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상상을 한다. 하루에 적어도 스물다섯 가지 이상의 상상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그 내용을 공개하거나 “제가 하루에 수십 가지의 상상을 하는 거 알고 계세요?”하고 떠벌리진 않는다. 가족에게도 이건 비밀이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속이야 어찌 됐건 겉은 정상적인 사람으로 비치는 편이 여러모로 편하기 때문이다.
주로 빨려 들어가는 상상을 많이 하는데,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을 땐 변기 속으로 엉덩이가 빨려 들어가는 상상, 대화중엔 상대방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상상을 한다. 설거지를 할 땐 싱크대 배수구에 빨려 들어가고 머리를 감기 위해 고개를 숙일 땐 수챗구멍에 머리카락부터 빨려 들어간다. 언제부터 왜 이런 상상이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어릴 때부터 혼자 멍하니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고,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땐 이상한 소리를 많이 하고 산만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뿐이다.
아이가 6개월쯤 되었을 무렵, 글쎄 분유를 타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 분유를 수저로 듬뿍 퍼서 젖병에 넣는 순간 손가락부터 젖병 입구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당황스러움도 잠시, ‘올게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깔깔 웃음이 났다. 수십 년간 상상했던 일이 이제야 이뤄지는구나 싶어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6개월 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다는 사실이 너무 좋아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런 날을 너무나 기다려 왔어!' 손가락으로 뽀얀 분유 가루를 콕 찍어 맛보았다. 입 안 가득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풍미가 가득 찼다. 손바닥 위에 가루를 쌓고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기도 하고, 보드라운 감촉을 느껴보기도 했다. 푹신한 이불에 눕듯 털썩 누워버렸다. 젖병 안에서 보는 주방 천장이 낯설게 느껴졌다. 살면서 주방 천장을 이렇게 세세하게 감상할 일이 있을까? 천장 벽지에 있는 작고 까만 점들을 세어보기도 하고 마치 현대문명을 처음 접하는 존재처럼 형광등의 모양새를 뚫어져라 관찰하기도 했다.
그러다 살짝 잠이 들었나 보다. 찰나였다. 살갗이 점점 뜨거워지는 느낌에 눈을 떴다. 젖병 입구에 번쩍이고 뾰족한 주전자 주둥이가 보였다. 그 옆으로 얼핏 보이는 남편의 얼굴, 펄펄 하얀 김을 내뿜는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지기 시작했다. 앗 뜨거워 앗 뜨거워. 나는 빙글빙글 돌며 뜨거움에 몸부림쳤다. 여보, 나야! 내가 젖병 속에 있다고! 물 그만 부어 너무 뜨겁잖아! 야 안 들려? 야!! 야!!! 이렇게 뜨거운 물을 부으면 아기가 어떻게 먹어!
분유는 서서히 녹기 시작했고 내 몸도 흐물흐물해지며 함께 녹아들어 가기 시작했다. 아직 머리는 녹지 않았을 때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이대로 녹아 아이의 몸속으로 들어가겠구나.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아...'
누군가 몸을 흔들며 크게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아! 잠에서 깼다. 이 모든 게 꿈이었다. 아이와 남편이 내 얼굴을 보며 괜찮은지 물었다. 두꺼운 구스 이불이 몸을 압박하듯 똘똘 말려있었고 늘 틀어놓고 자는 온수매트는 빨간색으로 최고 온도를 가리키며 깜빡이고 있었다. 말린 이불을 털어내고 몸을 일으켜 정신을 차렸다. 어젯밤 조금 추운 것 같아 온수매트를 최대로 틀어놓고 구스 이불까지 꺼낸 기억이 났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 오만가지, 수십 가지의 상상을 하다 잠이 들었던 것도. 미간까지 찌푸리며 무슨 잠꼬대를 그렇게 격하게 하냐는 남편의 물음에 그냥 멋쩍게 웃어 보였다.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