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 사람들 지친 마음 위로하는 식당
문득, 별 이유 없이 가볍게 목을 축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시간을 보니 좀 애매하네? 천호동이나 암사동에서는 그럴 때 ‘천호 닭곰탕’으로 향한다.
천호역과 암사역의 정확히 중간쯤인 ‘해공공원’ 사거리에서 도보 5분 정도면 ‘천호 닭곰탕’ 간판이 보인다. 어제따라 저녁이 늦어져 8시가 좀 넘어 들어섰는데, 여전히 모든 테이블이 만석이었다. 두리번거리던 내게 한 손님이 말을 건넸다.
혼자요? 이리 앉으슈.
4인용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던 아저씨가 반 자리를 내어준다. 이야기를 나눌 것도 아닌데 뭐 어떤가. 일단 제육볶음과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주문하자마자 기본찬이 나온다. 천호 닭곰탕의 기본찬은 양파와 쌈장, 김치, 마늘쫑 무침. 김치와 마늘쫑은 따로 담아주지 않고, 테이블마다 있는 통에서 덜어 먹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쯤 되면 궁금할 거다. 닭곰탕집에서 왜 제육볶음을 시키는 거지?
시킨 지 얼마 안 돼 제육볶음이 나왔다. 이제 내가 제육볶음을 시킨 이유 공개. 천호 닭곰탕에서는 뭘 시켜도 닭국물이 나오거든. 이건 사실상 닭고기를 뺀 닭곰탕이다. 닭곰탕이나 닭칼국수는 뭐 당연하고, 제육볶음을 시켜도 넉넉한 닭국물이 함께 나온다. 닭백반은 닭고기 한 접시에 닭국물, 야채비빔밥을 시켜도 마찬가지다.
뭐, 제육볶음은 아는 맛이다. 상추나 고추, 마늘은 따로 주지 않지만, 주방 옆 셀프바에서 마음껏 가져다 먹을 수 있다. 아무래도 기사식당 콘셉트다 보니, 손님과 대화하게 되는 기사님들 특성 때문에 기본으로 안주는걸까? 적당히 매콤달콤한 제육볶음에 상추쌈과 술을 곁들이니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닭국물은 삼계탕처럼 진하진 않지만 닭 비린내 없고 깔끔하다. 다들 아는 그 맛.
소주에 입맛이 돌아서 그런가? 쌀밥도 반이나 먹고 제육볶음도 거의 다 비웠다. 소주도 다 마시고… 음, 고민된다. 한 10초쯤?
사장님, 닭껍질 주시고 소주 하나 더요!
5분도 안 되어 고기와 껍질이 섞인 한 접시가 새로운 뜨끈한 닭국물과 함께 나온다. (아마 닭국물을 내는 동안 함께 삶긴 듯 한) 닭껍질과 고기가 한입 크기로 썰려 있고, 요청하면 초간장도 내어준다. 하지만 나는 그냥 소금에 후추가 더 좋다. 그렇게 닭껍질과 고기에 소주를 곁들이다 보니, 불현듯 국물 생각이 확 난다.
사장님, 이거 국물 좀 더 데워주세요!
반쯤 남은 닭껍질과 고기를 국물에 부어 데우니, 그대로 닭곰탕으로 재탄생했다. 테이블에 비치된 다대기를 풀면 닭매운탕으로 변신! 이렇게 안주와 해장을 한 번에 해결하고 가게를 나섰다.
‘천호 닭곰탕’이 언제 문을 열었는지는 아무리 찾아봐도 알 수 없다. 종업원에게 물어봐도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예전에 쓴 글 *‘노포의 정의를 직접 세워보자’*에서 말한 노포의 기준에는 완벽히 부합한다. 내부는 조금 리뉴얼됐지만, 확장하지 않았고, 분위기와 메뉴 구성도 예전 그대로다.
내가 천호 닭곰탕을 처음 간 건 1996년쯤이었다. 대학 시절 친구들과 술 마시다 보면 종착지는 늘 이곳이었다. 그땐 아직 1990년대 초 노태우 정부 때 시작된 ‘심야영업 규제’가 남아 있었는데, 천호 닭곰탕은 술집이 아니라 ‘기사식당’인 만큼, 단속 대상이 아니었고 밤새 영업을 했다. 자정 넘어서까지 술 마시던 그 시절, “술병 좀 치워갈게요” 하시던 아주머니 말에 맥주컵에 소주를 따라 마시던 기억이 난다.
그때 닭곰탕 가격이 2천 원쯤이었을 거다. 넷이서 ‘1인 1닭곰탕’ 시켜놓고 소주, 맥주를 네댓 병 마셔도 2~3만 원이면 됐다. 세월이 20년 넘게 흘렀지만, 천호 닭곰탕은 여전히 맛도 가격도 착하다.
닭곰탕은 지금 8천 원. 싸다. 닭이 원래 저렴해서 그런지, 노계를 써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대흥역 근처 ‘마포 닭곰탕’, 중랑구 ‘황기 닭곰탕’ 같은 서울의 다른 닭곰탕집도 가격은 비슷비슷. 하지만 천호 닭곰탕의 진짜 매력은 닭뿐만 아니라, 닭국물에 제육볶음, 야채비빔밥 등 메뉴를 함께 즐길 수 있다는 데 있다. 게다가 1인 1메뉴 주문이면 밥은 무한리필.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Chicken Soup for the Soul)>가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IMF 시절이라서였을까.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는데, 제목의 뜻을 아는 한국인은 많지 않았다. 한국에서 감기 걸리면 콩나물국을 끓여 먹듯, 미국 사람들은 아플 때 ‘치킨 누들 수프’를 먹는다고 한다.
굳이 비교하자면, 천호나 암사 사람들에게 ‘천호 닭곰탕’ 닭국물은 우리의 치킨 누들 수프다. 그렇잖아. 특별한 제육볶음도, 유별난 국물 맛도 아니지만, 헛헛할 때, 힘들 때, 뜨끈한 밥에 고기와 소주 한 잔으로 위로받을 수 있는 곳. 그게 바로 천호 닭곰탕의 찐 매력이잖아?
•영업- 24시간 (토요일 오후 10시~일요일 오전 10시 휴무)
•Francis 추천- 닭곰탕, 제육볶음, 닭껍질
•지인 추천- 닭백반, 닭껍질 무침
덧1) 지도 앱 보면 '무뚝뚝하다', '불친절하다' 등등 불만이 종종 보이는데, 너무들 그러지 말자. 일하시는 분들이 무뚝뚝하지만 사실 그리 비난할 정도는 아닌데...
덧2) 나중에 알게 된건데, 가게사장님은 밖에서 봉 휘두르며 주차 지휘하시는 분이라 한다. 다음에 갈 때 언제 생겼는지 한 번 물어볼게. 흑...
덧3) 지인이여도 좋고 아니여도 좋습니다. 이 글에 댓글 다시는 분은, 제가 한 번 모실게요. (그럴리는 없겠지만 사람 많아지면) 추첨 통해서 저 제외 두 분 이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