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 산책의 기쁨과 인류애 회복의 순간.
나는 엄마 몰래 인공 와우 장치 전원을 끈 채로 다니기 시작했다. 인공 와우가 꺼진 세계는 아늑하고 편안했다. 그 세계가 얼마나 고요하고 평화로운지 새삼스럽게 발견했다. -산책을 듣는 시간 中
불완전한 소리의 세계 대신 침묵의 세계를 택한 수지처럼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뉴스는 쏟아지고, 대부분의 뉴스 안에는 딱딱한 분노와 우울과 절망이 자리한다. 인터넷을 하거나 집에서 출근 준비하면서 틀어 놓은 TV에서 세상의 불행이 다 모인다는 뉴스를 접한다.
한결같이 자극적이고 나쁜 소식을 접하면 찝찝하고 한숨이 나오는 한편 무덤덤해지게 된다. 웬만큼 강력한 사건이 아니고서는 사고사나 아동학대 기사를 읽고도 점심시간에 밥을 먹을 수 있는 무감함. 나는 이 모든 잔인함에 무뎌지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고 싶지만, 내가 뉴스를 보지 않아도 각종 매체와 입으로 전해지는 루머와 기사거리를 완전히 피할 방법은 없다. 그래서 주말이면 나만의 도피처. 공원으로 간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을 먹고 공원으로 향한다. 공원을 크게 한 바퀴 돌면서 보는 풍경은 자극으로부터 나의 눈과 귀를 덮는다. 얇은 소재의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열심히 공원 오르막을 오르는 남자. 갈색 푸들을 데리고 산책 나온 여자. 기저귀를 차고 어설픈 발걸음을 떼는 아들을 뒤쫓는 아빠. 공원에는 내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나를 절망케 하는 소식 대신 일상이 자리한다. 낮시간의 공원에는 강아지가 짖는 소리나 새소리가 자극의 전부다.
땀이 날 정도로 공원을 걷다 보면 바닥을 치던 인류애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한 번은 마주 보고 있는 벤치 중 한 곳에 앉아 있는데 맞은편에 부부로 보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앉으셨다. 할아버지는 주머니에 든 사탕 비닐을 벗겨 사탕을 할머니 입에 넣어줬다. 말없이 이루어지는 단조로운 행동이 왜 그렇게 좋던지. 나보다 먼저 손잡고 일어나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던 두 분을 보며 나는 그간의 뉴스와 나쁜 소식을 잊고 '아, 아직도 참 아름다운 세상'이라며, 믿을 만한 어른들이 많다는 앞뒤 안맞는 희망의 콩깍지를 쓴다.
심심할 정도의 평온. 그 찰나에 기운을 얻어, 피로할 정도로 쏟아지는 나쁘고 절망적인 소식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며 희망을 붙잡는다. 행복 가득한 콩깍지가 금방 벗겨질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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