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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 앞 1,000원 짜리 막걸리

안주는 산채 비빔밥과 함께 받은 할머니의 덕담

by Francis

학부 시절 인도 여행을 40일 정도 다녀온 이후, 살을 하나 세게 맞았다. 그건 지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역마살’… 그냥 비만 안 오면 집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하다못해 동네 한강공원이라도 돌아다니고 싶더라고. 이거, 역마살 맞지? 지금도 어딘가 가고 싶어 근질근질한 가운데 문득, 어느 가을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마 2002년… 10월~11월쯤이었을 거야. 찬바람이 살살 부는 데다 수업도 없는 날이다 보니, 또 이놈의 역마살이 불끈불끈 올라왔다. 라디오에서는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가 흐르고… 그래, 춘천이다! 그런데 갑자기 든 생각이…


차비는 어떡하지? 밥값은?


돈이 없었다. 주머니 사정을 보니, 하루 동안 쓸 수 있는 돈은 딱 ‘1만 원’이었다. 아무리 20년 전이라지만 그래도 춘천이면 꽤 먼 거리잖아? 밥은 또 어쩔 거고… 그래도 어디라도 가고 싶어서 여기저기 방법을 찾다 보니, 와탕카!! 조조 영화처럼 아침 7시까지, 그리고 저녁 6시부터 8시까지는 청량리–춘천 가는 제일 싼 열차가 1,200원이었나? 그랬다. 당연히 모두 입석이고. 그렇다면 이거 가능하겠는걸? 그날 계획은 이랬다.


청량리–춘천 1,200원

제과점 식빵 2,000원 (이걸로 아침, 저녁, 간식 해결)

점심 식사 3,000원

춘천–청량리 1,200원

tempImageHF4Pq6.heic 아마 이런 열차였을거야. 흠...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통일호#보존

오, 무려 2,400원이 남는구만! 뭐, 그걸로 중간에 음료수만 사 먹으면 되겠지 뭐. 새벽같이 일어나 갓 나온 식빵을 사 들고 춘천행 열차에 올라탔다. 아무래도 역마다 다 서는 기차라 그런지 춘천까지 네 시간이 넘게 걸리네? 새벽이지만 사람이 꽤 많다 보니, 한 시간이 지나서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고… 기운 좋게 출발했지만 가는 기차 안에서 지쳐버렸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이런 핑계를 만들고 있더라고.


춘천 가서 뭐 하겠어?
혼자라 닭갈비 먹기도 그렇고…


그래. 춘천까지 가서 뭐 해? 뭐 할 수 있는 것도 없잖아? 스스로 합리화한 나는 춘천 가기 전 ‘용문’ 역에서 그냥 내려버렸다. 용문사도 있고 천 년 넘은 은행나무도 있고 말이야? 하하핫~ 식빵을 거의 반 줄 넘게 수시로 집어먹었더니 배도 별로 안 고프더라고. 타박타박 역에서 용문사로 걸어갔다.

tempImageptYxz5.heic 용문사의 은행나무. 이 기자 사진 좀 못찍었네. 이 사진 보다는 더 어마어마함. 출처 - https://www.seoul.co.kr/news/life/2022/11/05/20

무작정 용문사 대웅전에도 오르고 그 앞 은행나무 어르신도 볼 수 있었다. 당시 한창 필름카메라를 쓸 때여서 아마 사진도 몇 장 찍었던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후두둑 오기 시작하더라? 오늘 비 온다는 말 없었는데… 잽싸게 용문역으로 가는 버스를 확인하다 보니 한 30분만 있으면 용문사에서 바로 서울로 가는 버스가 있더라고. 5,500원? 그냥 이거 타고 가는 게 낫겠네? 티켓을 끊으니 남은 돈은 1,000원. 그런데 문득 정류장 근처 식당을 보니 눈에 확 들어오는 게 있더라고.


막걸리 1잔 1,000원


아… 이걸 보자마자 갑자기 막걸리가 미친 듯이 마시고 싶더라. 이놈의 식빵은 왜 이리 또 맛대가리가 없게 느껴지는 건가… 식당에 들어가 “할머니, 막걸리 한 잔 주세요!” 하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응? 그냥 한 병 마셔라.


그런데 가진 돈이 1,000원뿐이니 뭐 어떡해. “돈이 없어요.” 하니 할머니가 “응? 한 병에 2,000원인데?” 하시네. 처량하게 스리… 그래서 남은 돈이 차비랑 1,000원뿐이라니 짠한 눈으로 보시더니 학생이냐고 묻더라고. 그렇다고 답하니 궁시렁궁시렁하시며 주방으로 들어가 막걸리를 떠주신다.

tempImageu9o4kl.heic 이해를 위한 사진인데, 저 동동주 사발만하게 주셨다. 와... 출처- https://www.wikitree.co.kr/articles/1044334

그런데… 냉면 사발에 주시더라고. 그리고 산채비빔밥까지… “할머니 저 비빔밥 안 시켰어요~” 하니 이렇게 답하시더라고.



많이 묵고 공부 열심히 해 판검사 돼라~


그날 마신 막걸리와 비빔밥은 인생 막걸리이자 인생 비빔밥으로 기억에 남았다. 이후 2015년쯤 무슨 일로 용문을 지나다 그 일이 생각나서 들러보니, 그 가게가 그대로 있었다. 그때 그 자리에 앉아 산채비빔밥을 시키고 두리번거려 보니 할머니는 안 계시고 중년 남자가 일을 하고 있더라고. 그분에게 나의 용문사 인생 막걸리 스토리를 이야기하니, 자신이 아들이라며 “어머니가 그 얘기 가끔 하셨다”더라? 할머니 근황을 물으니 2012년까지 일하시다가 이제는 건강이 허락하지 않으셔서 집에서 쉬고 계시다고 한다. 그날도 아들 되시는 분이 서비스라며 막걸리를 냉면 사발에 담아 주시더라고.

tempImageoZyjtY.heic 지금은 세월이 세월인 만큼, 정류장도 바뀌고 했지만... 아마 이집일거야. 이건 카카오 맵 캡처

이제는 아마 돌아가셨겠지? 안타깝게도 나는 할머니의 덕담처럼 공부를 잘하지도 못했고, 크게 성공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용문 근처를 지날 때면 그날의 따스했던 기억만큼은 마음속 보물로 또렷하게 남아 있다. 언제 한 번 날 잡아서 용문사에 가서 마음속으로 할머니께 인사를 드려야겠다.


덧1) 메인 사진에는 출처를 밝힐 수있는 공간이 없군요. 출처는 여기. '여행을 말하다'-“향긋한 봄나물 비빔밥 드시러 오세요” 집 나간 입맛도 돌아오는 산채 요리전문점"

덧2) 세월이 세월인 만큼, 아마 가격대는 많이 달라졌을거에요. 요즘에 한 끼 3,000원은 말도 안되죠? 통일호는 이미 운행을 멈췄고... 허허.

덧3) 진짜 사족인데, <춘천가는 기차>의 원작자인 김현철이 밝힌 바로는, 실제로 김현철은 당시 그 노래를 썼을 때, 춘천을 가본 적이 없었댄다. 하지만 거짓말은 아닌게, 실제로 김현철이 내가 탄 기차와 비슷한, 춘천으로 가는 최저가 기차를 타기는 했는데, 강촌역 즈음에서 내렸다는데, 가사에 '춘천에 갔다'는 내용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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