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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ghyun Kim Aug 02. 2019

두 언어 사이에서

한국의 영어교육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한국의 영어교육은 엄격히 말해서 교육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상 장사이며 영업이고 기술이며 심하게 말한다면 사기에 가까운 행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대학에 입학하기 까지 평균적인 학생들은 보통 초등학교 과정에서 4-6년 중고등학교 6년 등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늘 영어의 스트레스에 짓눌려 살아온다.


10년. 


  말컴 글래드웰은 만시간의 법칙을 이야기 하면서 10여년간 꾸준히 뭔가를 했을 때, 괄목할만한 성취를 얻은 예술가들 운동선수들 기업가들의 사례를 이야기 한 적 있었다. 비틀즈가 그랬고, 빌게이츠가 그랬다. 10년이라는 시간은 실로 뭔가를 지속적으로 했을 때 그 분야에서 빛나는 성취를 얻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수영이나 피아노를, 그림그리기를, 혹은 가구 만들기를 10년 동안 했다고 생각해보자. 누구든지 수영이나 피아노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을 거라고 쉽게 기대할 것이다. 간단한 의자나 책상 같은 것을 손수 만들어서 자기가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피카소의 그림을 살수는 없겠지만,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의 풍경화를 그려서 거실에 걸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영어에 대해서만큼은 상황이 다르다. 10여년동안 영어를 공부했어도, 영어로 편지를 쓰거나, 외국인과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웹사이트를 검색해도 영어로 쓰여진 것은 일단 피하고 본다. 어디에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대학에 들어오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영어를 시작하려고 한다. 그럼, 그 전까지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무수히 많은 노력과 열정을 들여 공부했던 “그 전까지의 영어”는 어디로 간 것일까? 또,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대학에서 시작하는 영어는 기대만큼 잘 될 것인가?  한국에서 영어는 입시의 일부로서 그 의미가 가장 크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 영어교육은 사실상 영어를 사용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영어를 "공부"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영어를 공부한다는 것. 


     크게 틀린 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영어를 잘 하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공부가 전부라는게 문제다. 학생들은 언어로서의 의사소통능력보다 높은 점수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실제 외국인을 만나는 기회를 찾아서 대화를 시도해보기보다는, 늘 해커스니 YBM이니 파고다니 하는 학원으로 토익 800점,  900점, 토플 만점을 위한 오딧세이를 떠나는 것이다. 


     많은 학생들은 자신이 왜 영어를 공부하는지 그 목적의식조차 불분명하다. 불분명하면 그나마 다행이고, 사실. 목적이 없는 경우도 많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해야지. 안하면 불안해서. 나중에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도대체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영어를 배워서 뭘 하려고 하는 것일까? 학교에 적을 두고 있는 학생들 뿐 아니라, 많은 직장인들과 사회인들, 영어와 실질적으로 무관한 삶을 사는 평범한 사람들까지 한국은 온통 영어에 대한 병적인 패러노이아에 사로잡혀 있다.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일제 치하에서 한국어 말살 정책에 맞서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끝까지 자신의 언어를 지키려 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스스로 영어의 노예가 되려고 한다. 한자가 병기되던 자리에 이제 영어스펠링이 보이는건 이미 오래전부터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온갖 간판이며 회사, 카페, 식당, 거리이름은 물론이고 공원과 입고다니는 셔츠까지 온통  알 수 없는 영어 스펠링이 난무한다.  "Quit Your Job" “Won't You?" "I wanna be".  미국 주의 이름이 쓰여진 티셔츠 후드티 스웨터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Alaska, Michigan, New York, California 같은 지역들은 매우 친숙한 장소처럼 되었다. 한국에서 미국의 어떤 주들은 대구 부산 대전 광주보다도 더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미국의 어느 주의 이름이 당신에게 생소한가? 50여개의 미국 주 이름들 중 당신에게 낯선 이름은 어떤 것인가? 


    이렇게 한국의 일상 깊은곳까지 영어가 파고들어 왔지만, 한국의 현실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역설적이다.  많은 학생들은 외국인과 말하기를 불편해하고, 영어로 된 책이나 웹페이지를 보는것은 불편해 한다. 영화와 드라마는 늘 자막과 함께 본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해결되지 않는 한국 영어교육의 딜레마가 존재한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화를 위해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 영어를 습득하면서 하는 대부분의 대화는 그저 대화를 위한 대화인 경우가 많다.  학생들이 시사뉴스에 관심이 있어서 CNN을 시청하는 경우는 드물다. 많은 경우 듣기 능력향상, 혹은 시사용어 습득을 위해 CNN을 청취한다. 독해능력 향상을 위해 조앤 롤링의 해리 포터를 읽고, 관용적인 표현을 연구하기 위해 프렌즈를 시청한다. 


     결과적으로 봤을 땐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사실 영어를 공부하는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바로 그 언어권과 소통하는 것 아닐까? 그 언어권의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 하고, 영어로 쓰여진 책을 읽고, 뉴스와 기사를 보고, 영화를 즐기는 것. 바로 그런 것들이 우리가 영어를 공부하는 목적 아닌가? 그런데 많은 학생들은 영어를 공부하는 목적자체를 영어를 공부하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럼 그렇게 공부한 영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한국에서 그것은 토익 점수로, 수능 성적으로, 승진을 위한 능력으로 계량화된다. 그리고, 그것이 계량화 되는 순간 영어라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무수한 문화적 가능성과 깊은 의미는 사라지게 된다. 영어실력을 평가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 실질적인 능력보다 평가 자체에 매달리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영어실력을 점수로만 시험으로만 평가하려고 한다는 것은 사실 인재를 발굴하고 선발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많은 다양한 기준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러한 평균화된 평가가 의미하는 것은 사실 본질적인 것과 관련이 없다. 영어실력을 점수로만 평가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람을 등용하려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렇게 채용이 되었는데, 영어와 전혀 무관한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면, 과연 그 자리에 영어가 있어야 할까? 다른 것이 있어도 사실 아무런 차이는 없을 것이다. 수영실력으로 뽑거나, 줄넘기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커피를 얼마나 맛있게 탈수 있는지와 같은 직무능력과 상관없는 다른 기준을 사용해도 무관할 것이다. 그것이 단지 사람들을 줄세우고, 획일적인 기준으로 평가하고, 평가한 내용과는 상관없는 업무를 부여할 것이라면 말이다.


한국의 영어교육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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