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멍 때리지만 멍하진 않습니다

7장 뇌과학이 말하는 멍 때리기-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와 창의성

by 유혜성

7장 뇌과학이 말하는 멍 때리기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와 창의성


1. “멍은 게으름이 아니라, 뇌의 비밀회의다”


요즘 저는 이런 질문을 자주 들어요.


“선생님, 도대체 멍 때리기를 왜 이렇게 연구하세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는 거 아닌가요?”


그럴 때 저는 대답보다 먼저, 살짝 웃음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죠.


겉으로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죠?

근데 그 순간, 여러분의 뇌는…

오늘 중에 가장 조용하게, 그리고 가장 바쁘게 회의 중이에요.”


우리는 지금, 쉬기 위해서도 공부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잠깐 멈추는 건 용기가 필요하고,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은 불안하게 느껴지고,

멍하니 있는 나를 보면 “나 너무 게으른 거 아니야?” 하는 죄책감이 바로 따라오죠.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멍은 결코 공백이 아니에요.


멍은 뇌가 우리 몰래 작동시키는

정리·정돈 시스템이고,

조용한 혁신 라운지이고,

감정과 기억이 몰래 모여서 회의하는 비밀 회의실입니다.


그래서 가끔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어 집니다.


“우리는 지금 이 빠른 시대에,

도대체 무엇을 그렇게 계속 채우고,

무엇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렇게 달리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다음 질문은 이것이겠죠.


“그렇다면 멍 때리는 동안,

우리의 뇌는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오늘 이 7장에서는 이 세 가지 질문을

어렵지 않게, 그렇지만 충분히 깊게, 이야기 나누듯이 풀어보려 합니다.


• 멍 때리는 뇌 안에서는 무엇이 일어나는가?

• 왜 멍이 창의성과 직결되는가?

• 그리고 예술가뿐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왜 반드시 필요한가?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아, 그래서 내가 멍을 이렇게 좋아했구나.”

“아, 그래서 멍 때린 후에 머리가 이상하게 맑아졌던 거구나.”

하는 작은 깨달음이 하나씩 떠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다가

잠깐 멍~하고 눈을 먼 데에 둔 그 순간에도,

당신의 뇌는 조용히, 그러나 놀랄 만큼 활발하게

당신의 삶을 다시 조립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 사실을 함께 알아가는 것,

그게 바로 이 7장이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작은 선물입니다.

2. “멍하다가 문장이 뚫린 날”


문장이 막히던 날이 있었습니다.

커서는 깜빡이고, 단어들은 도망가고,

어제의 열정은 어디에도 없었죠.


그럴 때 저는 노트북을 덮고 창가로 갑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5분만 앉아 있어요.

눈은 멀리 있지만, 사실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책상으로 돌아오면

조금 전까지 막혔던 문장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아, 이거였네.”


그 순간 저는 알았습니다.

멍을 때리는 동안 뇌는 쉬는 척하면서, 나보다 먼저 일하고 있다는 것.


3.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 - ‘멍의 뇌’는 왜 더 바쁠까?


2001년, 신경과학자 마커스 라이클은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특정 뇌 회로가 더 활발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¹


그 회로가 바로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 DMN)입니다.


DMN은

기억의 우선순위를 다시 정하고,

감정의 찌꺼기를 비우고,

새로운 정보들을 재배열하고,

떠다니던 생각들을 연결하는,

인간다운 사고의 은밀한 작업실입니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는 것 같지만

뇌는 그 순간 가장 많은 것을 ‘정리’하고 있어요.


4. 창의성이란 무엇인가 - 예술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창의성은 특별한 사람에게 주어진 선물이 아닙니다.

뇌과학과 심리학은 창의성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창의성 = 기존의 정보를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하는 능력.”²


그 말은 즉,

창의성은 음악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릴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죠.

• 직장인의 보고서 구조를 다시 잡는 것

• 학생이 문제를 새 각도로 바라보는 것

• 개발자가 버그의 원인을 새롭게 추적하는 것

• 부모가 아이와의 대화를 다른 방식으로 바꾸는 것

• 연인이 서로의 감정을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

• 창작자가 문장을 서로 엮는 것


이 모든 것이 창의성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살아가기 위해 창의성을 사용합니다.

5. 왜 멍을 때릴 때 창의성이 열린 걸까?


멍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뇌가 새로운 연결을 시도하는 숨은 창구입니다.


(1) 멍은 흩어진 정보 조각들을 ‘슬며시’ 연결한다


샤워 중에 떠오르는 문장,

지하철 창가에서 갑자기 해결되는 고민,

설거지 중 문득 떠오르는 기획 방향.


이 모든 순간은 DMN이 조용히 작동하고 있는 장면이에요.

의식적 사고로는 못 찾던 연결이

멍의 빈칸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2) 사고 속도가 느려져야 본질이 보인다


몰아치는 생각의 한가운데서는 핵심을 놓칠 때가 많죠.

멍은 잠시 속도를 늦추어

뇌가 본질에 초점을 맞추도록 돕습니다.

