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려받은 프러포즈
딸이 다니는 유치원에서는 아이들의 순번을 정해 발표를 하게 합니다. 우리 아이는 이번 주 꽃 발표가 있었습니다. 원래 정해진 날이 있는데 우리 부부는 칠칠치 못하게 꽃을 준비하지 못해 아이가 발표를 못했습니다. 엄마는 잽싸게 사과를 하고 다음날 발표를 위해 꽃다발을 준비했습니다. 퇴근길에 전후 사정을 들은 나는 와이프와 딸에게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딸은 애초부터 아빠와 꽃 발표를 준비할 마음이 없었기에 별 반응이 없습니다. 아내는 말은 안 하지만 속이 편치 않은 기색입니다. 맞벌이로 사는데 왜 이런 준비는 꼭 내가 해야 하는 것인지 말했던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습관이 되어버린 '거리 육아'는 나의 고질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아빠한테 말해, 얼른."이라고 말합니다. 딸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는데, 묵묵부답입니다. 딸은 아빠에게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잘 말하지 않는 편입니다. 끙끙 앓는 소리도 들리길래 말하고 싶지 않을 땐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다독였습니다. 그랬더니 엄마가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냅니다. "같은 반 남자 친구한테 반지를 받았대. 근데 그걸 다른 친구한테 줬대." 아이는 그때부터 소리를 지릅니다. 미루어 짐작컨대, 왜 말을 했는지가 아니라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했는지'를 더 억울해했을 겁니다. 와이프는 우스갯소리로 "나쁜 여자네."라고 말을 잇습니다. 아이는 참았던 울음이 터졌고 난리가 났습니다. 감당이 안 되는 와이프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집에 가면 대치 상태의 두 사람이 있을 것만 같아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다녀왔습니다.", 기척을 내고 거실을 둘러보니 아이는 일기를 쓰고 있고, 엄마는 아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의외로 평화가 빨리 찾아온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일기를 다 쓰고 나면 책을 한가득 들고 침대로 가서 책을 읽다 잠드는 것이 딸의 루틴입니다. 누워 있는 딸에게 가서 조금이라도 대화를 걸어봅니다. "꽃 발표 있는데 준비했어? 많이 떨릴 텐데, 기분 좋게 잘하고 친구들과도 좋은 시간 보내. 반지 선물 받아서 기분 좋았겠다.", 늦은 밤에 침대에 들러 몇 마디로 일상을 묻는 것 외에 아빠로서 하는 일이 없어서 창피합니다. 그저, 이 시간을 핑계로 오늘을 무탈히 보낸 아이의 작은 얼굴, 몸짓, 토끼 잠옷, 한 손에 들어오는 발바닥을 눈과 손으로 담습니다.
딸이 "그래서 내가 선물을 만들어서 줬어."라며 아까 전에 못했던 말을 해 줍니다. 친구에게서 반지를 받았는데, 반지가 없는 친구에게 반지를 줬고, 자기는 다른 선물을 만들어서 반지를 준 친구한테 보답을 해 줬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에는 세 명의 친구가 등장해 복잡하긴 했지만, 딸이 말하고 싶었던 건 친구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 자신도 할 수 있는 노력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딸이 아기가 아니라 어엿한 아이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가 준 반지에 들어 있는 마음이 무엇인지 알기에 받은 반지를 다른 친구에게 줬을 땐, 무언가 잘못된 행동을 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을 겁니다. 나에게 준 선물을 다른 친구에게 넘겨버린 딸이 할 수 있는 거라곤 한쪽에는 보답을 하고, 다른 한쪽에는 선물을 준 것이라고 믿는 것밖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짐작한 것들을 다 말하는 것이 아이의 마음을 들춰내는 일인 것 같습니다. "선물을 만들기도 하고 받기도 하고 여러 일이 많았네. 키 크니 요정과 만나러 가자." 라며 재촉하듯 방문을 닫고 나왔습니다. 더 좋은 말들을 해 주고 싶었지만, 섬세하지 못한 말솜씨로는 도움이 되는 말을 전할 수 없어 아쉽습니다. 아이가 방문을 열고 나오더니 잠깐만 있어보라며 꽃을 들고 옵니다. 이 꽃들의 이름이 궁금해서 물어봅니다. 이미지를 검색해서 찾아보니 보라색 꽃도라지와 분홍 장미입니다. "아빠, 그런데 꽃말이 뭐야?", 이름에 붙은 의미를 알고 싶어 하는 딸의 눈망울이 진심 같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꽃도라지는 변하지 않는 사랑을, 분홍 장미는 행복한 사랑을 뜻했습니다. "사실 둘 다 같은 사랑인 것 같은데?", 특별히 두 의미를 나눌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툭 던진 말인데 아이가 받아칩니다. "아니야. 변하지 않는 사랑은 내일이 되어도 사랑으로 남는 거고 행복한 사랑은 좋은 기억만 가득한 사랑이야.", 나의 눈에 다 같은 사랑이 아이에게는 서로 다른 의미의 사랑일 수 있다는 것에 괜한 부끄러움이 몰려옵니다.
아이에게 감정의 갈랫길이 생긴 것 같았습니다. 어느 것도 같지 않고, 달리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주머니가 여러 개 생긴 것 같습니다. 친구와 선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짐작했던 딸의 마음도 어쩌면 나만의 오해였나 싶습니다. 딸은 그 상황에서도 내가 모르는 깊은 속 얘기를 간직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부모의 이해로는 닿지 않는 아이의 세계가 얼마나 크고 넓을지 알 수 없습니다.
아이는 준비했던 꽃 발표를 잘 해냈습니다. 발표할 때 기분은 어땠는지, 친구들이 무슨 질문을 했는지 물었지만 여전히 아무 말도 해 주질 않습니다. 왼손에 낀 반지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 반지는 어디서 났는지 물어보려다 말았습니다. 반지를 돌려받는 대신에 친구에게 어떤 선물을 만들어줬을까 궁금하긴 했지만, 이것도 딸의 가리어진 마음 안에 간직해 둘 이야기로 남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