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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화 히피가 애플을 만들었다?

실리콘밸리에 숨겨진 디지털 르네상스의 진실

by 윤지원

1960년대 캘리포니아 베이 지역에는 (그때 당시로서는) 이상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어요. 긴 머리에 청바지를 입고, 기존 사회에 반항하며, "Make Love, Not War"를 외치던 히피 hippie들 말이에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 중 상당수가 나중에 컴퓨터 혁명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도 그중 하나였죠.



그런데
어떻게 평화와 사랑을 외치던 반문화 운동이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술 생태계를 만들어낸 걸까요?


히피 문화의 핵심은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이었어요. 기존의 권위적이고 획일적인 시스템에 반대하며,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고 자유로운 표현을 추구했죠. 그들은 LSD 같은 환각제를 통해 의식을 확장하려 했고, 동양 철학과 명상을 통해 내면의 깨달음을 찾으려 했죠. 겉으로 보기엔 컴퓨터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지만, 사실 이런 정신이 개인용 컴퓨터 혁명의 철학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당시 컴퓨터는 거대한 기업이나 정부만 사용할 수 있는 권력의 상징이었어요. IBM의 메인프레임 컴퓨터는 방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컸고, 운영하려면 전문 기술자가 필요했죠. 일반인들은 꿈도 꿀 수 없는 기술이었습니다. 하지만 히피들은 "왜 컴퓨터가 소수만의 전유물이어야 하지? 개인도 자신만의 컴퓨터를 가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어요. 이게 바로 '개인용 컴퓨터'라는 혁명적 아이디어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스튜어트 브랜드가 발행한 <홀 어스 카탈로그 The Whole Earth Catalog (WEC)>라는 잡지가 있었어요. 히피들의 바이블 같은 책이었는데, 여기에는 "개인에게 힘을 주는 도구들"이 소개되어 있었어요. 망원경, 계산기, 공구, 책들을 리뷰하면서 "이런 도구들이 개인의 능력을 확장시켜 준다"라고 말했죠. 스티브 잡스는 나중에 이 책을 "구글의 종이 버전"이라고 표현했어요. 개인이 원하는 정보와 도구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플랫폼이었거든요.



1970년대 중반, 실리콘밸리에는 '홈브루 컴퓨터 클럽 (Homebrew Computer Club)'이라는 모임이 있었어요. 컴퓨터에 관심 있는 괴짜들이 모여서 직접 컴퓨터를 만들고,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 도우면서 개인용 컴퓨터의 꿈을 키워나가던 곳이었죠. 여기서 스티브 잡스(Steven Paul Jobs, 1955-2011)스티브 워즈니악(Steve Wozniak, Stephen Gary Wozniak, 1950-)이 만났고,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William Henry Gates III, 1955-)도 이 모임에 참여했어요. 마치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 가문의 살롱처럼,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나누는 공간이었습니다.



워즈니악은 순수한 기술자였어요. 컴퓨터 회로를 설계하는 것 자체가 예술이라고 생각했죠. 그는 기존 컴퓨터보다 훨씬 간단하면서도 효율적인 설계로 Apple I을 만들어냈어요. 반면 잡스는 기술보다 사용자 경험에 관심이 많았어요. "기술은 아름다워야 하고, 사람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이 두 관점이 만나면서 Apple II가 탄생했고, 개인용 컴퓨터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습니다.



잡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려면 그의 대학 시절을 봐야 해요. 리드 칼리지 Reed College에서 그는 서예 수업을 들었어요. 한 글자 한 글자의 아름다움, 글자 간격의 조화, 타이포그래피의 예술성에 매료되었죠. 당시에는 "컴퓨터와 서예가 무슨 상관이야?"라고 생각했겠지만, 나중에 매킨토시를 만들 때 이 경험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죠. 세계 최초로 아름다운 폰트를 구현한 컴퓨터가 되었거든요!



잡스는 이런 경험을 "점 잇기(connecting the dots)"라고 표현했어요. 당장은 무의미해 보이는 경험들도 나중에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혁신을 만든다는 뜻이에요. 서예와 컴퓨터, 선불교와 디자인, 히피 문화와 기업 경영.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것들이 애플이라는 회사 안에서 하나로 융합되었어요.



스탠퍼드 대학교의 D-스쿨(디자인 스쿨)은 이런 융합적 사고를 체계화한 곳이에요. 여기서는 공학자와 디자이너, 심리학자와 경영학자가 한 팀이 되어 문제를 해결합니다. "수술실의 안전성을 높이려면?"이라는 과제가 주어지면, 의대생은 의학적 관점에서, 공대생은 기술적 관점에서, 디자인과 학생은 사용자 경험 관점에서 접근해요. 그리고 이 다양한 관점들이 충돌하고 융합하면서 혁신적인 솔루션이 나오는 거죠.



D-스쿨의 교육 방식은 디자인 씽킹이라고 불려요. 공감(Empathize) → 정의(Define) → 아이디어 발상(Ideate) → 프로토타입(Prototype) → 테스트(Test)의 5단계로 이루어져 있어요. 가장 중요한 건 첫 번째 단계인 공감이에요. 사용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이해하고, 그들의 감정과 요구사항을 깊이 파악하는 거죠. 이게 바로 히피 문화에서 강조했던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현대적 버전이에요.



피터 틸(Peter Andreas Thiel, 1967-)이 쓴 <제로 투 원>에서도 비슷한 메시지를 전해요. "0에서 1로 가는 것이 1에서 100으로 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거죠. 기존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게 가장 혁신적이라는 뜻이에요. 이미 있는 것을 조금 개선하거나 모방하는 건 쉽지만,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드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거든요.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보면 정말 신기해요. 실험실과 살롱과 시장이 한꺼번에 존재해요. 스탠퍼드나 UC 버클리 같은 대학에서는 최첨단 연구가 이루어지고, 카페나 코워킹 스페이스에서는 창업가들이 모여 아이디어를 나누며, 벤처캐피털들은 유망한 아이디어에 투자할 준비를 하고 있어요. 실패해도 "좋은 경험이었다"라고 격려받고, 다시 도전할 기회가 주어지는 문화가 있죠.



이런 모든 게 결국 히피 문화에서 시작된 "개인의 창의성과 자유를 존중하고, 기존 시스템에 도전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는 정신의 연장선이에요. 르네상스 시대와 놀랍도록 닮아 있죠. 다양한 분야의 천재들이 모여 서로 영감을 주고받으며,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도구와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 말이에요.



다음 화에서는 산업혁명부터 현재까지 인류가 겪어온 네 번의 큰 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각각의 혁명이 어떻게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켰는지, 그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AI 혁명이 이전 혁명들과 어떻게 다른지 함께 살펴볼게요. 역사의 패턴을 이해하면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다음 화 예고 : 증기기관부터 ChatGPT까지, 혁명의 패턴을 찾아라 - 200년간 반복된 기술혁명의 숨겨진 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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