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취향은 작은 국적 -나는 이런 온도로 산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그 질문을 들으면,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나는 낮은 조도의 카페에서, 잔에 남은 에스프레소의 미온과 피아노 선율이 섞이는 순간을 좋아합니다.”
이 한 문장 안에 내가 거의 다 들어 있다.
조용히 머무는 걸 좋아하고, 사소한 온도에 마음이 움직이고, 세상을 감각으로 기억하는 사람이라는 것.
말의 속도, 감정의 깊이, 세상을 대하는 리듬까지.
취향은 스펙이 아니라 기후다.
기후는 그 사람의 내면에 머무는 온도, 습도, 그리고 빛의 방향이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 사람의 기후를 보면 된다.
나는 그 기후를 기록하며 사는 사람이다.
하루의 공기, 마음의 흐림과 갬, 사람 사이의 바람결 같은 것들.
글을 쓴다는 건 결국 내 안의 기후를 관측하고, 그 날씨를 문장으로 남기는 일이니까.
우리는 모두 작은 나라를 하나씩 품고 산다.
입맛의 국경, 색의 국경, 향의 국경.
그 경계 안에서 우리는 조용히 안도하고, 천천히 자신을 알아간다.
커튼을 반쯤 친 오후의 빛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체로 말의 볼륨이 낮고,
매운맛 없이는 밥이 끝나지 않는 사람은 인생의 결정을 오래 미루지 않는다.
그렇게 취향은, 삶의 패턴을 번역한 언어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는
“나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싶은가”의 다른 말이다.
취향은 사소해 보이지만,
그 사소함이야말로 나를 잃지 않게 하는 마음의 울타리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취향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의 언어라고.
우리가 ‘카뮈’를 떠올릴 때, 그가 쓴 <이방인>의 줄거리보다
태양의 뜨거움과 바다의 짠내가 먼저 스며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알제리의 해변, 땀에 젖은 셔츠, 눈부신 햇빛 아래에서
인간의 무의미를 체감했던 뫼르소의 침묵.
카뮈는 그 잔혹한 햇빛 속에서 인간 존재의 불합리함(부조리)을 포착했다.
그의 문장은 논리가 아니라 온도로 기억된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떠올리면
먼저 재즈 브러시의 리듬, 고양이의 걸음, 밤의 정적, 그리고
“잘 지내고 있나요?”라고 속삭이는 듯한 남자의 독백이 들린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무엇을 말했는가’보다
‘무엇을 좋아했는가’로 남는다.
그가 사랑한 건 커피의 쓴맛, 조용한 음악,
그리고 세상과 적당한 거리에서 유지되는 고독이었다.
좋아함은 인물의 품격을 결정한다.
카뮈가 태양의 잔혹함 속에서 인간의 의미를 질문했다면,
하루키는 커피 향과 재즈의 리듬 속에서
그 고독을 서정으로 바꾸었다.
결국 취향이란 존재의 질감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할 때
그건 그 사람 생각 때문만이 아니라,
그 사람 곁에 머물던 공기의 온도,
그 사람의 기후까지 기억하기 때문이다
요즘의 자기소개는 이력서가 아니라 감성의 프로필이다.
“고양이와 커피, 그리고 새벽의 라디오.”
“책과 운동, 사람보다 풍경.”
“작은 불빛 아래 글을 씁니다.”
이런 짧은 문장들이 곧 ‘나’를 말해준다.
사람들은 더 이상 직함이나 소속으로 자신을 정의하지 않는다.
대신,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시간에 숨 쉬며, 어떤 감도를 가진 사람인지로 자신을 표현한다.
그래서 요즘의 자기소개는 스펙이 아니라 취향의 언어다.
“나는 이런 결을 가진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어요.”
그 말은 결국, ‘결이 맞는 사람’을 찾는 선언이다.
좋아하는 색감, 문체, 사진의 온도, 커피 향 같은
사소한 감정의 결들이 알고리즘이라는 강을 타고 흘러 서로를 찾아간다.
책을 좋아하고, 운동을 좋아하고,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보이지 않는 인연의 물결 위에서 조용히 만난다.
어쩌면 이것은
‘관계의 진화’가 아니라, 감성의 진화일지도 모른다.
내 지인은 오래된 도서관의 냄새를 사랑한다.
그녀는 그 향을 “종이와 시간, 그리고 사람의 온기가 뒤섞인 냄새”라고 말했다.
“새 책 보다 오래된 책 냄새가 좋아요.
그 안엔 누군가의 손때와 숨결이 남아 있잖아요.”
그 말속엔 그녀의 인생관이 숨어 있었다.
늘 새로움을 좇기보다, 이미 지나간 시간 속의 깊이를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
결과를 빨리 내기보다, 과정 속에서 쌓이는 흔적과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
그녀에게 ‘좋아함’이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삶을 천천히 음미하는 방식이었다.
또 다른 지인은 사진을 찍을 때, 늘 해질 무렵을 기다렸다.
“그 시간대의 그림자가 좋다”라고 했다.
그림자는 어둠이지만, 동시에 존재의 증거이기도 하다.
그는 말했다.
“사람은 빛을 받는 방향보다, 어떤 그림자를 데리고 사는지가 더 흥미로워요.”
그의 말에서 나는 한 사람의 철학을 보았다.
그는 완벽하게 빛나는 순간보다, 그늘 속에서도 진짜 빛을 잃지 않는 순간을 사랑했다.
결국 취향은,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태도이자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스레드(Thread)에서 어느 날 이런 문장을 보았다.
“요즘 제 하루를 버티게 하는 건, 새벽의 공기와 라디오의 온도예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좋아요’를 누르는 데서 멈추지 않고, 댓글을 달았다.
