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몸이 먼저 안다 - 감각이 삶을 되살리는 기술
삶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머리는 늘 복잡하지만,
몸은 언제나 간단한 답을 낸다.
“좋으면 반응하고, 싫으면 멈춰라.”
행복도 마찬가지다.
그건 멀리 있는 목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몸이 느끼는 미세한 온도 속에 있다.
햇살이 팔목에 닿는 따스함,
갓 지은 밥 냄새,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빗소리,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의 웃음.
이 모든 감각이
사실은 우리를 매일 살리고 있다.
좋아함은 감정이 아니라 몸의 리듬이다.
몸이 먼저 반응하고, 마음이 그 뒤를 따라갈 때,
삶은 다시 숨을 쉰다.
“언제 가장 편안하세요?”
수업이 끝난 후, 나는 회원에게 물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
“기구 위에 누워서 마지막 숨을 내쉴 때요.
그때는 아무 생각도 안 나요.”
그 말이 참 좋았다.
그건 단순한 쉼이 아니라,
하루 동안 흩어졌던 몸의 조각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이는 순간이었다.
몸은 언제나 기억한다.
긴장했던 어깨,
다급했던 숨,
그리고 마침내 찾아오는 느린 호흡의 평화.
그건 설명할 수 없는 안도감이다.
생각이 멈추고,
몸이 먼저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시간.
좋아함은 머리의 판단이 아니라
몸이 느끼는 안도의 신호다.
몸이 편안해야
마음이 비로소 따라온다.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는 말했다.
“감정은 몸의 언어이고, 이성은 그 늦은 번역이다.”¹
우리가 ‘좋아한다’고 느낄 때,
몸은 이미 알고 있다.
아니, 몸은 언제나 마음보다 먼저 깨닫는다.
심장이 미세하게 박동을 바꾸고,
피부의 온도가 한 겹 더 올라가며,
숨이 천천히 리듬을 찾는다.
그건 논리도, 계획도 아니다.
몸이 스스로 알아차리는 삶의 반응이다.
좋아하는 사람의 웃음,
그의 목소리 톤,
손끝의 떨림,
스치듯 닿은 어깨의 온도.
그건 전류가 아니라, 존재가 깨어나는 신호다.
이건 단순한 사랑의 감정이 아니라,
좋아함이 삶을 깨우는 순간이다.
그때,
도파민이 기쁨을 데우고,
세로토닌이 마음을 안정시키며,
옥시토신이 연결의 회로를 켠다. ²
좋아함은 ‘호르몬의 불꽃’이 아니라
‘삶의 회로’를 다시 켜는 스위치다.
몸이 반응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살아난다.
나는 비를 좋아한다.
비가 오는 날이면,
세상이 잠시 숨을 고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창문을 살짝 열면
빗방울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며
공기와 마음을 동시에 식혀 준다.
비는 세상의 소음을 걸러내는
자연의 필터다.
그 일정한 리듬 속에서
하루의 복잡한 생각들이 천천히 정리된다.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대체로
자기 안의 감정을 조용히 듣는 사람이다.
그건 우울이라기보다 집중에 더 가깝다.
우울조차 나쁘지 않다.
그건 아직 살아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몸이 슬픔을 느낀다는 건
감각이 죽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시인 릴케(Rainer Maria Rilke)는 말했다.
“모든 슬픔은 결국 미래의 기쁨이 되는 씨앗이다.”³
빗소리는 바로 그 씨앗이 자라나는 소리다.
세상의 먼지를 씻고,
우리의 감정까지 세척하는 소리다.
그래서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 안의 우울까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그 우울 속에서
새로운 평화를 길어 올리는 법을 알고 있다.
나는 밥 짓는 시간을 좋아한다.
쌀을 씻을 때의 물결,
손끝에 닿는 차가운 촉감,
솥 안에서 들려오는 부글부글한 소리,
그리고 갓 지은 밥의 뜨거운 숨결까지.
그건 단순한 요리가 아니라,
몸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걸 확인하는 의식이다.
