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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 때리지만 멍하진 않습니다

3장 도망이 아니라 도피 - 틈새의 도피가 삶을 지탱한다

by 유혜성

3장 도망이 아니라 도피 - 틈새의 도피가 삶을 지탱한다


1. 역할과 역할 사이 - 저는 왜 늘 숨구멍을 찾았을까요


저는 사람 앞에 서는 일을 오래 해왔어요.

문학을 가르치는 강의실에서 학생들의 시와 소설을 읽고, 글을 고쳐주던 강사였고,

대학에서 글쓰기와 문학을 가르치며 학생들을 지도하던 시간도 있었어요.

어떤 때는 사람을 인터뷰하고 취재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일을 했고,

지금은 필라테스를 가르치며 몸을 통해 마음을 돌보는 일을 합니다. 글도 계속 쓰고 있고요.


겉으로 보기엔 다 다른 직업 같지만,

안쪽을 들여다보면 공통점은 하나예요.


“사람 사이에서 에너지를 많이 쓰는 일.”


그래서인지, 저는 늘 ‘역할과 역할 사이’의 숨구멍을 찾게 되었어요.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시절,

저만 알고 있는 나만의 아지트가 하나 있었어요.


제가 강의하는 건물 말고,

학생들이 잘 모르는 다른 단과대 1층 복도 끝에

오래된 나무 벤치가 하나 있었거든요.

낙엽이 문틈 사이로 살짝 들어와서 복도 바닥에 떨어져 있고,

창밖에는 작은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누가 보면 그냥 스쳐 지나갈 법한 자리.


연구실에서 교수들과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

저는 종종 그 건물로 슬쩍 건너가

학생들 사이에 섞여 앉아 있곤 했어요.


수업 준비를 하려고 책을 펼쳐 놓고도

어느 날은 글자가 눈에 안 들어오는 날이 있잖아요.

그럴 땐 그냥 벤치에 앉아서

복도 끝 창밖의 나무들만 멍하니 바라봤어요.

지금도 비슷해요.

필라테스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도 저는 늘 이런 공간을 찾습니다.

• 스튜디오 옆 작은 공원,

낮게 튀어나온 바위 위에 잠깐 걸터앉는 자리.

• 건물 뒤편, 아무도 쓰지 않는 낡은 플라스틱 의자 하나.

• 사람 발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비상계단의 난간.


그런 자리에서 제가 멍하니 서 있으면,

누군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죠.


“선생님, 거기서 뭐 하세요? 멍 때리세요?”


맞아요. 저는 멍을 때리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 멍은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한 멍이 아니라,

현실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 숨을 고르는 짧은 도피의 멍이었어요.


그때 저는 아주 중요한 걸 배웠어요.

• 도망은 책임과 관계를 통째로 버리고 달아나는 것이고,

• 회피는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눈을 감는 것이며,

• 도피는 그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잠시 물러나 숨을 고르는 일이라는 것.


이 장에서 제가 이야기하려는 건,

도망도, 회피도 아닌,


다시 돌아오기 위한 도피입니다.

2. 도망 vs 회피 vs 도피 - 헷갈리지만 전혀 다른 세 가지


이 세 가지는 말로는 비슷하게 쓰지만, 실제로는 꽤 다르게 작동해요.

예시로 풀어볼게요.


1) 도망(Escape)


책임과 관계를 아예 버리고 장면에서 사라지는 것이에요.

• 일이 너무 힘들다고 아무 말 없이 출근을 끊어버리기.

• 갈등이 생긴 연인에게 아무 설명 없이 연락을 끊고 잠수 타버리기.


문제도, 관계도 다 내려놓고 떠나버리는 선택이죠.


2) 회피(Avoidance)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안 보려고 슬쩍 외면하는 상태예요.

• 건강이 걱정되는데도 계속

“바쁘니까 다음 달에 건강검진 해야지.” 하고 미루는 것.

• 확인해야 할 메일이 있는 걸 알면서도

메일함만 켜놓고 일부러 클릭하지 않는 것.


