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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Sep 05. 2022

엄마와 화장품

화장대에 앉으니 로션이 떨어진 게 생각난다. 화장품 병을 거꾸로 뒤집어 탁탁 터는 것도 소용없다. 지난 열흘 간 그렇게 사용했지만 이제 더는 로션이 나오지 않는다. 빈 병이 야속하다.


바로 주문할까 하다가 머뭇거린다. 휴직 6개월 차가 되니 지출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게다가 휴직 신청하면서 '쓸 수 있는 휴직 다 끌어다 쓴 다음 사직해야지.'라는 계획을 남몰래 세우지 않았던가! 사직자가 된 후의 생활을 미리 연습해야 한다. 이번 달은 여행 다녀온 카드값까지  나올 테니, 화장품은 버틸 수 있는 때까지 버티기로 결심한다. 화장대 서랍을 여니 모아뒀던 샘플 로션이 몇 개 있다.

 

문득 엄마가 결혼 직후에 선물해준 화장품 세트가 떠올랐다. 엄마는 내가 사용하는 스킨, 로션, 크림 세트를 건네시며 말했다.

 

"결혼하고 나면 화장품도 맘대로 못 살 수 있어. 잘 보관해 둬."

"아니, 나 화장품 산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에이. 그래도 받아서 뒀다가 써."


그때는 사실 엄마의 선물이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일단 내 결혼을 준비하느라 부모님이 이미 많은 돈을 지출한 상황에서 화장품까지 사주신 게 부담이었다. 그리고 나는 화장품을 산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새 화장품을 보관해야 하는 상황이 싫었다. 화장품이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화장품에도 유효기간이 있고, 나는 물건을 쌓아두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가 발끈한 부분은 결혼하면 내가 필요한 걸 못 산다는 엄마의 발언이었다. 남편이 화장품을 못 사게 하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맞벌이라 나도 엄연히 돈을 버는데 대체 왜 맘대로 화장품을 못 산단 말인가! (엄마는 사위를 대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벌써 13년 전의 일이다. 엄마의 화장품 선물은 이미 다 써서 사라졌고, 선물을 받았던 기억도 사라져 갔다.


올 3월부터 휴직자가 되고 나의 지출 규모는 회사를 다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혼자 카페에 가고 점심도 사 먹고 1주일에 두세 번은 배달 음식도 시켜 먹었다. 그러나 요즘은 아낄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아껴봐야겠다고 의지를 불태운다. 배달 음식이나 외식비를 많이 줄였고 쇼핑도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화장품마저 구매를 미루자니, 젊은 날의 엄마가 떠오른다.


결혼할 때 양가의 경제적 도움 없이 어렵게 결혼 생활을 시작한 엄마는 아빠의 월급을 쪼개고 쪼개어 생활했다고 한다. 나를 임신했을 때는 돈에 쪼들려 먹고 싶은 음식도 거의 먹지 못했다고. 게다가 엄마와 아빠는 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는데 아빠의 직장 때문에 엄마는 외딴 지방에 내려가서 살았다. 그래도 아빠의 월급은 매달 들어왔고 사택에서 살았으니 찢어질 정도로 가난한 형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엄마는 아끼고 아껴서 자식들 교육도 많이 시키고 최대한 저축도 하였다. 집안 형편이 점점 나아졌지만 엄마의 생활 습관만은 그대로였다. 사용하지 않는 전자기기는 끄고 방이나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올 때는 반드시 불을 껐다. 치약은 다 쓴 것 같아도 아직 많이 남았다며 가위로 잘라 싹싹 긁어 썼다. 화장품은 안 나오면 뒤집어놓아 바닥에 있는 것까지 알뜰하게 사용하셨고 딸들 화장품은 좋은 걸로 사줄지언정 당신의 화장품은 받아놓은 샘플 화장품으로 버티기 일쑤였다.

"엄마, 그 샘플은 엄마가 쓰는 화장품도 아니잖아. 피부에 맞아?"라고 하면

"얘는. 그럼 이걸 버리니?"라고 하시며 서랍에 잔뜩 모아놓은 샘플을 보여주셨다.

엄마랑 화장품을 사러 가면 엄마는 항상 "샘플 많이 넣어주세요."라고 강조했다. 그런 엄마의 말에 부끄러운 적이 많았음을 고백한다.


화장대에 앉아 샘플 화장품을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결혼 직후에 엄마가 왜 화장품을 선물했는지 알겠다. 엄마는 당신은 신혼 때 비록 어렵게 살았지만 딸만은 필요한 거 다 쓰면서 편하게 살았으면 하신 거다. 엄마의 마음을 이해 못 하던 철부지 딸은 결혼 13년 만에 반백수가 되면서 엄마의 깊은 마음을 약간이나마 헤아려 본다.




+ 덧붙임.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스킨, 로션 세트를 주문하고야 말았다. 매년 명절 전에는 행사 상품이 나오곤 했다. 역시나 찾아보니 몇 만 원을 아낄 수 있는 행사 상품이 있어서 당장 주문했다. (할인 행사는 지!)

아무래도 퇴사는 나의 상상 속에서만 이루어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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