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라이크를 좋아해

4장 거리의 문법 - 현관과 안방 사이에서

by 유혜성

4장 거리의 문법 - 현관과 안방 사이에서


문(門)은 관계의 문장 부호다.

닫힘과 열림, 시작과 끝이 한꺼번에 스며 있는 쉼표 같은 존재이다.


우리는 매일 문 앞에 선다.

현관문 앞에서, 카페의 유리문을 밀며, 스마트폰 채팅창의 ‘읽음’ 표시 앞에서.

그중 어떤 문은 스르륵 열리고, 어떤 문은 몇 초 이상 망설인다.

관계란 결국, 문 앞에서의 망설임의 연속이다.


아마도 ‘좋아함’이란 그 망설임의 미학일 것이다.

너무 멀지도, 너무 깊지도 않은 자리.

현관 앞, 신발을 벗기 전 그 따뜻한 공기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리듬을 조심스레 맞춰 본다.


현관 앞의 대화 -밀고 당기기의 미학


문에는 언제나 두 개의 동작이 있다.

밀기(Push)와 당기기(Pull).

그 단순한 몸짓 안에 관계의 모든 심리가 숨어 있다.


누군가는 조금 더 안으로 들어오길 원하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 머물러주길 바란다.

한쪽은 열려 있고, 한쪽은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다.


현관은 그 두 감정이 마주치는 자리다.

닫힘과 열림, 거리와 온기가 교차하는 그 경계선 위에서

사람들은 잠시 숨을 고른다.


필라테스 수업이 끝나면 늘 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회원들이 신발을 신으며 말한다.

“선생님, 오늘 너무 좋았어요. 다음 주에 봬요.”

나는 문을 잡고, 그들은 복도 쪽으로 나가며 웃는다.

그런데 꼭 그때, 한 명이 다시 돌아본다.

“아, 그런데 선생님~“


그 한 마디가 시작되면 문은 닫히지 않는다.

반쯤 열린 틈 사이로 웃음과 진심이 오간다.

나가려는 사람과 배웅하는 사람 사이,

한 발의 거리 속에서 마음이 가장 많이 움직인다.


밀 듯이 떠나고, 당기듯이 머문다.

그 사이가 바로 좋아함의 온도다.


전화 통화도 현관 같다.

서로 할 말을 다 했는데도

“다음에 만나서 얘기하자.”

“그래, 다음에.”

그 말을 남기고도 쉽게 끊지 못한다.


사실 ‘다음에 만나서 얘기하자’는 말은 작별이 아니다.

그건 마음의 문턱에 걸린 초대다.

대화가 끝난 뒤에도 이어지는 정적,

그 침묵의 3초가 말보다 더 많은 온도를 남긴다.


누군가의 마음 문 앞에는 늘 그런 여운이 있다.

닫힌 듯 열려 있는 문,

끝난 듯 이어지는 말.

좋아함은 바로 그 여백의 온기에 머무른다.


현관은 밀고 당기는 기술을 가르친다.

너무 밀면 상대는 멀어지고,

너무 당기면 숨이 막힌다.

적정한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볼 때

문은 닫히지 않는다.


좋아함이란 결국

‘들어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여유와

‘머물러도 괜찮다’는 신뢰가 함께 있는 감정이다.

그 두 마음이 교차하는 곳, 그곳이 바로 현관 앞의 대화다.


문은 물리적 공간이지만, 마음의 문은 감정의 리듬으로 열린다.

우리가 현관 앞에서 멈춰 서는 이유는,

닫히지 않으려는 마음과 너무 열리지 않으려는 마음이

그 안에서 조용히 타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좋아함은 바로 그 ‘사이의 여백’ 속에서 깊어진다.

함께 있되 붙잡지 않고, 멀어지되 잊히지 않는 그 중간에서.


마음의 구조 - 관계의 집을 짓는 법


사람 사이에도 집의 구조가 있다.

누군가는 거실 같은 관계를 맺고,

누군가는 안방 같은 관계를 나눈다.

그리고 그 사이엔 언제나 현관이 있다.

