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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Feb 20. 2020

한 가수가 다시 노래를 부르기까지

슈가맨 3 <더 크로스>의 무대와 이야기를 보고 나서

슈가맨을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 프로그램에서는 노래가 나오기 전에 가수와 곡을 추측해 보는 시간을 준다. 나는 힌트로 하현우가 나왔을 때 더 크로스라는 걸 짐작했다. 그는 <복면가왕>에서 더 크로스의 노래인 'Don't Cry'를 불렀기 때문이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컬 김혁건의 모습과 관중들의 반응이 어떻게 그려질지 신뢰할 수 없었기에 나는 그때부터 불안과 집중력이 높아졌다.


최근에는 목이 항상 안 좋아서 노래방에 가지도 않지만, 예전에 노래방을 가더라도 발라드는 절대 안 불렀다. 그래서 ‘Don’t Cry’도, 더 크로스도 몰랐다. 주변 친구들도 대부분 귀만 유학파라서 팝송만 불렀다. 더 크로스가 아닌 건즈 앤 로지즈의 'Don't Cry'를 즐겨 들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나는 더 크로스를 라이브 무대에서 처음 접했다.


2017년 말, 나는 학교의 장애인권동아리 회장이었다. 우리 동아리에서는 위에이블이라는 스타트업의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성수동 배리어프리 지도를 함께 만들었는데, 그 프로젝트는 서울시 무장애 여행 워크숍에서 발표됐다. 서울시청 시민청의 한 홀에서 진행된 그 워크숍에 축하 공연으로 온 사람이 더 크로스의 보컬 김혁건이었다.


사고와 관련된 이야기를 그때 들었는지, 이후에 기사로 읽었는지는 기억이 불분명하다. 하지만 이 사람이 가수로 살다가 사고로 인해 노래를 이전처럼 부르기 어려워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가 보장구를 사용하여 복식호흡을 한다는 사실도. 평소에는 보기 쉽지 않은 보장구라서 기억에 남았을 뿐, 그의 무대 자체가 많이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당시 나는 ‘장애 극복’ 서사에 대한 반감을 많이 갖고 있었는데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초점은 조금 달라졌다) 한편으로는 ‘장애를 극복하고 노래하는 가수’ 같은 이미지가 떠올라서 어딘가 마음이 편하지 않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학교 안의 바쁜 일정으로 곧 이 일을 잊었다.


그리고 며칠 전, <슈가맨 3>를 보고 나는 그때의 판단을 돌아봤다. 장애인의 이야기는 자주 장애 극복 서사로써 비장애인에게 희망을 주는 소위 ‘감동 포르노’로 소비되곤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나는 이런 사례들에 대한 경각심 때문에 정작 앞에 있는 하나의 삶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의 우려와는 달리, <슈가맨>은 가수 김혁건 님의 이야기를 신파로 소비하지 않았다. 물론 눈물 흘리는 이들은 있었고, 그중 누군가는 적절하지 못한 이유로 눈물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진행자든 자막이든 그를 두고 감동이나 극복 따위의 어휘를 사용하지 않았고, 그의 사고나 장애를 비극적으로 강조하지도 않았다. 영상 효과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움직임이 특히 시선을 끄는 순간은 무대로 나올 때였는데, 함께 노래하는 친구가 음악이 멈춘 동안 휠체어를 밀며 무대 중앙으로 함께 나왔다. 음악이 없고, 모두가 가수에게 집중하던 그 순간. 내 기억에 평소 슈가맨에서는 음악이 끊기지 않고, 가수가 계속 노래를 부르며 앞으로 나왔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가까이 갈 때 도움이 필요하고, 활동지원사가 별도로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 정적은 필연적이었다.


나는 궁금했다. 사람들은 그 '어색한 정적'을 어떻게 느꼈을까? 누군가는 불안했을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당황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기서 앨리슨 케이퍼라는 장애학자가 제안한 '불구의 시간(Crip time)'이라는 개념이 떠올랐다. 여기에는 장애인들은 어떤 일을 하거나 이동할 때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 시간을 생각할 때 조금 더 유연하게, 넉넉하게 생각하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물론 더 풍성한 의미가 있지만, 여기서는 이 정도만 사용하기로 한다). 노래를 하다가 멈추는 시간, 무대로 나오는 시간, 무대로 나온 후에 노래할 준비를 하는 시간은 평소 슈가맨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노래를 불렀고, 무대에 나오지 않던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꺼냈다. <슈가맨>은 원래도 가수로서 활동을 끝냈거나 오랫동안 멈춘 사람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출연자가 다소 비극적인 이야기를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가수의 길을 포기해야 했던 이들이 있었고, 그들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그 이상의 신파는 없었다.