“그 시간대의 공기를 좋아한다는 말, 이상하게 마음이 닿네요.”
그 짧은 문장으로 대화가 시작됐다.
그 사람은 나와 같은 라디오를 듣고 있었고,
이후 우리는 서로의 글을 꾸준히 읽었다.
SNS에서의 취향 공유는 단순한 피드 구경이 아니다.
그건 감성의 동맹, 그리고 언어의 동류의식이다.
비슷한 문장에 머무는 사람들은 결국 같은 세계를 산다.
마음의 결이 닮은 이들이
디지털의 강 위에서, 조용히 서로의 등불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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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대학교 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Daniel Gilbert)는 말했다.
“행복은 예측 가능한 패턴 속에서 강화된다.”
즉,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반복해서 경험할 때,
우리의 뇌는 “지금은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낸다는 뜻이다.
이때 활성화되는 곳이 바로 전내측 전두엽(ventromedial prefrontal cortex) - 감정의 균형과 안정감을 담당하는 영역이다.
그래서 단순히 ‘좋아하는 걸 자주 떠올리는 행위’만으로도
몸은 이완되고, 마음은 안정된다.
좋아하는 커피 향, 마음이 놓이는 음악,
익숙한 산책길의 빛 같은 순간들이
우리의 뇌에게 속삭인다.
“괜찮아, 여긴 네가 좋아하는 세계야.”
결국 ‘좋아한다’는 감정은 단순한 기분 표현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회복시키는 하루의 루틴이다.
심리학의 시선으로 보면,
취향은 자아가 세상과 연결되는 감각의 닻(anchor)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기억하고 반복하는 일은,
세상 속에서 ‘나’를 안정적으로 느끼게 하는 감정의 뿌리다.
그러니까 “나는 이것이 좋다”는 문장은 결국 이렇게 번역된다.
“나는 이렇게 살아가고 싶다.”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호의 과잉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을 좋아해야 할지 모른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매일 더 많은 선택지 속에서
무엇을 좋아해야 하는지도 헷갈리는 시대를 살아간다.
성과와 효율, 자기 계발과 비교의 언어들이
감정의 결을 지워버린 시대.
그래서 지금,
‘좋아하는 것’을 다시 정의하는 일은
자기 존재를 되찾는 가장 사적인 저항이다.
“나는 이것이 좋다.”
이 단순한 문장은
“세상이 뭐라 해도, 나는 이렇게 살겠다.”는
삶의 품격 선언문이 된다.
좋아함은 그렇게,
타인의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감각을 지켜내는 조용한 철학이자, 내면의 민주주의다.
1단계. 오감으로 느낀 오늘의 ‘좋아함’ 기록하기
• 눈이 머문 장면
• 귀가 멈춘 소리
• 발걸음을 멈추게 한 향기
• 입안의 온도
• 손끝의 질감
2단계. 이유를 덧붙이기
“나는 낮은 음악 소리를 좋아한다.
그 속에서는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으니까.”
좋아하는 이유를 적는 순간,
그건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의식의 기록이 된다.
3단계. 나의 취향 자서전 만들기
“나는 새벽에 글을 쓰고, 흰 그릇에 담긴 따뜻한 밥을 좋아하며,
오래된 카페의 나무 냄새 속에서 평온을 느낀다.”
이 한 문장 안에는 당신의 세계관이 담겨 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감정의 국적, 당신만의 기후다.
당신이 매일 적어내는 이 작은 기록들이,
결국 당신이 살아온 감정의 연대기가 된다.
취향은 마음의 방어선이다.
그건 나를 잃지 않기 위한 온도의 장치다.
누군가는 속도를 선택하고,
누군가는 향을 선택하며 산다.
그리고 나는,
좋아함의 결이 깊은 사람을 좋아한다.
그의 하루는 품격 있고,
그의 마음은 조용하지만 단단하다.
좋아하는 것을 다시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회복 중이다.
감정은 그렇게,
‘좋아함’을 통해 자신의 온도를 되찾는다.
사람은 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의 총합으로 살아간다.
그 총합이 바로 당신의 나라,
그리고 당신의 여권이다.
그곳에는 당신이 머물렀던 시간,
사랑했던 사람들,
그리고 당신만의 온도가 기록되어 있다.
그 나라의 언어는 오직 당신만이 구사할 수 있다.
누구도 대신 써줄 수 없는 문장,
그게 바로 당신의 ‘좋아함’이다.
좋아함을 잃지 말 것.
그건 사랑보다 오래가는,
삶의 품격이자 마음의 국적이다.
“나는 ___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___하니까.”
이 문장을 오늘 써보세요.
당신이 가진 그 한 문장이,
이미 하나의 세계입니다..
참고 문헌
1. 알베르 카뮈, 『이방인』, Gallimard, 1942.
2.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코단샤, 1987.
3. 한병철, 『피로사회』, 문학과 지성사, 2012.
4. 대니얼 길버트, Stumbling on Happiness, Vintage Books, 2007
참고 해설
<이방인> ~ 인간의 감정과 실존을 냉정하게 응시하며, “감정의 감각”이 사라진 현대인을 비춘 작품.
• <노르웨이의 숲>.- 음악과 고독을 통해 ‘좋아함’의 감정이 어떻게 자아의 리듬을 회복시키는지를 보여준다.
• <피로사회>- 성과와 과잉 긍정의 시대 속에서 ‘무엇을 좋아해야 할지 모르는 인간’을 철학적으로 분석한 저서.
• <Stumbling on Happiness> - 반복된 선호와 익숙한 경험이 뇌의 안정과 행복을 강화한다는 심리학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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