현관은 안과 밖을 잇는 문이자,

너와 내가 서로의 세계를 조심스레 탐색하는 완충지대다.


현관을 넘는다는 건 단순히 공간을 통과하는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의 공기, 리듬, 체온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쉽게 초대하지 못하고,

또 어떤 이는 끝까지 신발을 벗지 못한다.


우리가 머무는 관계의 깊이는,

서로의 현관 앞에서 얼마나 오래 설 수 있는가로 드러난다.

들어가지 않아도 편안하고,

나가지 않아도 숨 막히지 않는 거리,

그게 바로 좋아함이 자라는 구조다.


정신분석가 도널드 W. 위니컷(Donald W. Winnicott)은

‘전이적 공간(Transitional Space)’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¹

그는 완전히 합쳐지지도, 완전히 분리되지도 않은

그 ‘사이의 공간’에서 인간의 자아가 건강하게 자란다고 말했다.

현관은 바로 그 자리다.

‘나’와 ‘너’가 무너지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숨이 닿을 수 있는,

심리적 완충지대이자 관계의 생명선이다.


좋아함은 그 사이의 온도에서 가장 오래 머문다.

너무 가까워서 타버리지 않고,

너무 멀어서 식어버리지 않는,

그 미묘한 온도의 균형 속에서.


인간관계의 온도 - 거리의 문법을 배우는 일


인류학자 에드워드 T. 홀(Edward T. Hall)은

인간의 상호작용을 네 가지 거리,

친밀, 개인, 사회, 공적 거리로 구분했다. ²


그 거리에 따라 목소리의 크기, 손짓의 빈도,

심지어 체온의 감지까지 달라진다고 했다.


우리가 불편함이나 안도감을 느끼는 이유는,

서로의 감정 거리가 맞거나 어긋났기 때문이다.

너무 다가오면 숨이 막히고,

너무 멀어지면 마음의 온기가 식는다.


좋은 관계는 거리의 감각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란다.

사랑이 안방이라면,

좋아함은 현관 앞의 햇살이다.

서로를 마주 보되 한 발 물러서 숨 쉴 수 있는 자리.

밀착이 아니라 존중으로,

합침이 아니라 여백으로 존재하는 온도다.


철학의 문턱 - 닫힘과 열림 사이에서


철학자 게오르크 지멜(Georg Simmel)은 말했다.

“서로를 잇기 위해선 먼저 구분해야 하고,

구분하기 위해선 다시 연결해야 한다.”³


관계도 그렇다.

너무 가까우면 경계가 무너지고,

너무 멀면 마음이 식는다.

좋은 관계는 구분과 연결이 맞닿는,

닫힘과 열림이 공존하는 자리에서 자란다.


우리가 현관 앞에서 잠시 멈추는 이유도 같다.

닫으면 편하지만, 완전히 닫기엔 아쉽고

열면 반갑지만, 너무 열면 불안하다.

그래서 현관은 단순한 문턱이 아니라,

서로의 속도와 온도를 조율하는 감정의 완충지대다.


그 문 앞에서, 사람은 조금 망설이며 배운다.

‘이만큼이면 괜찮다’는 거리,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온도를.


시인이자 철학자인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공간의 시학>에서 이렇게 말했다.⁴

“집의 문지방은 머무름과 이동이 교차하는 심리적 장소다.”


문지방은 경계이면서, 동시에 초대다.

안으로 들어가면 안심이 되지만,

세상과의 연결은 닫힌다.

반대로 문 앞에 서면 세상과 이어지지만,

마음 한구석이 조금 시리다.


우리는 그 모순된 감정 속에서 자란다.

닫히지도, 완전히 열리지도 않은 그 사이

좋아함은 바로 그 경계의 온기에서 깊어진다.


관계의 집, 마음의 구조


좋아함은 벽을 세우는 일이 아니라,

창문을 여는 일이다.

닫혀 있지 않으면서도,

아무나 들이지 않는 절묘한 균형 속에서

마음은 비로소 안전해진다.


사람 사이에도 구조가 있다.

문이 있고, 복도가 있고, 거실이 있고, 안방이 있다.