지금은 마음이 편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경우가 많아요.


3) 도피(Refuge)


문제를 모르는 척하지 않으면서도,

다시 맞설 힘을 얻기 위해 잠깐 비켜서는 것이에요.

• 회의 중에 감정이 올라올 때,

일부러 화장실이 아니라 조용한 복도로 나가

하늘을 잠깐 바라보고 오는 것.

• 가족과의 갈등이 커지기 직전에

먼저 베란다로 나가 숨을 고르는 것.


문제를 지우는 선택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잠깐 나를 끌어당기는 선택이죠.


정신의학에서는 이런 건강한 도피가

정서 회복과 회복 탄력성을 높이는 전략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¹⁵

융 심리학에서도, 불안이 극도로 높아질 때

한 발 물러서는 시간이 자기 회복과 통찰의 전제가 될 수 있다고 보고요. ²


이 책에서 제가 말하는 도피는 바로 이 세 번째,


현실을 버리기 위한 도망이 아니라,

현실을 지탱하기 위한 도피입니다.

3. 일상 속 도피 - 살아내기 위해 선택한 장면들


조금 더 일상으로 가까이 가볼게요.

이건 실제로 제가 들었던 이야기들이고,

몇몇은 제가 직접 보아온 장면입니다.


1) 회사원의 옥상 도피


어떤 직장인은 이렇게 말했어요.


“점심 먹고 나서는 꼭 옥상에 올라가요.

구석 자리에 서서 하늘만 7분 봅니다.

그 시간이 없으면, 오후 업무가 버거워요.”


회사 옥상 구석, 실외기 옆에 서서

휴대폰을 일부러 보지 않고

하늘과 구름만 바라보는 7분.


그에게 옥상은 회사를 떠나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회사를 버티게 만드는 숨구멍이에요.


2) 돌봄 노동자의 골목 도피


아이를 돌보거나, 아픈 가족을 간병하는 사람은

하루 종일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해야 하는 삶을 삽니다.


한 돌봄 노동자는 이런 고백을 했어요.


“속이 치밀어 오를 때가 있어요.

그때 집 앞 골목 모퉁이로 나가서

3분만 벽에 기대 있다 들어옵니다.

그 3분이 없으면 결국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할 것 같아요.”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 햇빛이 반쯤만 드는 골목.

회색 벽에 등을 기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숨만 쉬고 돌아오는 3분.


이건 도망이 아니라,

관계를 지키기 위한 아주 현실적인 도피예요.


3) 공부하는 사람의 도서관 도피


시험 기간 도서관에 하루 종일 앉아 있던 한 학생은

‘5분 도피 멍’ 루틴을 만들었다고 해요.


“문제집만 붙잡고 있으니까 머리가 멍해지더라고요.

그래서 5분씩 눈을 감고 멍을 때리면

뇌가 한 번 갈아 끼워지는 느낌이 나요.

그 뒤에 문제풀이가 훨씬 잘 돼요.”


자리에서 굳이 일어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도피.

이 학생에게 도피는 포기가 아니라,

집중력을 유지하는 기술이었어요.⁵


4) 감정을 다루는 사람의 계단 도피


상담자, 교사, 코치, 서비스 직종처럼

감정을 많이 써야 하는 사람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세션 사이에,

상담실 바로 옆 계단에 2분 서 있어요.

그 시간이 없으면, 내 감정과 상대 감정이

한꺼번에 섞여 버리는 느낌이 들어요.”


창문 하나 있는 계단, 먼지 살짝 쌓인 난간.

거기에 가만히 기대 서서

가슴이 오르내리는 속도만 느끼는 2분.


그 짧은 도피 시간이,

내 감정과 타인의 감정을 다시 분리해 주는 경계선이 됩니다.


이 사람들은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아요.

오히려 이 짧은 도피가 있었기 때문에

현실로 더 단단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4. 불멍·물멍 & 멍 카페 - 왜 사람들은 불과 물을 보며 멍을 때릴까


얼마 전부터 불멍 카페, 물멍 카페 등,

‘멍 때리기 전용 카페’들이 유행하기 시작했어요.

