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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나비 Oct 26. 2024

모든 부부가 이럴까?

공감과 공격의 대화

아이가 폐렴에 걸려 며칠을 앓았다. 나는 아이를 전담해서 데리고 있었다. 남편은 출근을 해야 하니 다른 대안이 없었다. 출근을 하지 않는 주말에도, 나는 남편에게 교회에서 하는 1일 수련회를 가라고 하고 하루 온종일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아이가 열이 나긴 했지만 진짜 위급 상황이 오거나 하진 않았으므로 해열제를 비롯한 약과 밥만 제대로 먹이고 같이 시간을 보내주는 것 외에는 특별히 크게 할 일은 없었다. 그래도 오랜 시간 아이와 있다 보니 지치는 면도 있고, 내가 할 일을 못 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남편과 대화를 나누기 전에는 나는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아이가 집에 있는 동안, 아이가 잠드는 밤이면 나는 남편과 다투었다. 남편은 직장에서의 일이 힘들다며, 내가 말이 조금 길어질 것 같으면 피곤하다고 했다. 내가 서운한 것은 사소한 것이었다. 나를 대신해서 아이를 돌보아주는 것을 바란 것은 아니고, 그저 내가 아이를 돌보는 것에 대해서 보여주는 마음. 고생이 많다, 당신이 아이를 돌보니 아이가 빨리 낫는 것 같다(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당신이 아이를 전담해 주니 내가 걱정 없이 직장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것 같아 고맙다, 뭐 그런 말들.


하지만 내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아니면 남편의 그릇이 그만큼 작았던 까닭일까. 그것도 아니면 남편은 나름 표현을 했는데 내가 못 알아들은 걸까. 남편의 표현은 번번이 내 기대에 못 미쳤고, 내가 아쉬움을 말하면 남편은 내가 이러이러한 것도 했는데 뭐가 아쉽냐며 받아쳤다. 남편은 자신이 아이가 아픈 동안 일찍 퇴근하려고 노력한 것, 퇴근해서는 매번은 아니지만 저녁밥도 차린 것을 이야기하면서 나의 서운함을 묵살하려고 들었다. 자신이 이렇게 노력했으니 나는 서운해하면 안 되고 자신이 하는 노력에 대해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런 남편에 대해 나는 왜 내 서운함을 받아주지 않는지, 그저 미안하다고 하고 더 노력하겠다 한 마디면 싸울 일도 없는 것을 왜 자기가 한 일을 내세우며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지가 궁금하고 아쉬웠다.


그럭저럭, 나의 서운함도 쌓이고 그의 서운함도 쌓여서 어제가 되었다. 아이는 기침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나은 상태였지만 아직 어린이집 등원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편은 퇴근해서 인사조차 하지 않고 그냥 집안으로 걸어 들어왔고, 나는 남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남편은 오면서부터 피곤해했고 나는 막 청소를 마친 상태에서 저녁을 차리기 시작했다. 남편은 아이가 놀든 말든 거실에서 혼자 휴대폰을 보다가, 내가 "많이 피곤하냐.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어라."(애 앞에서 휴대폰 보지 말고 차라리 그냥 들어가 버려라)라고 말하자 정말로 들어가 버렸다. 어제 먹던 된장찌개를 끓이고 집에 있던 자투리 채소와 닭안심으로 닭안심 데리야끼 덮밥을 만들었다. 


아이는 데리야끼 덮밥을 먹지 않았다. 너무 짜다고 했다. 물을 붓고 다시 끓이는데 남편이 "그냥 물만 부으면 되지 왜 끓이기까지 하냐"고 참견을 했다. 하지만 내 생각에, 물만 부으면 맛이 섞이지 않아서 엉망이 될 것 같았다. 한 번 끓여서 새로 부은 물과 짠 소스가 섞이도록 하고 다시 아이에게 부어 주었다. 이번에는 닭고기가 말썽이었다. 아이가 질기다면서 음식을 뱉었다. 남편은 "아이는 작게 잘라줘야 한다"고 말했고 나는 가위로 고기를 있는대로 작게 잘랐다. 남편이 제가 아이를 먹이겠다고 나섰고 나는 짜다고 하는 닭고기를 좀 더 덜 짜게 만들기 위해서 고기와 채소를 더 넣고 끓였다. 


어린이집 등원을 하지 않은 아이와 하루를 보내고 집안 청소를 하고 요리까지 했다. 이쯤 했으면 이제 좀 자유로워져도 되지 않을까. 나는 남편에게, 밥을 다 먹고 나가서 작업을 하고 오겠다고 했다. 써야 할 글이 밀려 있었다. 며칠 동안 아이가 등원을 하지 않았으니, 주말에도 내내 아이를 보았으니 따로 작업을 할 시간이 없었고 나는 그래도 최대한 마감을 맞추고자 아이를 재우고 나서 매일 새벽 두 시까지 글을 썼다. 그래도 조금 글이 밀려 있기도 했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의 대답은 'no'였다. 단번에 "안 돼."라고 하는데 서운함이 들끓었다. 적어도 내 마음을 한 번 읽어주기라도 했으면, 그토록 서운하지는 않았을 거였다. 그런데 남편의 대답은 끝나지 않았다.

