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렌이 기억하는 밤산책
주말 아침이 밝아온다. 얼마만일까? 난 마치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듯, 스스로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것처럼 깊은 잠을 잤다. 눈을 뜨자 옆에서 다애가 반긴다. “아 나 때문에 새벽산책을 못 갔겠구나. 미안. 대신 나랑 같이 갈까?” 다애는 산책이라는 말을 듣자 누워있는 나에게 달려들었다. 난 그렇게 침대에서 다애를 안고 한참을 뒹굴거렸다. “다애야. 조금만 더 이렇게 있자. 잠시만.” 이 따스한 생명을 안고서 주말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는 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잠시 후 닫힌 방안의 커튼을 걷었다. 유난히도 맑은 아침 햇살이 방안에 스며든다. 그리고 창문 너머로 지훈 씨가 어떤 사람과 운동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둘은 대련 같은 걸 하고 있는 거 같다. “다애야. 지금 산책은 어렵겠다. 운동을 방해하면 안 되니 조금만 더 있다가 나가자.” 여하튼 저들의 운동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다. 난 그렇게 다시 잠에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지훈 씨의 인기척 소리를 듣자 다애가 방문으로 달려 나갔다. 내가 말릴 새도 없이 벌떡 앞발을 들며 서더니 문을 여는 것이다. 우리 다애에게 저런 개인기가 있었나? 문은 벌컥 열렸고 그와 동시에 나는 눈을 감고 잠든 척 연기를 했다. 어? 시간이 지나도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열어놓고 간 건가? 아니면 혹시 나를 계속 보고 있는 건가? 그 생각이 들자 지금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어쩌지? 너무 추한 모습인데. 보고 있는 건가? 영화에서나 볼법한 상황에 눈을 감은채 숨을 죽였다. 잠시 후 다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부끄러운 마음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려 숨는다. 그렇게 또다시 잠에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내가 거실로 나왔을 때는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이 보였다. 지훈 씨는 보이지 않는다. 다애도 보이지 않는다. 난 잠시 여기저기 그들을 찾아 집안을 돌아다녔다. 현관문에서 가장 가까운 방문을 열자 마치 병원에 와있는 거 같았다. “지훈 씨가 말한 방이 여긴가?” 여기는 오로지 치료를 위한 작은 병원 같았다. 그렇다면 난 왜 여기에 사는 거지? 난 그 순간 알아버렸다. 내가 크나큰 착각을 한 것이다. 수의사를 위한 방이란 치료만 하는 공간이었다. 난 그 순간 스스로를 의심했다.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나를 위한 최소한의 명분을 찾았던 것일까? 내가 나를 속인 건가? 잠시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또다시 나를 속이기로 했다. “뭐 일단 밥부터 먹자.”
나에게 밥을 차려준 사람은 지훈 씨가 처음인 거 같다. 정확히는 대가 없이 차려준 밥상이 맞겠지. 엄마는 죽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나에게 밥을 차려준 적이 없다. 어차피 집안일은 모두 맡아서 해주시는 분들이 있었으니까. 엄마는 언제나 자신의 외모를 꾸미고 유지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난 그런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자신의 가치는 모두 외모에서 나온다고 굳게 믿는 그 믿음이 엄마를 항상 불안하게 만든 것이다. 자신의 외모가 나이 들수록, 그리고 조금씩 빛을 잃어갈수록 엄마를 꼭 닮은 나에게서 불안을 봤던 거 같다. 그래서였나 보다. 엄마는 내가 자신의 아름다움과 젊음을 훔쳐갔다고 나를 원망했으니까. 어른이 되고서야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엄마에게 바랬던 건 별게 아니었던 거 같다. 따뜻한 밥상을 받아보는 것. 다른 집처럼 엄마가 해주는 집밥을 먹어보는 것. 난 거창한걸 바란게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사실 내가 가진 이 많은 것은 내가 바랬던 적이 없던 것이고, 정작 내가 바랬던 그 작은 일상들은 아무리 원해도 가질 수 없었으니까. 모든 건 내가 선택한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내가 이 집에 들어오기로 결정했고, 망설이지 않았기에 지금 이 순간을 받아볼 수 있는 것이니까.
식탁에 앉아 밥 한 숟가락을 입에 넣자 눈물이 흐른다. 이건 무슨 감정이지? 난 눈물을 흘리는 내가 너무 생소했다. 난 어느 순간부터 울어본 적이 없다. 심지어 엄마 장례식장에서도 울지 않았다. 난 눈물을 흘리며 다시 밥을 먹는다. 그렇게 식탁에 앉아서 한참을 울었다. "눈물이 맛이 없네." 난 오랜만에 흘려보는 눈물을 잠시 먹어보았다. 내 안에서 흐르는 이 감정을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웠으니까. 난 눈물이 달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눈물은 단맛이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서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뽀득뽀득한 식기의 느낌에 나는 의미 없는 웃음이 났다.
대충 마무리한 다음 잠옷차림으로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영화를 본다. 한참이 지나서 영화에 빠져들 때쯤 다애의 소리가 들린다. "이층에서 지훈 씨랑 있었구나?" 다애는 익숙한 듯 내 옆으로 와서 허벅지에 얼굴을 묻는다. 나는 다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영화를 보았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난 그렇게 다시 눈물을 흘렸다. 영화가 너무 슬펐으니까. 난 영화를 보며 그렇게 눈물을 감췄다. "미안. 많이 기다렸지? 나도 많이 기다렸어. 이제 같이하자." 난 간단하게 모자만 눌러쓰고 지훈 씨에게 다가가 말했다. "같이 산책가요. 밤에 산책해 본 적 있어요?" 지훈 씨는 고개를 심하게 가로저으며 얼렁뚱땅 도망가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 내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저무는 석양을 맞으며 해 질 녘의 공원을 찾았다. 그렇게 그의 첫 밤산책은 나와 함께였다. 나는 그 순간 생각했다. 난 그의 처음이고 싶다.
[ 12화로 이어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