강화도나 도시 외곽으로 나가면

창밖 논과 바다, 산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는 카페들이 꽤 있죠.


사람들은 일부러 그 먼 곳까지 가서

불을 바라보고, 물을 바라보며 멍을 때립니다.

왜일까요?


실제로 불과 물 같은 자연 자극은

불안과 긴장을 낮추는 데 도움을 준다는 연구들이 있어요.⁵


• 수족관 수조 속 물고기를 한동안 바라보기만 해도

불안과 심박수가 줄어들고,

혈압이 낮아진다는 보고들이 있고요.

• 캠프파이어의 흔들리는 불꽃은

사람의 긴장을 완화하고

스트레스를 낮추며 이완을 돕는다는 연구도 있습니다.⁵


그래서일까요.

한참을 수조 속 물고기만 바라보고 있어도

우리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좀 편해졌다.”는 느낌을 받죠.


저에게도 그런 곳이 몇 군데 있어요.

• 서대문 홍제동 폭포 옆 작은 쉼터.

여름날 거기에 서서 떨어지는 물줄기만 보고 있어도

“아, 나 아직 살아 있구나.” 하는 감각이 돌아왔어요.

• 집 근처 호수공원의 작은 인공 폭포 앞.

바다처럼 거대하진 않지만

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머릿속에 쌓여 있던 과열이

“후~“ 하고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곤 했어요.


우리가 불멍·물멍 카페를 찾아가는 건,

게으르기 때문도, 힙한 감성 때문만도 아니에요.


지쳐 있기 때문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그게 우리를 실제로 안정시킨다는 걸

몸이 먼저 알고 있기 때문이죠.⁵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 볼까요.

• 바다 앞에 서 있을 시간은 1년에 몇 번이나 될까요?

• 모닥불 앞에 앉아 있을 기회는 한 달에 몇 번이나 될까요?


대부분의 우리는

• 바다보다 사무실,

• 모닥불보다 컴퓨터 모니터 앞에

훨씬 더 오래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더 절실한 건,


일 년에 한 번의 거대한 불멍·물멍”이 아니라

“하루에 여러 번 찾아오는 틈새 도피 멍”이에요.


• 바다 대신 창문 밖 하늘로,

• 캠프파이어 대신 커피잔 위로 피어오르는 김으로,

• 여행 대신 복도 끝 조용한 구역으로.


도피의 장소는 거창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건 단 하나예요.


“이곳에서 내 숨이 조금 더 깊어지는가.”


그렇다면 그곳이 바로,

당신의 도피처입니다.

5. 왜 도피는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여기까지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그래도 도피는 좀 비겁해 보이지 않나요?”


저는 이렇게 구분해서 생각해보고 싶어요.

• 도망은 책임을 버리기 위해 떠나는 것이고,

• 회피는 현실을 보기 싫어서 눈을 가리는 것이고,

• 도피는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지금의 나를 지키는 시간입니다.


정신과 의사 가토 다카히로는

<도망쳐도 괜찮아>에서

도망 그 자체도 우리를 지키려는 본능적 방어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³


융 심리학자 베레나 카스트는

<불안에 관하여>에서

불안을 단순히 없애야 할 감정이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신호라고 이야기해요. ²


이 관점을 가져오면,

도피는 그 신호에 응답하는 하나의 기술이 됩니다.


인지·긍정심리학에서는

행복과 회복력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에 가깝다고 설명합니다.⁴

• 일 년에 한 번의 호화로운 휴가보다

• 매일 반복되는 작은 여백들이


우리의 멘털을 더 잘 지켜준다는 거죠.


이렇게 보면,

짧은 도피는 비겁함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기술에 가깝습니다. ¹⁴⁵


6. 실전 루틴 -오늘부터 “도피 선언”을 해볼까요


도피를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조금만 의식적으로 만들어보면 됩니다.


1) 도피 선언


먼저, 마음속에서 이렇게 선언해 볼게요.