마치 빠르게 걸을 때는 보이지 않던 풍경이,

멈춰 섰을 때 비로소 선명해지는 것처럼.


(3) 감정의 온도가 내려가야 아이디어가 들어온다


긴장, 불안, 짜증이 높은 순간

창의성은 잠깐 문을 닫습니다. ³

멍은 감정의 온도를 낮춰

아이디어가 들어설 ‘자리’를 만들어줘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샤워하다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가 제일 정확해요.”


6. 모든 직업군이 쓰는 창의적 멍


1. 직장인의 멍 -회의와 회의 사이에 뇌는 몰래 나를 복구한다


직장인에게 멍은 사치가 아니라 실수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에 가깝습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바로 다음 회의로 뛰어들면 머릿속 문장들은 서로 부딪히고,

방금 들은 말과 다음에 해야 할 말을 동시에 떠올리느라 감정도 사고도 엉켜버리죠.


그래서 많은 직장인들은 본능적으로

엘리베이터 앞에서, 프린트기 옆에서, 창가에서

고작 1~3분이라도 멍을 때리고 있습니다.


그 짧은 멍 때리는 시간 동안 뇌는 이렇게 말합니다.

“방금 회의에서 너에게 불필요하게 들어온 감정은 이쪽 서랍에 넣어둘게.

그리고 다음 회의에서 말해야 할 핵심은 여기,

오늘 처리해야 할 우선순위는 이 칸에 넣어놓을게.”


자기에게 멍 때리는 시간을 꾸준히 주는 직장인은

하루 동안 실수를 덜 하고, 해야 할 일을 더 빨리 떠올립니다.


그건 능력이 아니라,

뇌에게 잠깐의 휴식 시간을 건네는 사람이 누리는 효과입니다.


회의와 회의 사이의 2분 멍은

과열된 머리를 식히고,

지금 집중해야 할 일과 미뤄도 되는 일을

조용히 정리해 줍니다.


멍 때릴 시간을 자신에게 허락하는 직장인은

실수는 줄고 판단은 빨라지며,

하루는 덜 흔들리고 말은 더 정확해집니다.


2. 학생의 멍-기억이 정리되는 건 책상 위가 아니라 멍의 순간이다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시험공부를 할 때 문제를 아무리 오래 들여다봐도

어떤 날은 이해되지 않다가

잠깐 멍하니 창문 너머로 눈을 돌린 순간

갑자기 개념이 ‘착’ 연결되는 경험을 누구나 해봤을 겁니다.


그건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50분 집중 후 5분 멍은

뇌가 새로 배운 내용을 임시 저장소에서

‘장기 기억’으로 옮기는, 아주 중요한 백업 시간이에요.


그래서 멍을 허락한 학생은

공부한 만큼 기억이 남고,

같은 시간을 공부해도 더 오래 가져갑니다.


• 공부 50분 + 멍 5분은

새로 배운 정보를 ‘임시 저장’에서 ‘장기 기억’으로 옮기는

뇌의 자연스러운 백업 과정이에요.


3. 개발자의 멍- 디버깅은 코드에서 하는 게 아니라 멍에서 완성된다


제가 아는 한 개발자는 버그를 해결할 때 책상 위에서만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더라고요.

온종일 코드를 들여다봐도 원인을 못 찾다가

퇴근길 지하철에서 창밖을 멍하니 보는 순간

“아, null 값이 여기서 들어갔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일, 실제로 너무 많다고 해요.


그 이유는 간단해요.

DMN은 복잡한 구조를 ‘다시 조합’하는 능력이 있거든요.

의식적으로 문제를 쫓아갈 땐 보이지 않던 흐름이

멍 상태에서는 자연스럽게 연결되거든요.


개발자에게 멍은 영감이 아니라, 구조 재배열의 시간입니다.


버그의 원인은 책상 앞에서만 보이지 않습니다.

엉킨 논리를 DMN이 천천히 재배열하기 때문에

샤워하거나 산책하며 멍을 때릴 때

문제가 ‘툭’ 보입니다.


4. 기획자의 멍 -아이디어는 멍의 빈칸에서 자란다


기획자는 “그 아이디어 어디서 났어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사람들은 거창한 영감의 순간을 떠올리지만

기획자들은 사실 잘 알고 있어요.


아이디어는

기획안 앞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샤워기 아래에서,

점심 후 카페에서,

퇴근길 횡단보도 앞에서

멍을 때리는 동안 조용히 싹이 튼다는 것을요


멍은 생각을 멈추는 시간이 아니라

“기존 생각과 새로운 생각이 우연히 만나는 환경”을 제공하는 시간입니다.


DMN이 생각과 생각의 사이를 조용히 이어 주기 때문이에요.



5. 창작자의 멍 -막힌 문장은 멍이 뚫어준다


창작자에게 멍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다음 문장으로 건너가는 ‘작은 다리’입니다.