김이 피어오를 때,
그 하얀 연기가 천천히 얼굴에 닿을 때,
하루의 피로가 풀리듯 마음이 느려진다.
숟가락을 들어 첫 입을 넣는 순간,
혀끝은 세상에서 가장 원초적인 평화를 느낀다.
씹는 동안,
세상과 나 사이의 온도가 하나로 맞춰진다.
“오늘도 나는 살아 있구나.”
그 단순한 문장이
몸 안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이건 미식이 아니라, 존재의 확인식이다.
좋아함이란,
이렇게 한 공기의 온도로 자신을 데우는 일이다.
몸은 매일 그렇게
삶을 다시 데운다.
카페에 가면 나는 늘 창가 자리를 고른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창밖의 세상과 내 안의 시간이
그곳에서 가장 잘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낮에는 햇살이 잔잔히 스며들고,
밤에는 불빛이 부드럽게 흔들린다.
그 빛의 온도 속에서
나는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
커피 향이 퍼지고,
사람들이 오가며,
대화와 침묵이 번갈아 흐르는 공간 속에서
나는 조용히 호흡을 고른다.
그 순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햇살, 음악, 향, 그리고 나 자신.
그 모든 감각이 겹쳐지며
‘지금, 여기’라는 시간이 선명해진다.
좋아함은 결국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되는
자리의 예술이다.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볼 줄 아는 감각,
그게 바로 평화의 온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 중 하나는
빨래를 걷어 들일 때다.
이건 특별하지 않은 일상,
그저 사소한 하루의 장면이지만
이토록 평화로운 순간도 드물다.
그보다 조금 전,
햇빛 아래에서 막 말라가던 천을 털어낼 때의 그 감촉이 참 좋다.
따뜻한 공기가 손끝에 닿고,
빨래의 물기가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의 향이
몸 안 어딘가를 은근히 밝혀주는 느낌이 든다.
햇빛에 데워진 천의 향,
깨끗함이 품은 감정의 온도,
그 모든 게 살아 있다는 증거 같다.
빨래를 다 걷은 뒤,
햇살이 남은 자리에 잠시 서 있으면
몸이 먼저 평화를 기억한다.
“아, 오늘도 나는 잘 살아냈구나.”
그 단순한 사실이 참 고맙다.
그건 화려한 행복이 아니라,
조용히 삶을 사랑하게 만드는 냄새이기 때문이다.
그 향은 말없이 전한다.
“괜찮아, 오늘도 충분했어.”
그 순간 나는,
창가에서 스트레칭을 하듯
햇살에 몸을 맡긴다.
숨이 부드럽게 들어오고,
마음이 천천히 펴지는 이 느낌을 나는 좋아한다.
그건 운동이라기보다
하루를 정리하는 생활의 리듬에 가깝다.
몸이 다시 살아나고,
감정이 제 박동을 되찾는다.
햇살이 내 얼굴을 스치는 그 찰나
나는 오늘도 살아 있다는 걸,
몸으로 배운다.
누군가와 손끝이 스쳤을 때,
몸속 세포들이 잠에서 깨어나는 걸 느낀 적이 있는가.
그건 생각의 일이 아니라,
몸이 먼저 기억해 내는 생의 반응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몸이 언어보다 먼저 움직인다.
피부가 반응하고,
눈빛이 흔들리고,
호흡은 자연스럽게 상대의 리듬에 닮아 간다.
그 순간,
세상은 조금 느려지고
시간은 우리 편이 된다.
모든 감각이 조용히 깨어나는 찰나,
몸은 아무 말 없이 속삭인다.
“나는 지금, 살아 있다.”
좋아함은 마음의 일기보다,
몸이 삶을 다시 시작하는 방식 아닐까.
손끝의 온기 하나만으로도
잠들어 있던 세포들이 천천히 숨을 고른다.
그 찰나,
세상은 내 안에서 부드럽게 맥박 친다.
그건 이성이 아니라, 감각의 기억이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말했다.
“몸은 세계를 해석하는 최초의 언어다.”⁴
시인 고은은 썼다.
