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제일 기억에 남는건... Maras from Croatia
다른 나라라는 생각에 설레서 그런가? 아니면 그냥 더워서 그런가? ‘두 글자로 대치된 치앙마이 밤 열차 추억’ 써놓은 것 처럼, 밤새 암내 때문에 제대로 자지도 못했는데 두 시간도 안 되어 깨어버렸다. 해는 중천에 떠 있고, 좀 있으면 공연 볼 시간… 이제 태국 음식 좀 먹어보자. 그런데 막상 나가니 (당연히) 덥잖아?
국수 같은 건 영 안땡기고, 이럴 땐 맥주지 뭐. 뭔지 모를 아침 세트에 맥주 1,000ml를 시키니 이렇게 멋들어진 통에 주는구만. 여기서 바라보는 치앙마이 거리 풍경도 꽤 좋더라. 한국은 겨울이라 꽤 많이들 왔을 것 같은데… 한국인들이 하나도 안 보이니 괜히 기분도 좋고 말야. 그럼 이제 공연장으로 한번 가볼까?
Labbfest 장소는 치앙마이 시내에서 좀 떨어진, 치앙마이 공항 부근에서 열린다. 근데 Labbfest의 뜻은 뭘까? ‘LABB’(ลาบ)은 잘게 썰거나 다진 고기와 생선을 채소와 버무린 태국 북부 음식 ‘이싼’ 요리를 뜻한다. Labbfest는 태국 치앙마이를 기반으로 한 문화 기획자 ‘스멧 요르드카우’(Sumet Yordkaw)가 2021년부터 시작한 아시아 음악 쇼케이스이자 페스티벌이다.
태국, 타이완, 일본, 한국 등 아시아의 음악 관계자들로 구성된 선정위원이 추천한 팀 중 약 20여 팀을 선정하고, 그 팀이 무대에 올라 자신의 음악을 아시아의 관객과 관계자들에게 선보인다. Labbfest는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태국 북부 지역 음악 신(Scene)을 활성화하고, 아티스트들의 플랫폼을 만들며, 뮤지션과 관계자들은 다양한 아시아 뮤지션과 음악인에게 자신을 홍보하고 친분을 나누게 된다.
타이완 친구 John은 Labbfest의 선정위원이자 프로모터였고, 태국 뮤지션 Lemmy는 태국의 뮤지션이자 기획자. 이 둘이 날 꼬셔서 난 치앙마이 행을 선택한거거든. 이번에도 존 과, 일본의 음악 기획자 니시무라 료헤이, Labbfest의 기획자 스멧 요르드카우 등 많은 음악계 인사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Labbfest가 열리는 ‘클럽 카빙’(Club Carving)은 전문 음악 클럽이 아니라 스케이트보드 클럽을 겸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내부에는 스케이팅용 언덕들이 있어서 처음엔 ‘이게 공연장으로 맞나?’ 싶었지만, 리허설 사운드를 들어보니 의외로 꽤 괜찮더라.
천장이 완전히 닫힌 구조가 아니고, 지붕 아래에 달린 환풍구가 있으며, 무대를 바라봤을 때 오른쪽과 뒤쪽이 반쯤 뚫린 구조라 저음 부밍이 적은 듯했다. 바닥에 언덕이 있어서 일정한 반사도 줄어드는 것 같고.
무대 바깥에는 페스티벌과 뮤지션 굿즈 판매대, 그리고 다양한 태국 음식을 파는 푸드코트도 몇 개 있어 제법 분위기가 났다. 무엇보다도 처음 보는 뮤지션들의 무대가 정말 좋았다.
얼터너티브 록에 일렉트로니카 등 실험적인 사운드를 붙여 묵직한 울림을 주는 치앙마이 기반 밴드 ‘Joynjoy’,
포스트펑크와 스토너 색이 진한 ‘Torrayot’, 재즈 펑크 밴드 ‘Ford Trio’ 등 처음 보는 멋진 태국 밴드들의 무대도 좋았지만, 일본 소울 뮤지션 ‘Nenashi’, DJ Krush를 떠올리게 하는 타이완 DJ ‘Chill Qin’ 같은 색다른 분위기의 팀들도 인상적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은 건 ‘Tuesday Beach Club’. 차분해 보이는데 신나는 사운드를 들려주는 그들의 무대가 정말 좋았다. 그리고, 아무래도 난 한국 사람이니까? 하핫~ ‘Tuesday Beach Club’이 한국 팀이거든. :-)
마지막 팀 ‘_Less’의 리허설은 이미 봤으니 이제 슬슬 철수해야지… 그런데 카메라에 아름다운 피사체가 잡혔다. (사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게 중심이랄까? 하하핫~~)
내가 좀 취해서 그랬나? 뭐 작업을 하거나 수작을 걸고 싶은게 아니라, 그냥 그녀를 너무 카메라에 담고 싶더라. 대뜸 말을 걸었다.
다른 마음은 없고, 그냥 너무 아름다워서 사진을 찍고 싶다.
사진은 내 SNS에 올리고, 말끔히 손봐서 당연히 너 전해줄게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알았는데, 엥? 선뜻 그러라 하더라. 물어보니 태국 친구와 놀러 온김에 공연 보러 왔다고...뭐 포즈를 시켜볼까 하다, 현장이 시끄러워 무리더라. 그래서…
그냥 자연스럽게 공연 보거나 너 하고 싶은거 하면 알아서 찍을게
사진이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보여주니 걔도 꽤 만족한 눈치. 자, 이제 사진을 보내주려면 인스타그램 ID라도 알아야겠지? 인스타 ID나 이메일 따위 물어보려니, 끝나고 뭐하냐더라… 오호? 맥주 한 잔 하나? 고민하는데 그녀의 태국인 친구가 도착해 끼어든다.
너 누구야? 왜 얘 사진 찍어?
(그녀를 향해) 너, 사진 찍어도 된다고 허락했어?
하도 훼방을 놓아서, 크로아티아 사람이라는 것과, 이름이 ‘마라스’(Maras) 걸 빼면 더는 알 수없더라. 에이 글렀다...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 하니 사진을 폰으로 옮겨 에어드롭으로 재빨리 전송해주었다. 걔는 왜 자꾸 말을 거는데 넌 방해를 하니… 쳇.
좀 아쉽기는 했지만 내일도 있으니까… 이렇게 Labbfest의 첫 날이 끝났다. 이제 맥주나 한 잔 더 하며.즐거웠던 하루를 정리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