문장이 막힐 때 억지로 붙잡고 있으면 더 안 나오지만

노트북을 덮고 창가에서 5분 멍을 때리면

금방 이어지는 이유는 단 하나.


DMN이라는 이야기를 이어주는 네트워크가

멍을 때리는 동안

이야기의 단서들을 조용히 서로를 찾아가

연결을 완성해 주기 때문이에요.


멍은 재능이 아니라 작업 방식이에요.


6. 부모의 멍


육아 스트레스가 올라오는 순간

딱 30초만 눈을 감고 멍 때리는 시간을 주면

폭발하던 감정이 내려가고

아이와의 다음 대화를 더 부드럽게 이어가게 됩니다.


7. 운동하는 사람의 멍


운동 전 1분 멍은 몸의 ‘긴장’을 풀어주고,

운동 후 1분 멍은 몸을 ‘전투 모드’에서 ‘회복 모드’로 돌려놓습니다.

몸은 생각보다 멍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7. 멍의 다섯 가지 유형 - 뇌 안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장면들


1. 정리형 멍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무심히 멍을 때릴 때

뇌는 오늘 들어온 정보들을 다시 분류합니다.

그래서 멍에서 돌아오면

“아, 이건 오늘 안 해도 되겠네.”

“이건 먼저 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명확해지죠.


2. 아이디어형 멍


샤워 중 번뜩이는 문장,

걷다가 떠오르는 해결책은

DMN이 서로 다른 조각들을 재조합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멍은 생각의 뒤편에서 조용히 ‘스파크’를 일으킵니다.


3. 휴식형 멍


점심 후, 퇴근 직전, 잠들기 전 찾아오는

아무 생각도 하기 싫은 멍.

이때 뇌는 에너지를 충전하고

감정의 소음을 조금씩 낮춥니다.

그래서 “아까보다는 좀 가벼워졌네”라는 느낌이 오는 거예요.

4. 감정 정리형 멍


창밖을 보다가 괜히 울컥할 때,

버스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다

옛 생각이 불쑥 떠오를 때.

이 멍은 뇌가 감정의 잔향과 찌꺼기를 천천히 해독하는 과정입니다.


5. 감각·예술형 멍


빗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고,

노랫말 한 줄이 지나치게 깊게 와닿는 날.

감각이 깨어나고 직관이 살아나는 멍이예요.

예술적 감성이 필요한 사람에게 특히 유익합니다.


• 유형별 멍 활용 팁


여러분이 어떤 멍 유형에 가까운지 아는 순간,

멍은 “우연히 찾아오는 쉼”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회복 기술”이 됩니다.


자신의 멍 패턴을 아는 것,

그게 바로 뇌와 마음을 다루는 가장 쉬운 자기 이해입니다


8. 명상과 멍 - 다르지만, 둘 다 우리를 살린다


명상은 ‘의도적으로 비우는 시간’이고

멍은 ‘자연스럽게 비워지는 시간’입니다.


명상은 훈련이 필요하지만,

멍은 누구나 매일 하고 있습니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없어요.

둘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신경계를 진정시키고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나는 명상을 잘 못해…”

라고 스스로를 책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이미 멍을 통해

뇌의 회복 시스템 절반 이상을 훌륭하게 돌보고 있으니까요.


9. 멍은 뇌가 당신을 살리는 순간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화면, 너무 많은 알림, 너무 많은 관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때 멍은 뇌가 켜놓는 가장 본능적이고 인간적인 숨구멍입니다.


5분의 멍은

막힌 문장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고,

흩어진 감정을 다시 깔끔히 정리해 주고,

원래 가야 할 방향으로 나를 조용히 되돌립니다.


멍은 게으름이 아니라,

뇌가 당신을 살리는 가장 인간적인 순간입니다.


당신의 DMN을 믿어주세요.

당신의 멍을 존중해 주세요.

당신의 빈칸을 사랑해 주세요.


그 작은 빈칸이

당신의 다음 문장, 다음 하루, 다음 살아갈 힘을

고요히 조립하고 있으니까요.


각주

1. 마커스 라이클, 《뇌는 왜 우리를 속일까》, 김영사, 2016.

–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의 개념을 대중적으로 소개한 책.

2. 벤저민 베어드 외, Mind-Wandering & Creativity Study (2012).

– 국내 심리학 자료 및 인지심리학 해설서에서 재인용된 대표 연구.

3. 메리 헬렌 이모르디노-양, 《휴식의 뇌과학》, 심심, 2019.

– 멍·휴식이 감정 회복·자기 성찰·창의성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핵심 연구.



참고문헌

• 마커스 라이클, 《뇌는 왜 우리를 속일까》, 김영사.

• 메리 헬렌 이모르디노-양, 《휴식의 뇌과학》, 심심.

• 소냐 류보머스키, 《행복의 해답》, RHK.

• 앤드루 스마트,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더퀘스트.

• 김경일, 《어쩌다 어른》, 중앙북스.

https://www.instagram.com/comet_you_

https://www.threads.com/@comet_you_



keyword
월,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