“저는 지금 도망치는 게 아니라,

다시 버티기 위해 도피합니다.”


같은 3분이라도

이 한 문장을 거치면,

그 3분은 죄책감이 아니라 자기 돌봄의 시간이 됩니다.


2) 하루 세 구간 도피 루틴


복잡하게 계획 세우지 말고,

오늘부터 딱 세 구간만 정해 보세요.

• 출근 전 – 현관 앞 1분 도피

신발을 신고 문을 나서기 전,

현관에서 1분만 멈춰 서서

숨이 드나드는 감각만 느껴보기

• 업무 중 – 회의 직후 3분 도피

회의가 끝나자마자 메신저를 켜지 말고,

복도 끝, 창가, 비상계단 등 조용한 곳으로 가서 3분 멍.

• 퇴근길 – 이동 중 5분 도피

버스나 지하철 창가에 기대어

음악을 잠깐 끄고 5분간 창밖만 보기.


여기서 중요한 건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지금 이 시간은

나를 지키기 위한 도피 시간이다.”


라고 인지하는 것.


3) 도피를 오래 쓰고 싶다면 - 기록 한 줄


도피 루틴은 “해야 할 일”이 되면 금방 지칩니다.

‘나한테 주는 작은 선물‘이 되어야 오래 가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권해요.

• 도피 후, 노트나 메모앱에

변화 한 줄만 적어보기.

• “화가 조금 내려갔다.”

• “머리가 덜 무거워졌다.”

• “갑자기 해결책 하나가 떠올랐다.”


이 작은 기록이 몇 줄만 쌓여도

우리 뇌는 이렇게 학습합니다.


“아, 잠깐 멈춘다고

손해 보는 게 아니구나.

오히려 이게 나를 살리는구나.”¹⁵


그때부터 도피는

억지로 해야 하는 “멘털 관리”가 아니라,

몸이 먼저 찾는 생존 전략이 됩니다.

7. 도망이 아니라, 살아내기 위한 도피


우리는 너무 지친 시대에 살고 있어요.

항상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항상 반응해야 하고,

항상 무엇인가를 이뤄내야 하는 시대.


그럴수록 필요한 건

모든 걸 다 포기해 버리는 극단적인 도망이 아니라,

짧지만 자주 찾아오는 도피의 여백입니다.

• 도망이 아니라,

• 회피도 아닌,


삶을 버티고 지탱하기 위한 아름다운 도피.


5분의 틈새 도피가 하루를 바꾸고,

그렇게 지켜낸 하루들이 모여

결국 내 삶 전체를 떠받칩니다.


오늘, 당신의 “도피 구간”을 하나 정해 보면 어떨까요?

• 현관 앞 1분,

• 회사 옥상 5분,

• 집 앞 골목 모퉁이 3분,

• 동네 공원 벤치 4분…


어디든 괜찮아요.

당신의 숨이 조금이라도 깊어지는 곳이라면.


그리고 다음 장에서 우리는,

이 작은 도피들이 어떻게

당신의 멘털과 관계, 일상을 조금씩 바꾸는지

더 깊이, 함께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각주

1. 제니 오델,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필로우, 2023.

2. 베레나 카스트, 《불안에 관하여》, 을유문화사, 2025.

3. 가토 다카히로, 《도망쳐도 괜찮아》, 군자출판사, 2025.

4. 김경일, 《마음의 지혜: 내 삶의 기준이 되는 8가지 심리학》, 포레스트북스, 2023.

5. 메리 헬렌 이모르디노-양 외, 《휴식의 뇌과학》, 심심, 2019.


참고문헌

• 메리 헬렌 이모르디노-양 외, 《휴식의 뇌과학》, 심심, 2019.• 제니 오델,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필로우, 2023.

• 가토 다카히로, 《도망쳐도 괜찮아》, 군자출판사, 2025.

• 김경일, 《마음의 지혜: 내 삶의 기준이 되는 8가지 심리학》, 포레스트북스, 2023.

• 베레나 카스트, 《불안에 관하여》, 을유문화사,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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