그 모든 방을 연결하는 건

벽이 아니라 현관의 공기다.


우리가 문을 열고 닫으며 배우는 건

공간의 기술이 아니라, 관계의 문법이다.

좋아함의 구조는 곧, 마음의 건축학이다.

자기 탐색 루틴 - 내 관계의 거리 재보기


좋아함의 기술은 결국 자기 인식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어떤 거리로 마주 서 있는지 살피는 일은

감정의 방향을 조율하는 가장 현실적인 연습이다.


왜 이 루틴을 하는가?

거리는 물리적인 단위가 아니라, 감정의 온도 단위다.

내 마음 안에 누가, 어떤 위치에 머무르고 있는지를 의식하는 순간

좋아함은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배려의 기술로 변한다.


1. 오늘, 당신 마음의 집엔 누가 들어와 있나요?

• 현관 앞에 선 사람은 누구인가요?

• 거실에 앉은 사람은 누구인가요?

• 안방까지 초대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나의 정서적 공간 지도를 그려보세요. 누가 어디에 있는지를 인식하는 것이 감정의 첫 정리입니다.


2. 거리 설정 문장 써보기

• “당신을 좋아하지만, 지금 이 거리가 좋아요.”

• “나는 네가 현관에 머물러도 편안해.”

• “다음엔 거실에서 더 얘기하자.”

왜? 말로 거리감을 표현하는 순간, 우리는 감정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반응이 아닌 의식으로, 너와 나 사이의 온도를 조율하는 연습이에요.


3. 현관 의자 놓기

• 급히 내보내지도, 성급히 들이지도 말고 - 현관 앞에 의자 하나를 두세요.

• 왜? 관계는 머무름의 시간이 깊이를 만듭니다.

문을 반쯤 열고 앉아 있을 수 있을 때, 그 시간은 감정의 휴식이 됩니다.


좋아함은 결국 멈춤의 예술이다.

서두르지 않고, 머물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만이

관계를 지속 가능하게 만든다.


라이크 노트 - 혜성쌤의 감정 수업


좋아함은 침입이 아니라 초대다.

사람 사이의 거리는 숨을 만든다.

그 숨이 있어야 관계는 오래간다.


사랑은 안방에서 속삭이지만,

좋아함은 현관에서 웃는다.

그 웃음이 오래 남으면,

언젠가 마음의 문은 스스로 열린다.


문은 닫히기 직전에 가장 많은 이야기를 품는다.

좋아함도 그렇다.

완전히 들어가지 않아도,

그 사람의 향은 이미 닿아 있다.


좋아함의 기술은,

밀고 당기기를 아는 사람의 품격이다.

그리고 그 품격은,

상대의 리듬을 존중하며 기다릴 줄 아는 감정의 근력이다.


좋아함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서로의 공간을 지켜주는 예의이자,

관계를 오래 숨 쉬게 하는 하나의 기술이다.


“좋아함은 사랑의 전 단계가 아니라,

사랑을 지속시키는 또 하나의 형태다.”



참고

1. 도널드 W. 위니컷, 『놀이와 현실』, 열린 책들, 2021.

2. 에드워드 T. 홀, 『보이지 않는 차원』, 세진사, 2001.

3. 게오르크 지멜, 「다리와 문」, 『지멜 사회학 선집』, 문학과 지성사, 2022.

4.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민음사, 2019.

5. 권수영, 『관계에도 거리 두기가 필요합니다』, 북이십일, 2022.


보충 설명:

위니컷의 전이적 공간은 ‘아이와 어머니 사이의 놀이’에서 출발하지만,

성인 관계에서도 ‘서로 다른 세계가 공존하는 감정의 틈’을 뜻합니다.

홀의 거리 개념은 인간관계의 온도 조절법을 알려주죠.

지멜의 다리와 문은 구분과 연결의 철학,

바슐라르는 공간이 감정을 담는 그릇임을 이야기합니다.

결국 좋아함이란, 그 모든 이론이 교차하는

현관의 감정학인 셈이에요.

https://www.instagram.com/comet_you_

https://www.threads.com/@comet_you_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