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렌이 기억하는 두 번째 만남-2
대학을 졸업하고 동물병원을 개업했다. 나는 아버지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다짐한 이후 나름의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어찌 보면 결국은 실패했다. 아버지 도움을 받기 싫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지만 너무 편하고 빠르게 일처리가 이루어지는 걸 느꼈다. 분명한 건 주위에 개업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나의 상황은 매우 달랐다. 내가 기대될 만큼 능력 있는 수의사여서일까? 아니면 아버지와 골프모임 멤버인 지점장의 도움이었을까. 난 아무런 도움도 청하지 않았지만 또다시 아버지의 그늘에서 헤매고 있는 거 같은 느낌이다. 그래도 너무 파괴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기보다 이 정도는 그냥 모른 척 넘어가기로 했다. 내가 너무 비겁한 건가? 대학교에 간 이후 난 자립하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은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벗어나지 못했다.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새엄마에 대해서도 요즘 생각을 많이 한다. 새엄마는 내가 다애를 잃어버린 후로 영원히 나를 미워할 거 같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마음이 모질지 못했다. 내가 만약 다애를 다시 찾게 된다면 새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을 조금은 덜 수 있을까? 아 그리고 나는 언제부턴가 '그 여자'가 아니라 '새엄마'라고 불렀다. 그게 언제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잠을 자다가 깨서 한참을 울고 있던 날이었다. 어떻게 알고 온 건지 새엄마는 나를 꼭 안아주었고, 그날부터였던 거 같다.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따뜻한 사람의 품이었다. 새엄마의 몸에서는 향긋한 살내음이 났다. 조금 시원하기도 하고 몽글몽글한 느낌이 나는 살내음. 그날 이후로 아버지 몰래 새엄마와 나는 절친이 되었다. 난 끝까지 엄마로 인정할 수는 없었지만 내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난 살면서 운명을 믿어왔다. 어쩌면 운명을 믿는다는 건 소극적으로 살겠다는 뜻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나는 적극적으로 수소문해서 다애를 찾을 수도 있었지만 웬일인지 그럴 수 없었다. 그냥 언젠가 기적처럼 운명처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유 없는 확신이 내 안에 있었다. 그 생각은 너무 분명해 보였다. 그렇게 시간에게 의미를 부여했다. 아니면 세상이 나에게 원하는 대로 그저 수동적인 모습을 요구받아서였을까? 적극적으로 누군가에게 다가서는 일들은 해보지 못해서였을까? 언제나 관심받고 사랑받아서였을까? 받기만 할 줄 알아서? 아니다. 난 받은 적이 없다. 언제나 거절했다. 주고 싶다고 주는 걸 나무랄 수는 없지만, 난 한 번도 받아준 적이 없다. 내가 길고 긴 기다림을 선택한 것은 운명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짜 기적은 일어났다. 다시 다애를 발견한 후로 몇 년이나 지켜보며 기다렸다. 그 기다림의 끝에서 우리의 두 번째 만남을 기억한다.
그날은 동물병원을 개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난 누구의 딸이나 그저 예쁜 애가 아니라 누구보다 당당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었다. 오랜 시간 동안 첫 만남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지만 생각나지 않았다. 수만 가지 경우에 수를 생각하며 많은 이야기를 써 내려갔지만, 정작 우리들의 이야기는 조금 어이없게 그러나 기적처럼 일어났다. 그래 그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다. 운명처럼. 그냥 난 멀리서 다애를 지켜보았고, 다애는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이유는 모른다. 다애가 나를 기억해서일까? 나를 그리워했던 걸까? 나를 용서한 걸까? 난 알 수 없다. 다만 그 순간 내 품에 안겨서 반가움을 표하던 순간만을 기억한다. 그 이후에는 더 어이가 없다. 영혼 없는 눈을 했던 그 녀석은 나에게 다가와 핸드폰을 내밀었다. ‘뭐지?’ 난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생각을 빠르게 정리해 나갔다. 그동안 생각했던 그 많은 경우의 수에도 이건 포함되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이 핸드폰만 내밀다니. 이건 너무 앞뒤가 없잖아.