“시란, 세상의 모든 사소한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다.”⁵
그리고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말했다.
“존재는 무겁다. 그러나 그 무게를 가볍게 느끼는 것이 예술이다.”⁶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는 또 이렇게 적었다.
“생각은 몸의 일이다. 몸이 잠들면 생각도 닫힌다.”⁷
그렇다면 좋아함은 무엇일까?
그건 몸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언어이며,
사소한 것을 사랑하는 예술이며,
존재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기술이며,
몸과 생각을 동시에 깨우는 감각의 문법이다.
좋아함을 안다는 건
살아 있다는 뜻이고,
살고 싶다는 신호다.
좋아함은 머리로 배우는 감정이 아니다.
몸이 느끼고 기억하는 언어다.
하루를 지나며 우리는 수많은 신호를 놓친다.
작은 햇살의 온도, 스치는 바람의 향기,
좋아하는 사람의 웃음에 잠깐 흔들렸던 그 순간까지.
‘감각 일기’는 그 잃어버린 감각을 다시 불러내는 시간이다.
몸이 하루 동안 보낸 작은 신호를 천천히 되짚는 연습이다.
오늘 하루, 당신의 몸이 미세하게 깨어났던 순간을 적어보자.
• 시각: 눈이 머문 가장 평온한 장면은 무엇이었는가?
• 청각: 마음을 잠시 고요하게 만든 소리는?
• 후각: 위로처럼 스며든 향은?
• 촉각: 따뜻함이 닿았던 순간은 언제였는가?
• 미각: 오늘, 생을 느끼게 한, 한입의 맛은?
하루에 단 한 줄이라도 좋다.
몸이 반응한 순간을 떠올리면,
그때의 온기가 다시 살아난다.
이건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당신의 세포가 ‘지금’을 다시 느끼게 하는 의식이다.
좋아하는 감정 하나,
그 작고 미세한 반응이
오늘도 당신을 다시 살리고 있을 것이다.
좋아함은 몸이 쓰는 가장 오래된 문장이다.
그 문장은 숨과 향, 온기와 떨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운동하듯,
밥을 짓듯,
빗소리를 듣듯,
누군가의 손을 잡듯,
햇살에 얼굴을 맡기듯,
삶도 그렇게 감각으로 회복된다.
좋아함은 생을 다시 데우는 기술이다.
그건 사랑보다 오래가고,
욕망보다 건강하며,
이성보다 현명하다.
좋아함의 세포가 깨어나는 순간,
우리는 다시 살고 싶어진다.
좋아함의 기술은 결국,
몸을 믿고, 삶을 믿는 연습이다.
좋아함은 사소한 습관 속에 숨어 있다.
한숨 대신 내쉬는 호흡,
불안 대신 켜는 조용한 등불.
비, 밥, 햇살, 향, 손끝.
이 모든 것은 삶이 우리에게 보내는
‘괜찮아’라는 감각의 편지다.
그 편지는 매일의 달력 위에 놓인다.
날짜 대신 온도를 남기고,
계획 대신 감각을 기록한다.
오늘 하루, 그 달력 한쪽을 조용히 펼쳐보자.
당신의 몸이 먼저 대답할 것이다.
“고마워.”
그리고 그 한마디면,
오늘을 살아낼 이유로 충분하다.
참고 및 각주
1.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 Descartes’ Error (『데카르트의 오류』, 1994).
2. 도파민(Dopamine): 동기·쾌감 호르몬 / 세로토닌(Serotonin): 안정감·자존감 호르몬 / 옥시토신(Oxytocin): 신뢰·유대감 호르몬.
3.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Letters to a Young Poet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1903).
4.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 (『지각의 현상학』, 1945).
5. 고은, 『입산(入山)』, 1974 — “시란 세상의 모든 사소한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6.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L’Être et le Néant (『존재와 무(Being and Nothingness)』, 1943).
7.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A Room of One’s Own (『자기만의 방』, 1929).
https://www.instagram.com/comet_you_
https://www.threads.com/@comet_you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