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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화 흑사병이 르네상스를 낳았다고?

14세기 최악의 위기가 인류 최고의 혁신을 만든 비밀

by 윤지원

01화 흑사병이 르네상스를 낳았다고?




여러분은 '흑사병'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아마 죽음, 공포, 절망 같은 단어들일 겁니다. 14세기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이니까요. 하지만 놀랍게도 이 암흑 같은 시기 바로 다음에 인류 최고의 문화적 황금기인 '르네상스'가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1348년 유럽에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쓰러졌고, 교회는 시체로 가득 찼으며, 봉건 제도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기존 권력 구조가 흔들리기 시작한 겁니다. 귀족들도, 성직자들도, 농민들도 똑같이 죽어갔거든요. 혈통이나 신분이 아무 소용없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깨달았죠. "아, 우리가 믿던 절대적 질서라는 게 사실은 그리 절대적이지 않구나."



경제 구조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인구가 급감하자 살아남은 노동자들의 몸값이 치솟았거든요. 농노들이 "더 좋은 조건을 주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겁니다. 돈의 흐름이 바뀌면서 새로운 상인 계층이 등장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어요. "내일 죽을지 모르는데 뭐 하러 내세만 바라보고 살아?" 사람들은 현재의 삶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세'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죠.



그런데 정말 놀라운 건 이때부터 사람들이 던지기 시작한 질문들입니다. "신만 믿고 살면 되는 건가, 아니면 인간 자체도 가치 있는 존재인가?" "책 속의 지식만 중요한가, 아니면 직접 관찰하고 실험해보는 것도 중요한가?" "개인의 재능과 노력으로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던진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시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 - 1374)였습니다. 그는 흑사병이 한창이던 시대를 살면서도 "인간성 회복"을 외쳤거든요. 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고대의 지혜를 사랑하지만, 내 시대의 어둠을 밝히고 싶다."



페트라르카는 직접 고대 로마 유적지를 탐험하고, 고전 문헌을 발굴하며, 무엇보다 '개인의 내면'에 대해 깊이 탐구했어요. 그의 시집<칸초니에레 Canzoniere>는 개인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 최초의 작품 중 하나죠. 단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신곡>에서 그는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하면서 인간의 모든 면을 탐구했어요. 중요한 건 단테가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썼다는 점입니다. "일반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깊은 진리를 전하겠다"는 의지였거든요.



이렇게 역사를 살펴보면 인류의 큰 변화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먼저 기존 시스템이 한계에 도달하는 과잉의 단계(1)가 있고, 외부 충격이 시스템을 강타하는 충돌의 단계(2)가 이어집니다. 그 다음 기존 질서가 무너지는 붕괴의 단계(3)를 거쳐, 마침내 새로운 질서가 등장하는 재정렬의 단계(4)에 이르게 되죠. 14세기로 보면 봉건제의 경직성이 과잉 단계였고, 흑사병의 창궐이 충돌 단계, 사회 구조의 해체가 붕괴 단계, 그리고 르네상스의 시작이 재정렬 단계였던 셈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도 비슷하지 않나요? 정보 과잉, 경쟁 과잉, 성장 위주의 시스템이 한계에 부딪히고 있고, 코로나19와 기후 변화, AI의 등장이라는 거대한 충격이 우리를 강타했습니다. 기존 교육 시스템과 일자리 구조가 흔들리고 있죠. 그렇다면 네 번째 단계인 재정렬은 누가 만들어갈까요? 바로 여러분입니다.



잠깐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도 개인적으로 작은 '붕괴'를 경험한 적이 있을 겁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느낀 혼란이나, 코로나19로 온라인 수업을 시작했을 때의 당황함, 진로에 대한 확신이 흔들렸던 순간, 또는 친구 관계에서 겪었던 큰 변화 같은 것들 말이에요. 그 순간 여러분은 어떤 질문을 던졌나요? 그리고 그 질문이 여러분을 어떻게 변화시켰나요?



14세기 사람들이 흑사병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물었듯이, 우리도 지금의 변화 속에서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한자로 '위기 危機'는 '위험'과 '기회'를 합친 말입니다. 14세기 흑사병이 그랬고, 지금 AI 혁명도 마찬가지예요.



다음 화에서는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가 경고한 '위험 사회'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직면한 위험들이 사실은 '제조된, 만들어진 위험'이라는 충격적인 진실을 함께 생각해볼게요. 변화의 시대,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는 새로운 르네상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다음 화 예고 : "너의 스마트폰이 널 감시하고 있어" - 울리히 벡이 경고한 '제조된 위험'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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