가수 김혁건 님의 이야기에서 휠체어와 복식호흡도구는 불행의 상징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사지마비 자체도 불행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다만 갑자기 끊긴 그의 가수로서의 삶이 비극이었다. 사고 후에 목소리를 내기가 힘든 1년을 보내고, 그 이후에도 애국가를 부르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포기하고 싶은 날도 많았다고 한다. 혼자 죽을 수가 없으니 옆에 있는 친구에게 자기를 죽여달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혼자서 모든 역경을 헤쳐 나가며 그 모든 상황을 '극복'하지도 않았다. 가족과 친구는 그에게 가수를 포기하지 말라고 하며 그와 함께 새로운 몸의 사용법과 새로운 관계, 새로운 녹음 환경을 고민했다. 얼떨결에 배를 직접 누르는 복식호흡 방식을 발견하고, 적절한 도구를 통해 이를 혼자서 조절할 수 있도록 했다. 한 번에 몇 시간씩, 최소 한두 구절씩은 녹음하는 방식이 어려워지자 한 음절씩 녹음했다. 8개월이 걸려도 빠른 녹음을 강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노래를 완성하는 것보다도 가수의 몸을 침해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모든 과정의 중심에는 새로운 몸이 있었다.


장애 극복 서사는 몸을 지우기에 문제다. 극복은 몸을 제도에 통합하는 과정이고, 여기서 몸은 단지 그의 노력을 강조할 때만 잠깐 등장할 뿐이다. 극복 서사 속에서 장애는 그 자체로 곧 삶의 단절이기에 장애를 갖고 있어도 장애가 없는 듯 행동해야 한다(이런 기사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슈가맨>에 등장한 그의 이야기는 전혀 달랐다. 적응한 건 그의 몸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음악 작업 방식이었다. 다시 노래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한 가수도 세상이 아닌 자신의 몸과 자신의 노래에 적응했다. 그가 새로 사용하게 된 도구들은 모든 몸의 불편을 단번에 해소해 주면서 몸을 지우는 첨단 기술이 아니었다. 그의 주변은 '엉터리 사이보그'가 된 그의 몸에 통합되었고, 그 과정을 쭉 함께한 친구는 그가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마치 활동지원사처럼.


사고와 그로 인한 사지마비는 가수로서 그의 삶을 끊어 놓기도 했지만, 새로운 몸에 익숙해지면서 그의 삶은 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가수로 통합되었다. 가수이거나, 장애인이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니었다. 사고 이전의 삶과 사고 이후의 삶이 그의 몸 안에서, 관계들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었다. 그가 다시 노래할 수 있게 된 데에 의료적 조치도 당연히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주변의 지지와 믿음, 그리고 그의 새로운 몸을 중심으로 재편된 삶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 중 가족과 친구가 모든 일을 도왔다는 것에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어머니가 편히 주무시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행복했다는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는 분명 복지 체제의 부재를 보여준다. 가족과 친구는 그를 진심으로 아꼈기에 그렇게 간호하고 돌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복지와 돌봄이 모두 사적 영역에 우선 맡겨지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다. 그런 헌신적인 사적 관계가 없는 이는 이런 사고를 겪은 후 어떻게 될까. 이는 불행이나 감동이 아닌 불평등의 장면이었다.


<슈가맨>은 가수 김혁건 님의 이야기를 과장 없이, 다른 가수들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담아냈다. 장애를 갖게 된 가수와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리고 기존의 방식이나 세상보다 하나의 삶을 중시한다면 접근성을 고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그러나 동시에 복지 제도가 닿지 못한 하나의 사례를 보여주기도 했다. 만약 복지 제도가 완비되어 있다면 어머니가 쉬는 모습이 그렇게 감동적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무대에서 친구가 연주할 때 활동지원사가 그의 휠체어를 밀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슈가맨>에 나온 '불구의 시간'은 장애를 가진 몸과 복지의 사각지대를 동시에 보여줬다.


한 가수가 다시 노래를 부르기까지 무엇이 필요했는지, 더 많은 몸이 노래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고민을 이어나가자. 손에 잡히지 않는 치료를 외치는 대신, 당장 앞의 있는 몸과 부대끼며, 당장 여기 있는 몸으로 살아가는 일을 고민하기. 이 가수의 이야기가 준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비장애인을 위한 영감이 아닌 다른 가수들과 장애인들을 위한 좋은 선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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