"마감이 언젠뎨."

"11월에 론칭이야."

"그러면 많이 남았네."

"그래도 부지런히 써 두어야 해. 나 새벽 두 시까지 매일 작업하고 잤어."

"나도 피곤해."

남편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너 피곤한 거 알지만 나도 피곤해서 오늘은 어렵겠다, 미안하다 정도의 대답이라면 나도 서운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안 돼'를 시작으로 내 작업을 멋대로 판단했고 자신은 피곤하다면서 나의 피곤함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서운함은 밤까지 쌓여 있었다. 아이가 자고 나서 나는 거실로 나갔고, 남편은 거실에 누워 있었다. 나는 남편과 다툴 마음이 없었으나, 좋은 마음은 아니었으므로 친절하게 말이 나가진 않았다. 이런저런, 기억이 나지 않는 대화 끝에 남편이 말했다.

"니가 셀모임에 애 데려가서 애가 아픈 거잖아."

지난주에, 교회에서 하는 셀모임에 아이를 데려갔었다. 아직 열은 나지 않고 기침만 하던 때였다. 어린이집도 보내고 있었고 나는 기침이 비염 때문인 줄 알았으므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셀모임이 끝날 무렵부터 아이가 열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남편은 툭하며 나에게, 내가 셀모임을 데려가서 애가 열이 나기 시작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왜 또 그런 말을 해. 벌써 몇 번째야."

그전에, 내가 남편에게 자극되는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이가 아프다, 언제 나을지 모르겠고 내일도 어린이집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등의 말을 한 것 같다. 그런데 남편이 느닷없이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자기 자극시키려고 그런 거야. 미안해. 취소."

남편이 말했다.

취소를 할 거면, 진작에 말을 안 해야 하지 않을까. 일단 말을 했으면 다음에는 같은 말을 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첫 번째는 너무 기가 막혀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두 번째도 그랬다. 그랬더니 남편은 같은 말을 계속해서 했다. 그러더니 자기가 너무 피곤하다고, 더 대화하기 힘들다고 했다. 

"나 진짜 요즘 힘들어."

남편 직장이 힘든 것은 사실이다. 예고도 없이 몰려온 일이 몇 개월째 이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알겠다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 뚜껑이 열리는 것처럼 열이 받기 시작했다.

'세상에 자기만 힘들어?'

자기가 힘든 거 알고, 그거 이해 받기를 바라면, 나도 힘든 거 이해해주어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는 자기만 힘든 거 이해해주기를 바라고, 내가 힘든 것에 대해서는 '11월 론칭이면 많이 남았다'면서 새벽 두 시까지 쓰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래놓고 지금 자기 힘든 것만 알아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잠도 오지 않고 섭섭함이 쌓여서 에베레스트산을 넘을 지경이 되었다. 나는 카톡으로 서운한 감정을 토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최악의 대화인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가다가는 내일도 내일모레도 똑같이 그는 집에만 오면 피곤하다 할 것이요 나의 서운함은 쌓이고 쌓이다가 병이 되거나 울분이 될 것 같았다. 그러다가 아파트에서 툭 떨어져 버릴 것도 같았다. 지금의 그로서는 내가 자살을 한다고 해도 조금도 동정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 불쌍하고 힘든 상황으로 여길 것 같긴 하지만.


카톡을 다 보내고 나니 정신이 났다. 내일 아침 피곤한 몸을 이끌고 출근을 할 그가 가장 먼저 볼 카톡이 이것이어선 안 될 것 같다는 깨달음이었다. 마지 이중인격자인 것처럼 나는 미안하다는 말과 좋은 하루 보내라는 말을 첨언처럼 붙였다. 그러고 나서도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아주 늦게서야 잠을 잤고 늦잠을 잤다. 아이는 나는 서둘러 일어나 아이를 등원시켰다. 그리고 등원길에 카톡을 보고 절망했다.


남편은 자기가 거절을 해서 내가 화가 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나를 이해할 생각은 있는 것인지 싶었다. 그는 거절할 것을 예상하고 요구를 해야 하지 않느냐, 자기 힘든 것을 왜 이해하지 않느냐고 했다. 여전히 그는 자신이 이해받는 것에 급급해하고 있었다. 나는 좀 더 명확하게 내 의견을 표했다. 거절한 것으로 뭐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왜 내가 하는 일을 그토록 가볍게 여기면서, 당신 하는 것만 존중받기를 바라느냐. 남편은 그 말에 미안하다는 답을 보냈으나, 이제껏 숱한 '미안해'를 하고 같은 행동을 반복해 왔던 그이기에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생각을 보고, 내 입장을 볼 뿐이다. 남편 입장에서는 다른 것이 보일 수 있다. 그러니 나와는 다른 차원에서의 서운함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서운함이 쌓이고 쌓여서 미움과 증오로 변하기 전에 말하고 푸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공감과 이해'이다. 내가 어떤 감정이든 다른 사람의 감정은 아닐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내 감정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바로 다른 사람의 사정과 감정에 대해 '곰감과 이해'의 결말에 다다를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천사라도 나만 이해 받기를 바라고 상대는 받아들이고 공감해주지 않는 상대 앞에서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이 배우자라도 결국은 마음을 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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