연이은 캠핑은 준비성 부족으로 인해 1박 2일간의 부부싸움을 초래했다. 우리는 주말 내내 정신 없이 싸우고 육아하고 싸우고 육아하기를 반복했다. 북한산 아래 우거진 숲과 고요한 캠퍼들의 평화속에서 우리는 미운오리새끼같이 이질적으로 사납고 우왕좌왕했다. 

  장난감과 책도 당연히 챙기지 못했다. 이렇게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맨몸으로 육아에 내던져진 적은 없었다. 자책하며 혼자 심통이 났는데 한창 열을 내다가 주위가 조용하여 아이들을 찾았더니 둘째 아이가 잠자리를 손에 쥐고 있었다. 남편이 잽싸게 내리친 채에 걸려든 잠자리 한마리가 아이들의 작은 손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붙들렸다. 네다섯살 인생 첫 잠자리 잡기가 성공했다. 첫째아이는 의기양양하게 과한 포즈로 사진에 응했고 둘째아이는 손가락이 간질간질하다며 울상을 지었다. 잠자리를 시작으로 여치, 메뚜기, 사마귀, 애벌레, 나방, 모기, 개미, 파리 온갖 곤충이 아이들의 친구가 되었다. 남편과 내가 투닥거리는 와중에도 아이들은 즐거웠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없는 맨몸으로 하루를 보냈다. 가끔 다투고 울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 사이좋게 지냈다.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아이들은 ‘무엇인가’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꺄르르 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자주 들렸다. 잠자리에 들어서는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나직한 동화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다 이내 잠이 들었다.

  꺄르르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너무 좋아서 무소유를 사유했다. 소유하지 않는다=너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너는 나를 떠나서 자유로운 인격체가 된다=너는 그냥 너로 존재한다=우리는 대등한 인격으로 마주한다. 결론이 너무 근사하고 마음에 꼭 들어서 잊지 않고 새겨두려한다. 의도적으로 가방을 비우는 연습도 해보자. 아이들에게 그간 허락하지 못한 자유를 이제라도 돌려줘야지. 엄마가 너무 늦게 알아서 미안하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아들들, 맨몸으로 이렇게나 잘 노는 멋진 녀석들을 몰라본 아둔한 엄마를 용서해주겠니. 내일은 가방도 비우고 마음도 비울게. 빈 자리는 너희들 몫이라는 것 잊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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