난 거의 무의식적으로 내 명함을 내밀었다. 난 떨려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동안 수없이 연습했던 말 중에 하나를 한 것은 분명하다. 난 미친 듯이 떨려서 어지러울 정도였지만 표정은 도도하게 유지하며 내 명함을 주고, 그 자리를 당당하게 도망쳐 나왔다. 막상 첫 만남이 이루어지고 나니 생각보다 마음이 편해졌다. 내 집착은 그렇게 이유도 모른 채 생겼다가, 그렇게 결실을 맺는 거 같았다.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생각보다 빠르게 연락이 왔다. 난 핸드폰에 찍힌 모르는 번호를 보면서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너 결국 나한테 반했구나?' 난 핸드폰을 들어 문자를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아침에 만났던 류지훈이라고 합니다.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있나요? 어딘가 익숙해서요. ㅎㅎ]
문자를 읽으며 내 심장은 내 것이 아닌 듯 미친 듯이 뛰었다. 어릴 때 만났던 나를 기억하는 것일까? 어릴 때는 그렇게 무심히 뒤돌아 가버릴 때는 언제고, 나를 기억한다고? 아니면 흔하디 흔한 수작을 부리는 건가, 생각해 보니 많이 듣던 맨트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그 녀석이 얄미워졌다. 그런데 이름이 지훈이였구나. 난 바로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잠시 잊어버리기 위해 노력했다. 마치 하루 같은 한 시간이 지날 때쯤 나는 답장을 했다.
[혹시 오해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전 수의사로서 개가 걱정돼서 명함을 드린 것뿐이여서요.]
난 문자를 보냈지만 전송 버튼을 누르고 그것이 얼마나 서툰 표현이었는지 깨달았다. 이건 너무 차가운 말투였다. ‘기분이 나빴으면 어쩌지? 다시 연락이 올까?’ 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 불안해졌다. 무조건 거절만 했지 다시 연락을 이어가기 위한 연락은 이번이 처음인듯하다. 나의 처음이 저 녀석을 위한 것이었다니. 억울하다.
[아 그럼 제가 착각했나 봅니다. 예전에 잠시 봤었던 아이와 많이 닮으셔서요. ㅎㅎ 조언해 주신 대로 조만간 리브 데리고 병원에서 종합적으로 검진받아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을 할 수가 없어서요. 괜찮으시면 앞으로 문자로 궁금한 점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ㅎㅎ]
생각보다 바로 답장이 왔다. 지훈 씨는 다애를 리브라고 부르는구나. 난 오늘 둘의 숨겨진 이름을 알게 되었다. 이제 나도 부를 이름이 생긴 것이다. 어쨌든 지훈 씨는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병원방문 약속을 잡고 있다. 진짜 단순히 궁금해서 물어본 건가? 내가 너무 앞서갔나? 상대방은 아무런 감정이 없는데 나만 혼자서 설레발친 건가?
"어? 잠깐만." 그런데 말을 할 수 없다는 부분에서 가슴을 얻어맞은 거 같았다. 지훈 씨는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그동안 쌓였던 오해는 미안함이 되었다. 그렇다면 난 지훈 씨 앞에서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될까? 그러면 지훈 씨는 내 말에 현혹되지 않을 유일한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말없는 사이가 될 테니까. 그래 나는 지훈 씨가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어도 상관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난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날 무시한 게 아니었어. 그냥 말을 못 하는 것뿐이었어.' 그래서 남들과 다르게 내가 신경이 쓰였나? 아니다 그 눈 속에 보이는 공허가 나를 한없는 시공간 속으로 끌어들인 게 분명하다. "아 이렇게 시간을 끌 때가 아니야." 난 부랴부랴 답장을 보냈다.
[네 잠시 살펴본 것뿐이지만 일단 귀 쪽에 조금 문제가 있는 거 같아서요. 병원 들러주시면 제대로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문자를 보내고 난 갑자기 이런 의문이 들었다. 난 다애가 그리운 것이었을까? 아니면 지훈 씨가 그리웠던 것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마치 애써 숨겨둔 부끄러운 비밀을 남에게 들켜버린 듯 얼굴이 화끈거렸다. 난 알아야 한다. 내 마음의 진실을. 내가 그리워한 것이 그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상상으로 오랜 시간을 공들여 만들어낸 나의 집착인지. 무엇이 나를 기다리게 한 건지 난 이유를 찾아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지훈 씨는 나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으니 앞으로 나에게 집착하게 만들어야겠다. 그렇게 되고 나면 그때 가서 결정하면 된다. 어쨌든 선택권은 나의 것이다.
[ 08화로 이어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