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말에서 느끼는 거부감
연애 때는 자신만만한 남편이 좋았다.
나는 매사에 자신감이 없었다. 아마도 그것은, 에릭슨에 따르면 엄마의 지나친 과잉보호로 독립심을 적절하게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약한 내가 행여 다칠까 봐 스스로 하는 것을 못 하게 했다. 그리고 내가 하면 일거리가 더 많이 생기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도 하셨다. 내가 어릴 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라는 말이었다. 나는 착한 딸이 되고자 가만히 있었고, 그러다 보니 내가 하는 것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
그런 나는, 나와 다른 자신만만한 남자에게 끌렸다. 여럿이 있어도 나서서 리드하는 사람, 이 사람만 있으면 뭐든 될 것 같은 그런 사람 말이다. 남편은 그런 사람이었다. 동아리에서 늘 무언가를 하자고 기획하고 동아리 구성원들을 데리고 이곳저곳에 갔다. 남편 덕분에 방학 때 동아리 친구들과 강릉으로 놀러가서 밤새 보드게임을 하면서 놀기도 했고, 살이 에도록 추운 날 일출을 보러 간다며 동해로 갔다가 칼바람만 맞고 돌아오기도 했다.
나는 나와 다른, 실패해도 괜찮지만 늘 도전하는 남편의 모습이 좋았다. 나와 사귀고 나서 남편은 내 잘못을 지적하며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내가 너의 그런 부분들을 고칠 거야." 나는 이 말이 너무 좋아서 친구에게 자랑처럼 그 말을 하기도 했는데, 그때의 친구는 황당해하면서도 "네가 좋으면 좋은 거지."라고 내 말을 받아 주었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보니, 서서히 그런 남편의 단점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은 대화가 뭐든 자기 위주였다. 내가 직장에서 실수를 한 거나, 어려운 것을 이야기하면 그것을 들어주면서 '아 그래'라고 하는 대신 '나라면 그렇게 안 하지.'라고 말을 했다. 그러니 점점 무언가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워졌다. 처음에는 그 말이 자신만만해 보여서 좋았지만, 결혼을 하고 보니 그는 이렇게 자신만만하고 잘났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인가 싶어서 위축이 되고, 그런 '잘난'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워졌던 것이었다.
그 이유일지 모르지만 우리 부부는 점차 대화가 없어져 갔다. 지금도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부부는 한 번 대화를 하면 끝을 모르고 밤새도록 대화를 하는 부부이다. 하지만 남편과는 그러지를 못 한다. 남편이 '나라면 그렇게 안 하지'라고 하면 더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물론 내가 '그래 당신은 안 그러지.'라면서 동조를 해 주면 대화가 이어지기도 한다. 연애 때는 그랬었다. 하지만 결국 '남편 잘난 이야기'로 끝나 버리니 나는 점차 동조를 안 하게 되었다. 결혼 이후로는 확실히.
조금 전에도 그런 상황이 있었다. 아픈 아이를 돌보고 난 여파일까, 내가 몸살을 앓았고 명절 연휴라 온종일 남편이 아이를 보았다. 아이가 자고 난 후, 어느 정도 회복을 한 나는 치킨을 주문했다. 남편은 텔레비전을 보고 나는 작업을 하느라, 서로 치킨을 먹으면서도 다른 공간에 있었다. 그런데 내가 콜라를 여는데 갑자기 콜라 거품이 막 일어나더니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개수대로 콜라를 가져가서 완전히 콜라 뚜껑을 열고 내려놓았다. 그리고 물티슈로 콜라가 떨어진 곳을 닦았다. 아마도 콜라를 배달하면서 오토바이가 마구 흔들리는 바람에 거품이 일어났다가 뚜껑을 열자 쏟아져 나온 것 같았다.
내가 분주해진 것을 보고 남편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콜라를 열다가 거품이 나서 닦는 중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남편이 대번에 이런 말을 했다. "그래서 나는 콜라 배달 시켰을 때 바로 안 따고 냉장고에 있는 것을 꺼내 먹잖아. 배달시킨 콜라는 나중에 따고." 그 말을 듣는데 순간 불쾌감이 마구 일어났다. 조금 전에 부글부글 올라오던 콜라 거품처럼. 어떻게 이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도 이런 말을 할까. 얼마 전에 읽었던 '나르시시스트' 관련 책이 생각나면서 남편이 이쪽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나르시시스트는 세상 모든 것의 중심을 자기로 두는 사람이다. 그들이 남을 위해 헌신하거나 칭찬을 하는 까닭은, 자신이 그 보답을 받기 위함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면이 있기는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그런 정도가 심하다. 극도로 자기중심적이기에 남의 상황이나 감정에 공감을 하지 못한다. 나는 남편이 나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아서 그런 말을 했나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그런 것치고 남편은 오늘 아픈 나를 대신해서 아이를 하루 종일 돌보았고, 그것에 대해서 자신을 알아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나르시시스트는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남편이 만약 진짜 나르시시스트였다면 내가 아프든 말든 아이를 두고 나갔을 것이니까.
그러면 대체 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그리고 나는 그 말에 왜 거부감이 들었던 것일까. 나는 문득, 이 말을 우리 아이가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콜라를 흘린 나를 보고 "나라면 이건 냉장고에 두고 다른 콜라를 꺼내서 먹을 거야. 그러면 흔들렸던 콜라도 원상태로 돌아오거든." 이렇게 말했다면. 나는 아이가 천재라며 쌍엄지를 치켜 세우고 난리 법석을 떨어댔을 것이다. 어딘가에 아이의 말을 적어두고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거부감은 커녕 아이가 이렇게 훌륭한 것이 자랑스럽기만 할 것이다.
결국 남편의 말에 대해 내가 거부감을 가진 것은 어쩌면 그에 대한 나의 자격지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같은 말을 한다고 해서 내가 화를 내거나 거부감을 가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편보다 안 그래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있는데 남편이 그 말을 하니 '잘난척하는 거야 뭐야'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사귈 때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은, 생판 남일 때는 내가 부족해도 하등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람과 결혼을 하고 가족이 되니, 이제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니 그 사람이 나보다 잘난 것이 싫고, 조금만 '나대도' 잘난척하는 것으로 들리는 것이었다.
사람을 화나게 하거나 기분 좋게 하는 것은, 그 말 자체에 있다기 보다는 그 말 이전에 그와 나의 관계에서 기인한다. 그와 나의 관계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에 따라 그 말이 판단되고 해석이 된다. 내가 남편의 말에서 가졌던 거부감은 바로 남편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감정 때문이었다. 그 감정 때문에 남편의 의도와 상관 없이 남편의 말이 '잘난척'으로 들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남편은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아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하고 나서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아까 콜라 딸 때 나한테 알려준 거야?"
"응, 콜라는 블라블라."(대충 아까 한 말)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가르쳐줘서 고마워."
그 말에 남편은 쌍엄지를 치켜세웠다. 뭐를 위한 쌍엄지일까 싶었으나 기분은 좋았다.
모든 관계는, 들어주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들어주는 것의 첫번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걷어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